도재기의 천년향기

신라의 황금유물들

입력 : 2018.03.30 18:28:00 수정 : 2018.04.04 17: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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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기의 천년향기

도재기

경향신문 선임기자

허리띠 장식물 하나 하나에 담긴 신라인의 소망, 보이나요?

신라를 상징하는 황금유물은 금관이다. 지난 글 ‘신라 금관’(3월17일자)에서 금관의 의미와 상징, 얽힌 이야기들을 살펴봤다. 하지만 금관 말고도 찬란한 빛을 쏟아내는 신라의 금제유물은 많다. 그냥 많은 게 아니라 특이할 정도로 많다.

1500여년 전의 신라 고분에서 나오는 황금유물 가운데 금제 허리띠는 금관과 늘 함께 발견된다.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 역할을 한 허리띠는 금판들을 연결해 띠를 만들고, 그 아래로 띠드리개를 늘어뜨린다. 띠드리개 끝에는 저마다 상징을 담은 굽은옥, 향주머니(향낭), 물고기 모양, 숫돌, 족집게 등을 매달았다. 사진은 금관이 처음 나온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88호). 띠드리개 끝의 장식물은 왼쪽부터 ① 향낭, ② 고기 모양, ③ 굽은옥, ④ 금판에 맞새김한 용이다.

1500여년 전의 신라 고분에서 나오는 황금유물 가운데 금제 허리띠는 금관과 늘 함께 발견된다.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 역할을 한 허리띠는 금판들을 연결해 띠를 만들고, 그 아래로 띠드리개를 늘어뜨린다. 띠드리개 끝에는 저마다 상징을 담은 굽은옥, 향주머니(향낭), 물고기 모양, 숫돌, 족집게 등을 매달았다. 사진은 금관이 처음 나온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88호). 띠드리개 끝의 장식물은 왼쪽부터 ① 향낭, ② 고기 모양, ③ 굽은옥, ④ 금판에 맞새김한 용이다.

5세기에서 6세기 전반 조성된 경주 대릉원 일대의 대형 고분에서는 금관과 함께 온갖 종류의 황금유물이 쏟아져 나온다. 주검이 안치된 널 속은 물론 널 옆에 별도로 마련한 껴묻거리(부장품) 상자 안팎에도 금빛 유물들이 쌓였다. 관모와 관모장식(관식),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허리띠, 금동신발, 심지어 그릇이나 무기인 칼, 안장·발걸이(등자) 같은 말갖춤 장식물…. 동시대의 고구려·백제와 비교해도, 세계적으로 봐도 금제유물의 양이나 종류가 압도적이다.

하나같이 1500여년 전 신라의 역사와 문화, 신라인의 생활문화상, 한국 고대사를 연구·복원하는 데 귀중한 문화재들이다. 나아가 고구려와 백제, 중국, 서역과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 상징물을 매단 허리띠부터 금그릇까지

신라의 황금문화 절정기는 5세기~6세기 전반의 150여년으로 본다. 이 시기 지배층 무덤들에서 금제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돼서다. 천마총, 금관총 같은 무덤의 주인공은 금관부터 귀걸이, 허리띠, 금동신발 등 온몸을 금빛 유물로 치장했을 정도다.

그중 금제 허리띠(장식)는 늘 금관과 함께 출토되는 유물이다. 금관총·천마총·서봉총·금령총에서 금관과 같이 발굴됐다. 황남대총의 경우엔 여성 무덤이면서 금관이 나온 북분은 물론 남성 무덤으로 은관이 발견된 남분에서도 출토됐다. 금관보다 금이 많게는 2배나 더 들어가는 이 유물은 빼어난 세공기술, 디자인도 흥미롭다.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88호)는 금관이 처음 발견된 금관총(5세기)에서 나왔다. 길이 109㎝, 무게 1181g으로 뚫음무늬의 작은 금판 40개를 연결하고 17줄의 띠드리개를 늘어뜨렸다. 주검의 허리에 착용된 채 발견된 ‘천마총 금제 허리띠’(국보 190호)는 44개의 금판을 연결, 길이가 125㎝에 이른다.

