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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맥아더 때문이었다···순진했던 미군정

2018.04.01 18:07 입력 2018.04.02 10:10 수정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교수

순진했던 미군정은 안정적 힘을 위해 이승만이 필요하다는 맥아더의 망상을 꺾지 못했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오른쪽)과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 소장. 해방 후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정부 수립 때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하지는 남한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오른쪽)과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측 수석대표 앨버트 브라운 소장. 해방 후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정부 수립 때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하지는 남한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우익은
미군정의 딜레마였고
중도 리더십을 원한 하지 사령관은
30대 초반의 버치 중위에게
좌우합작위원회 조정을 맡겼다

수많은 한국 정치인을 만난 버치는
상부에 올린 보고서의 모든 사본과
개인 메모까지 빠짐없이 보관했다

1945~48년 한국을 담은 이 자료는
비합리적 한국 정치의 원형을 찾고
이 땅에 매카시즘이 작동하는
근원을 찾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① 맥아더 때문이었다···순진했던 미군정

1947년 5월 워싱턴에 소환되었다가 서울에 귀환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미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이 간담회에서 자신이 다른 점령군 사령관에 비하여 두 가지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러시아인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점령 지역 중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분할점령이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인들의 성격이었다. “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아일랜드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고 유머의 센스가 많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또한 주장이 많다. 공상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설화들이 있다. 술 먹는 것을 좋아하며 파티와 휴가, 정치권력을 사랑한다. 지적 수준이 높으며 동시에 그러한 수준으로 인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매우 획일적이며 중국인과 다르며, 일본인도 아니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내려왔으며,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양의 기준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버치 문서 박스 5)

평생을 야전에서 보냈던 하지 사령관으로서는 한국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이끌어가면서 한국의 정치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국이 패전국이었다면, 점령 지역의 거주민들이 독일이나 일본에서처럼 승전국에 고분고분한 자세를 보였겠지만, 한국은 패전한 일본 제국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패전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국 일본의 피해자들로서 승전과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받으러 온 야전사령관의 입장에서 이러한 한국인들을 다루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편견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국인의 독특한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본 것 같은 평가를 외신기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게다가 미군정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딜레마에 빠졌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추진했던 신탁통치안을 보수 우익세력들이 반대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우익세력들을 지원하고, 이들이 신탁통치하의 주도권을 잡고 궁극적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지가 외신 인터뷰를 한 시점에서 그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미군정의 이러한 딜레마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었던 이는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중위였다. 그의 계급은 ‘중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통치했던 시기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고, 미소공동위원회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자문관으로 활동했다. 하버드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출신으로 오하이오주의 변호사로 활동하던 그가 1945년 12월15일 한국에 배치되자 하지 사령관은 그를 중용하였다. 버치는 텍사스의 포트 샘 휴스턴(Fort Sam Houston)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우수 생도상을 받은 인재였다.

하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떼를 쓰고 있는’ 골치 아픈 보수 우익의 지도자들이나 소위 ‘추수폭동’을 주도한 좌익이 아닌 중도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을 세우고 싶었고, 이를 위한 중재자로 버치 중위를 선택했다. 버치가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도록 지원하였고, 그 활동이 단독정부 수립이 확정될 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지의 지원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버치는 30대 중반(1910년 1월8일생)의 나이에 한국의 쟁쟁한 정치인들을 만나고 거물이 되었다. 그는 정치인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치적 동향을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흐름의 방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정치자금과 정치인들의 숙소와 당사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관여하였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빈 공간들을 누가 차지하는가는 당시 한국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국내와 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던 유수한 한국의 정치인들이 버치를 만나고자 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도 했고, 다양한 상황에 대해 청원을 하기도 했다. 버치는 자신이 만난 정치인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미군정의 상관들에게 전달했는데, 그 복사본을 모두 보관하였다. 또한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부 문서들이나 개인 메모 역시 보관하였다. 그렇게 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들은 사후 그가 졸업한 하버드 대학교 옌칭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으로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던 레너드 버치.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으로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던 레너드 버치.

버치는 1948년 38선 이남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추진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통합 한국 정부의 수립이 실패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73년 버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미군정 시기 연구자로부터 그 시기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버치는 마치 자신이 실패했던 한국에서의 작업에 대한 한풀이를 하듯 10장이 넘는 분량의 편지를 그에게 썼다.

그의 편지는 “나는 한국에서의 진행상황을 보면서 철저하게 실망했고, 용기를 잃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지 장군은 나에게 동의했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안정적 힘을 갖기 위하여 이승만이 필요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도쿄, 특히 연합군최고사령부로 인해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고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활동이 실패했던 원인의 결론을 내렸다. 이 편지를 쓰기 전이었던 1965년 ‘주한미군정사’를 집필한 호그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버치는 웨스트포인트 출신과 비육사 출신 간의 갈등과 함께 맥아더가 이끌고 있었던 연합군최고사령부와 미군정의 갈등, 국무부와 국방부 사이의 견해 차이에 대해 언급했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 하지 장군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미국을 대표해서 참여했다.

1973년의 편지에서 태평양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다음 버치는 한국 내 정치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승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고 첨언했다. 물론 버치 역시 하지와 마찬가지로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참여시켜야만 하는 미국의 딜레마를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편지는 “하지 행정부는 순진했다”라고 마무리되어 있다.

레너드 버치가 사용한 한자·한글 이름과 주소가 들어간 명함.

레너드 버치가 사용한 한자·한글 이름과 주소가 들어간 명함.

버치는 왜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왜 좌절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성공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던 것인가? 버치가 보관하고 있다가 하버드 대학으로 이관된 그의 자료들은 그가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보고 느꼈던 내용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와 견해를 달리했던 미군정 내 군인, 관리들과의 갈등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미군정 시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부 문서들은 미군정 자료가 공개될 때 이미 햇빛을 보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료들도 적지 않다. 또는 기존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자료들 역시 주목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분단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을까? 국내에 전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이 미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빠른 시간 내에 한국민주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의 재기용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알면서도 미군정은 왜 이들을 계속 고용해야 했는가?

이러한 해답을 찾는 과정은 한편으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비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한국 정치의 기원과 그 원형을 찾아낼 것이다. 이는 버치 중위가 갖고 있었던 자료들이 비이성적 세력들이 권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과 함께 지방정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연재를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의 탈냉전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한국에서 매카시즘이 작동하고 있는 그 근원을 찾아가도록 하겠다.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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