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연 정복·근대성 상징…가공된 ‘우리’에 가둬버린 동물의 세계

2018.04.05 21:23 입력 2018.04.05 21:30 수정

동물원이라는 공간

창경원은 1909년 일제가 창경궁 내에 만든 동물원이다. 조선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궁내에 동물원을 조성,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1973년 창경원을 찾은 시민들이 물범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동물원은 1983년부터 철거됐고, 1986년 창경궁으로 복원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창경원은 1909년 일제가 창경궁 내에 만든 동물원이다. 조선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궁내에 동물원을 조성,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1973년 창경원을 찾은 시민들이 물범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동물원은 1983년부터 철거됐고, 1986년 창경궁으로 복원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재 한국에선 동물보호·복지 운동, 반려동물 문화의 성장 속에서 동물원의 동물들이 처한 현실이 점점 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텔레비전 속 동물 프로그램들에선 종종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처한 슬픈 현실을 보여주곤 한다. 경영이 힘들다거나 사육사의 수가 모자란 동물원에서 동물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가며, 이들의 모습은 흡사 기근과 기아에 고통받는 지구 남반구의 어린이들을 연상시킨다. 폐업한 동물원의 동물들의 경우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다. 이들은 보통 방사되거나, 다른 동물원으로 입양되거나, 이도 저도 힘들 경우 안락사 된다. 이와 같은 동물원 관리의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서 작년부터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이 시행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몇 개의 기사들은 이 법이 실질적인 관리 기준의 미비로 인해 현실적인 강제성이 떨어지며, 따라서 법 개정 전후 동물원의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 동물원의 동물들

많은 이들에게 동물원은 어렸을 적 한두 번은 가봤음 직한 장소이다. 동물원의 기억은 생생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빛바랜 사진들의 배경으로 남아 있을 법하다. 시대가 변하고 유흥의 형태 또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존 버거는 동물원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일상 속에서 동물이 사라짐과 동시에 등장하였음을 이야기한다. 동물에 대한 향수는 18세기적 발명품이며, 기술의 발달이 동물의 여러 가지 역할을 대체하게 된 20세기에 이르러 동물들은 동물보호구역이나 국립공원 안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거의 이와 같은 말은 동물원 이전의 동물-인간 관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가능성, 즉 동물원의 등장은 곧 달라진 삶을 의미함을 상기시킨다. 물론 동물원 또한 시대적으로 계속 변해왔다. 과거의 동물원은 지금의 동물원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인간 전시와 인종진화론

불과 100여년 전 구미의 동물원에서는 동물만 전시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른바 ‘인종 전시(ethnological expositions)’가 유럽 전역을 돌며 관람객을 엄청나게 끌어모았던 것이다. 19세기 말 동물원의 발달 속에서 등장하게 된 인종 전시는 유럽인들의 눈에 이국적인 모습의 인종적·식민주의적 타자들을 전시하였다. <텔레비전과 동물원>(2007)의 저자 올리비에 라작에 따르면 1877년부터 1912년까지 스물네 번의 인종 전시회가 파리의 순화원에서 개최되었으며, 이 전시회의 주인공은 “에스키모인, 남미 팜파스의 목동, 푸에고인, 갈리비족, 아로카 인디오, 신할리족, 아샨티인, 호텐토트족, 라플란드인, 코사크인, 소말리아인, 다호메이인, 이집트인, 카리브 인디언, 코트디부아르 원주민, 인도인, 갈라인, 난쟁이”, 그리고 “흑인”들이었다. 1904년의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는 “인류의 모든 인종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는 포부”를 갖고 다양한 종족들, 특히 ‘발전’ 정도에 따른 그들의 차이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였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전시된 피그미족 오타 벵가. 부족의 의례에 따라 이를 뾰족하게 갈았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전시된 피그미족 오타 벵가. 부족의 의례에 따라 이를 뾰족하게 갈았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단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프리카 콩고에서 온 피그미족의 전시였으며, 그중에서도 오타 벵가(1883~1916)의 비극적 삶은 잘 알려져 있다. 벵가를 콩고에서 미국으로 오게 한 이는 세인트루이스 박람회를 위해 한 무리의 피그미족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주문을 받고 콩고를 여행하던 탐험가이자 사업가였던 새뮤얼 베르너였다. 베르너는 벵가에 대한 대가로 한 파운드의 소금과 옷가지들을 노예상에게 지불했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전시되기 시작한 벵가는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다. 벵가는 온화한 성격을 가졌으며, 사람들은 피그미족 의례 때문에 뾰족하게 갈아놓은 벵가의 이빨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당시 신문들은 미국에 있는 유일한 진짜 ‘식인종’이라는 말과 함께 벵가의 사진들을 싣는 데 열을 올렸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가 끝난 후 베르너와 함께 잠시 콩고로 돌아갔던 벵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과 브롱크스 동물원의 ‘원숭이 집’에서 ‘야만인’의 표본으로 전시되기도 하였다. 벵가는 원숭이 집이 여러 논란과 함께 막을 내리자 당시 이미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아원으로 보내지기도 하였으며, 이후 담배 공장의 노동자로 살다가 32세가 되는 해 권총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오타 벵가와 그의 비극은 18세기에 등장하여 20세기 초반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인종진화론의 산물이었다. 인종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식민주의적 ‘인종’ 개념이 결합한 것으로서, 다양한 인간 집단들을 하나의 진화론적 발달 상태 또는 위계 안에서 나누고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인종이라는 용어는 17세기에 등장하였으며, 이미 시작점부터 ‘차이’를 우열 관념 안에서 바라보는 개념이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의 지식인이었던 조제프 고비노는 그의 <인종불평등론>에서 유럽인들의 우월성을 찬양하고, 백인종에서 멀어질수록 극도의 추함과 열등한 형질을 대량 생산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인종진화론은 인종적 위계라는 사회적 담론을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지식 안에서 확고히 하려 하였으며, 당시의 유럽과 미국에선 권위 있는 인류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때의 인류학적 삽화들을 보면 백인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유인원인 침팬지 사이에 흑인의 두상을 그려 넣거나 나뭇가지 위에 흑인,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를 함께 그려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백인, 흑인, 유인원의 진화론적 차이와 위계를, 후자의 경우 유인원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 흑인의 진화론적 상태 또는 여전히 ‘자연’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간주된 흑인의 인종적 열등함을 상징한다. 즉, 여기서 ‘흑인’은 문명 대 자연, 또는 인간 대 동물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에서 후자에 가까운 존재로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종진화론은 식민주의의 산물이었으며, 또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지식이었다. 아직 야만적이고 ‘야생’의 삶을 살아가는 타자를 계몽하고 교화시켜 문명의 삶으로 이끄는 것은 키플링이 이야기한 “백인의 의무”였던 것이다. 동물원, 특히 인간 전시회는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였으며, 또 그 목표를 달성해야만 했다. 즉, 동물원의 인간 전시는 인류의 다양성과 동시에 타자의 야만성과 야생성을 성공적으로 재현할 필요가 있었다. 라작에 따르면, 1883년 당시 파리 순화원에 전시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해 사람들은 충분히 ‘야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인디언들은 가능한 한 ‘인디언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또한, 브롱크스 동물원의 원숭이 집에 벵가와 함께 넣어진 오랑우탄 ‘도홍’은 야생성의 더 실감나는 재현을 위한 ‘소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차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보려고 했던 제국의 욕망과, 동시에 그 욕망의 단순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활용했던 타자들의 전략과 마주한다. 즉, 인디언들은 더 ‘리얼’한 연기와 춤을 선사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였으며, 벵가는 그의 뾰족한 이빨을 보여주는 대가로 관람객들에게 5센트씩을 요구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이 ‘야만적 타자’라는 식민주의적 인종관의 재생산이란 맥락에서 벌어졌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창경원과 근대성