여성 무덤인 황남대총 북쪽 무덤(북분)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된 ‘금제 굽다리접시(고배)’. 실용품보다 껴묻거리(부장품)로 보인다.

여성 무덤인 황남대총 북쪽 무덤(북분)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된 ‘금제 굽다리접시(고배)’. 실용품보다 껴묻거리(부장품)로 보인다.

허리띠는 띠드리개 끝마다 상징적 장식물을 매달아 눈길을 끈다. 굽은옥은 생명을, 약통은 질병 치료, 물고기는 식량이나 다산, 농기구의 하나인 살포는 농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또 향주머니와 족집게, 숫돌, 손칼, 금판에 맞새김한 용 등을 매달기도 했다.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출토된 ‘노서동 금목걸이’(보물 456호). 일본에 반출됐다가 반환된 문화재다.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출토된 ‘노서동 금목걸이’(보물 456호). 일본에 반출됐다가 반환된 문화재다.

이는 생활필수품을 허리에 매달고 다닌 북방 유목민족 풍습에서 유래돼 조형적으론 중국,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신라인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미감으로 이를 발전시켰고, 지배자의 권위나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만들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신분에 따라 여러 재질의 허리띠를 착용했는데, 금제 허리띠는 가죽이나 직물 허리띠에 덧댄 장식으로 여겨진다. 왕과 왕족의 전유물이자 특별한 의식용이나 장례용품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신라의 숱한 금속공예품 가운데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무엇일까. 대형 고분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금귀걸이다.

당시의 미감과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자랑하는 금귀걸이는 지금까지 300여쌍 확인됐다. 고구려, 백제, 가야 유적에서도 출토되지만 신라에 비하면 미미하다. 무덤 주인공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리지 않고 나오며, 남성 귀걸이가 더 화려한 경우가 많다.

가장 주목받는 금귀걸이는 경주 보문동에서 출토된 1쌍의 ‘부부총(합장분) 금귀걸이’(국보 90호)다. 평균 길이 8.7㎝의 둥글고 굵은 고리의 귀걸이는 화려함의 극치다. 금판을 둥글게 말아 붙여 속이 빈 굵은 고리 표면에 수백개의 금알갱이와 금실로 꽃잎무늬 등을 표현했다. 6세기에 제작된 이 귀걸이는 국내외 전문가들이 볼 때마다 늘 감탄하는 유물이다. 귓불에 물리는 부분이 거칠고 구조도 약해 착용품이 아니라 의례품이다. 백제도 유명한 금귀걸이가 있으니, 공주 무령왕릉에서 나온 1쌍의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156호)와 2쌍의 ‘무령왕비 금귀걸이’(국보 157호)다. 발해 연안에서 시작된 금귀걸이는 삼국을 거치며 저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진화한 뒤 일본으로도 전래됐다. 학술적으로 각국의 문화 수용과 재창조, 교류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인 것이다.

새날개가 펼쳐진 모양의 관 장식물인 '천마총 금제 관식' (보물618호)

새날개가 펼쳐진 모양의 관 장식물인 '천마총 금제 관식' (보물618호)

모자의 하나인 관모(冠帽)와 관을 장식한 새 날개 모양의 관식도 많다. 관모는 금이나 은, 금동, 비단, ‘천마도’의 재료인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 등으로 만들었다. 금제 관모는 너비가 좁고 크기도 작아 직접 머리에 쓰기는 힘들다. 신분을 드러내는 위세품이거나 장례의례품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착용했다면 비단 같은 재질의 모자 위에 고정시켰을 것이다.

금으로 도금한 ‘금동신발’, 금·은·각종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고리장식칼’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조나 견고함, 크기 등으로 볼 때 이들은 실용품이라기보다 내세에서도 현세의 권위를 누리기를 기원하는 장례품으로 보인다. 특히 고리장식칼은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남성 무덤에서만 나와 무덤 주인의 성별을 가리는 문화재다.

