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식, 별미장은 익어가고

2018.04.04 20:46 입력 2018.04.04 20:54 수정

[직설]청명·한식, 별미장은 익어가고

청명·한식 즈음은 봄의 절정에서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는 때이다. 입춘 즈음에 시작된 농사는 이 즈음에 궤도에 오르고 제 속도가 붙는다.

전통사회에서는 청명-한식 즈음 노동의 속도와 밀도로 한 해의 끝까지 갔다. 논밭의 둑을 돌보는 가운데 농민은 봄비 맞으며 가래질과 쟁기질에 분주했다. 늦봄의 두릅·고사리·고비·도라지 캐기와 무·배추·아욱·상추·고추·가지·파·마늘·오이 심기가 나란했다. 복숭아·사과·배 등의 접붙이기도 이때를 놓칠 수 없었다. 고되지만 겨울보다 음식 장만하기는 좋고, 여름보다 보관하기도 낫다. 청명·한식의 성묘는 이때의 먹을거리와 별미를 가지고 공동체를 격려하는 의례라고 할 것이다.

먹는 얘기로 더 들어가 보자. 고추장, 두부장 같은 별미장도 이때 마련했다.

메주가루에 찹쌀 등의 곡물, 그리고 조청이 들어가되 고춧가루의 풍미가 앞서는 독특한 장인 고추장은 18세기면 조선 서민대중 식생활에 깊숙이 들어왔다. 16세기 이후 아메리카 대륙 안데스의 은(銀)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조선에 이른다. 옥수수, 땅콩, 담배 등이 고추와 함께 지구를 일주한 새로운 작물이다. 조선인은 이 고추를 가지고 지구 어디에도 없는 고추장이라는 문화유산을 이룩했다.

또 다른 별미장으로 두부를 장에 박아 서 장과 두부가 서로를 머금은 채 숙성되는 두부장을 담그기도 했다. 별미장은 막 익고, 봄꽃은 흐드러진다. 성묘하기에 좋은 때란 뒤집어 말해 나들이하기 좋은 때다. 염불도 해야겠지만 잿밥을 빠뜨리겠는가.

별미는 장뿐만이 아니었다. 허균(1569~1618)은 일찍이 봄날의 별미로 쑥떡, 느티잎떡, 진달래화전, 배꽃화전을 손꼽았다. 화전은 찹쌀반죽에 꽃잎을 장식해 기름에 지진 떡이다. 꽃놀이의 멋과 흥취는 화전 덕분에 한층 살아났다.

기록을 뒤지면 뒤질수록 먹는 얘기는 한층 요란하다. 녹두묵을 곱게 채치고, 미나리, 돼지고기, 김을 더한 뒤 초장으로 마무리하면 보면서부터 맛이 느껴지는 고급 잡채인 탕평채가 된다. 말갛게 투명한 녹두녹말 국수를 꿀물이나 오미자즙에 말면 혀끝보다 눈으로 먼저 맛보는 국수 요리인 화면(花麵)이 완성된다. 그 이름마저 꽃답다.

횟감도 제철을 맞았다. 한강 하류에서 잡히는 웅어는 풀잎처럼 저며 종이 위에다 널어 살점의 수분과 유분을 정리해가면서 세심하게 손질했다. 회에는 겨자장이나 고추장 또는 초와 꿀을 섞어서 풍미를 끌어올린 초고추장을 곁들였다. 한식에서 매콤달콤, 새콤달콤의 맛 설계는 생각보다 연원이 깊다. 단 빙초산과 물엿(콘시럽)으로 낸 결과와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늦봄의 복이나 도미로는 국을 끓였다. 한강과 임진강 하구의 복은 목숨을 바쳐 먹어도 아깝지 않은 별미로 통했다. 봄날의 복국은 농도가 옅은 장에 봄미나리를 더한 고급스러운 요리였다. 회에서 탕까지, 오늘날 고급 음식점의 생선 다루기는 저리 가라다.

마를 쪄 꿀을 바르고 칼로 다져 낸 잣가루에 버무리거나, 찹쌀가루를 입혀 지진 뒤 잣가루에 버무린 서여증식은 오늘날 제과의 관점으로 보아도 빠질 것 없는 별미 과자이다. 여기에 고급 찹쌀 청주가 뒤따른다. 제조방법이 서로 다른 청명주, 두견주 기록은 이루 다 늘어놓기가 어렵다. 진달래꽃은 봄날 술의 향색미(香色味)를 더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다.

늦봄이 아주 이울기 전, 여름 기운이 막 봄을 압도하기 전, 사람들은 별미를 마련해 자연으로 나갔다. 조상을 찾아 인사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빌고, 고된 여름을 건너갈 스스로를 격려했다. 일과 놀이가 함께인 즈음, 고된 노동을 앞두고 공동체가 서로를 위로하는 때가 이때였다. 덕분에 무덤가도 쓸쓸하지 않았다. 홍석모(1781~1857)는 한식 성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무덤가에 술 모자란 귀신은 하나도 없으리.”

하지만 찾아올 후손이 없는 귀신은 어쩐다. 심지어 무덤조차 없는 귀신은? 여기서 사회가 할 일이 있다. 나라가 나설 일이다. 중앙정부와 지역에서는 교외에 제단을 차리고 제물을 마련해서 외로운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외로운 넋까지 챙기고서야 옹근 청명, 제대로 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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