한국 최초의 동물원이었던 창경원 또한 위에서 이야기한 식민주의의 세계사 안에 위치해 있다. 창경원은 1909년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 내에 만든 동물원과 식물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제는 동물원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했으며, 이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여 즐길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창경원 설립에 관한 연구들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새로운 시설을 모두가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던 창경원의 주요 관람자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관리들과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이었으며, “공중을 위한 동물원”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 시설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이었다(서태정 <한국근현대사연구>). 창경원이 일반인을 위한 도시 유흥시설이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84년, 창경궁 복원 공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창경원은 수도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서 존재하였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창경원은 보통 대한제국 말기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의 상징으로서만 기억된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일제가 몰락해가는 조선의 심장 같은 곳에 하필 왜 동물원이라는 시설을 만들고자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물원은 19세기 이후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던 일본에 있어서 서구의 발전과 근대 도시의 기본을 의미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따라서 창경궁 안의 동물원과 식물원의 건립은 동물과 식물 등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 대한제국이란 국가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넘어서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이룩한 근대성을 식민지 조선의 심장부에서 과시하는 사건이었다(서태정). 창경궁 안의 동물원은 조선의 ‘미개함’, 또는 전근대성과 일본의 ‘발전됨’, 또는 근대성이라는 식민주의적 이분법을 물질화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동물원이란 시설이 근대성을 상징한다고 하였을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물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 통제, 지배를 상징하며, 이는 근본적으로 자연 대 문화라는 근대적 이분법 안에서 가능해진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연’을 저 멀리,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거나 가공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간주하지만 ‘자연’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는 엄밀히 말하면 근대적 산물이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일 뿐이다. 인류학, 인문지리학, 과학기술학 등의 사회과학에서 이는 ‘자연의 사회적 구성’이란 개념으로 설명되며, 제국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또는 자본주의하에서 자연 대 문화 이분법이 어떤 권력과 지식을 생산·재생산해 왔는지는 이 분야의 오랜 화두로서 존재해 왔다.

■ 동물원은 무엇을 하는 공간인가

19세기 이후 동물원은 근대 문명의 상징인 ‘도시’란 공간 속에서 ‘자연’을 재생산해 왔으며, 삶의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방식 또한 변해 왔다. 과거의 동물원들이 인간을 포함한 종의 다양성을 관람객 앞에 재현해 보이는 데 집중하였다면, 지금의 동물원들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멸종위기 동물의 보호 및 번식을 통해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 큰 가치를 둔다. 이 둘은 얼핏 다른 목적을 가진 듯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 사회에 의한 ‘자연’의 재생산이란 점에서 유사하다. 물론 현재 한국에 있는 동물원의 수만 해도 100여개에 달한다고 하며, 이들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동물원들은 여전히 종의 다양성 또는 동물의 세계를 어떻게 더 스펙터클하게 재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며, 자본과 기술력에 따라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동물권 또는 동물해방이란 측면에서 동물원 폐지의 요구는 점점 더 커져 왔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향수, 그것을 재생산하고자 하는 근대적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동물원과 같은 공간이 완전히 사라질지는 의문이다.

▶필자 전의령

[전문가의 세계 - 전의령의 동물이야기] (3) 자연 정복·근대성 상징…가공된 ‘우리’에 가둬버린 동물의 세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채플힐) 인류학과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이주와 다문화에 대해 담론화하는 방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신)자유주의 통치성, 반다문화와 우익 포퓰리즘, 동물과 생정치에 관한 논문들을 써왔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류학적 믿음 하나로 다양한 연구 주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현재 전북대학교 고고문화인류학과 조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병행 중이며, 전주와 파주를 오가며 세 마리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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