이 밖에 굽다리접시 등 금으로 만든 여러 종류의 그릇, 목걸이, 가슴과 등의 일부까지 드리우는 가슴걸이도 있다. 또 금반지도 많이 출토되는데, 천마총 주인공의 경우 두 손에 모두 10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 시기 일부 금제유물은 페르시아 등 서역과의 문화교류도 증명해준다. 터키석과 각종 보석을 박은 황남대총 북분의 금팔찌, 경주 계림로 고분에서 나온 ‘계림로 보검’(장식보검·보물 635호), 금관총·서봉총 등에서 나온 로만 글라스나 유리구슬 장식품은 한눈에도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 이 많은 금은 어디에서?

황금유물이 유독 많은 신라. 신라와 금의 관계는 일찍부터 언급된다. 김알지 탄생 설화에서도 금궤가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왕 때인 서기 65년, 알지는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에서 나왔다. 일성왕 때인 144년에는 ‘금은주옥(金銀珠玉) 사용을 금지’시켰다는 후대 기록도 있다. 4세기 후반부터는 지배자가 자신의 권위를 강조할 필요가 생겼고, 금을 비롯한 귀금속으로 갖가지 위세품을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5~6세기엔 황금에 특별한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면서 황금문화 절정기에 이른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사상적 변화와 더불어 장례의례나 무덤 양식이 바뀐다. 이에 따라 황금은 지배층 위세품에서 사찰과 불교공예 쪽으로 집중됐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물론 삼국통일 후에도 신라에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갖가지 금제품이 발달했다.

신라의 황금문화는 당시 외국에서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금제유물을 이야기할 때 늘 인용되는 기록이 있다. 8세기 초반의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의 나라’로 표현했다. 9세기 중후반 이슬람의 지리학자 이븐 후르다드베는 신라에는 “산과 들이 많고 금이 풍부해 무슬림들이 (신라에) 들어가면 정착한다”고 했고, 10세기 중반의 알 마크디시는 신라인들이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고 적었다.

경주 보문동 부부총(합장분)에서 발굴된 ‘부부총 금귀걸이’(국보 90호). 수백개의 금알갱이·금실을 정교하게 세공(왼쪽 세부 모습)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경주 보문동 부부총(합장분)에서 발굴된 ‘부부총 금귀걸이’(국보 90호). 수백개의 금알갱이·금실을 정교하게 세공(왼쪽 세부 모습)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1000년을 훌쩍 넘어 신라의 황금유물이 많이 전해지는 것은 제작량이 많아서다. 또 다른 이유도 생각할 수 있다. 신라인의 내세관과 독특한 무덤 구조다. 신라인들은 현세의 영광스러운 삶이 내세에도 계속되리라고 믿었고, 이런 내세관에 따라 현세의 귀한 껴묻거리를 죽은 자와 함께 묻어줬다.

무덤의 구조도 큰 몫을 했다. 금제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이 무덤은 주검을 안치한 나무 널 옆에 껴묻거리 상자를 따로 놓는 구조다. 그러곤 이를 둘러싸는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은 뒤 흙으로 큰 봉분을 만든다.

그렇다면 신라는 이 많은 금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워낙 막대한 양이어서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금광이 있더라도 당시엔 채굴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 박홍국 위덕대 교수는 경주 일대의 강과 하천에서 사금 채취로 조달했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직접 수십차례 강에 나가 사금을 채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직 금 생산 과정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 학계의 숙제로 남아 있다. 다만 방대한 양과 까다로운 제작 공정으로 볼 때 전문화된 제작집단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금제 관모들 가운데 빼어난 공예기술을 보여주는 ‘천마총 관모’(국보 189호)와 세부 모습(왼쪽).

신라의 금제 관모들 가운데 빼어난 공예기술을 보여주는 ‘천마총 관모’(국보 189호)와 세부 모습(왼쪽).

고대 문화재의 상당수는 여러 궁금증을 낳는다. 금관이 그러하듯 신라의 금제유물들도 마찬가지다. 속 시원하게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의 더 뜨거운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신라의 금유물들은 오늘도 관람객으로 하여금 온갖 상상을 하게 만든다. 우리들 저마다에게 영감을 안겨준다. 이름 모를 신라의 장인들이 이 땅의 후손들에게 주는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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