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만 방송하는 세상, 왜 안 돼?

2018.04.06 17:23 입력 2018.04.06 17:25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남자들끼리 명예·인기·부를 나눠가지던 시간은 끝날 때가 됐다

김생민 너마저. 인터넷 언론 디스패치를 통해 10년 전 김생민이 여성 스태프들에게 가한 성추행이 폭로되는 걸 보며 든 생각이다.

방송인 김생민은 성추행이 폭로되던 시점에 지상파, 케이블을 넘나들며 10개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다. 남성들의 잠재적 성범죄는 해당 방송에 큰 피해를 입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방송인 김생민은 성추행이 폭로되던 시점에 지상파, 케이블을 넘나들며 10개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다. 남성들의 잠재적 성범죄는 해당 방송에 큰 피해를 입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주관한 ‘푸른 미디어상’을 수상할 정도로 자극적이지 않은 화법을 구사하고, KBS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여성 진행자인 송은이, 김숙과 살갑게 대화할 줄 알던 흔치 않은 남성 방송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내가 남성이기에 느끼는 순진하고도 한가한 감정일 것이다.

미투 운동을 통해 수많은 남성들의 성폭력 사실이 폭로될 때마다 남성들은 놀라고 여성들은 분노하면서도 담담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및 강간문화를 상당 부분 내면화하고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던 남성들에게 해당 폭로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여성들에겐 이미 경험하고 알고 있지만 이제야 드러나는 새로울 것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저 사람도?’라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람 좋아 보이던 오달수가? 젊고 세련된 진보 정치인인 안희정이? 자기 분야에서 존경 받는 어른이던 박재동이? 모범적이던 김생민이? 그때마다 놀랐지만 이 역시 한가한 소리다. 이 놀라움엔 성범죄 가해자를 특정한 소수의 인물상으로 규정하고 남성 일반과 구분하고 싶어 하는 안일함이 깔려 있다.

이번 김생민 성추행 폭로를 보며 개인에 대한 실망감이나 놀라움에 그쳐서 안되는 건 그래서다. 바른 생활 사나이의 얼굴로 스태프를 성추행하는 이중인격으로 악마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생민의 모든 게 가식이라기보다는 저 정도로 꽤 모범적인 남성조차 자신보다 조직 구조 안에서 약자인 여성 앞에선 한 줌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보는 게 맞다.

성범죄에 있어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며 들키지않은 가해자이미지에 좌우되는 방송,
왜 위험을 감수하며 남자만 쓰나남성의 시장 가치는 과대 평가됐고, 잠재적 손실도 커질 것

앞서 예를 든 ‘안 그래 보이던’ 남성들의 면면을 보라. 성범죄에 있어 남성의 존재는 잘 봐줘야 잠재적 가해자이며, 적지 않은 경우 아직 들키지 않은 가해자다. 이것은 명백한 리스크다.

당장 김생민의 경우 그의 반듯한 이미지에 기댔던 수많은 광고들이 내려갈 것이며, SBS <TV 동물농장>, MBC <출발 비디오여행> 등 그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들도 멤버 교체가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그의 전성기를 열어준 <김생민의 영수증>은 송은이, 김숙의 존재감과는 별개로 폐지가 결정됐다. 비슷하게 tvN 드라마 <크로스>와 OCN <작은 신의 아이들> 역시 성범죄 사실이 드러난 조재현, 조민기 등이 하차하며 내홍을 겪어야 했고, 영화 <신과 함께 2>도 오달수가 등장하는 장면을 재촬영했다. 실증적으로 남성들은 높은 확률로 손해를 끼친다. 이미지에 좌우되는 방송연예계에서는 더욱, 미투 운동이 이제야 시작되는 단계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남성 출연자를 꼭 써야 할 이유가 있는가?

시장 효율성의 관점에서 굳이 남성을 섭외하고 제발 이 사람만은 깨끗하길 기도하고 있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김생민이 출연하며 화제가 됐던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실제로 초반 인기를 견인하는 건 여성 방송인 이영자다. 전형적인 남성 중심 토크쇼 MBC <라디오스타>에서 최근 높은 시청률과 반응을 이끌어낸 것 역시 게스트인 노사연이다.

당위적 차원에서 방송이 너무 남성 출연자 위주로 구성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시장 경쟁력을 이유로 여성이 배제되어왔지만 실제로 대차대조표에 큰 구멍을 내고 있는 건 남성들이다. 그럼에도 올봄 등장했던 신규 프로그램들의 면면은 여전히 남자 판이다. 어딘가 히어로엔 미달되어 보이는 사람들만 모았다는 MBC <삐그덕 히어로즈>에선 출연자 9명 중 홍진경 1명만 여성이었고,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끼리 우정을 쌓는다는 KBS <1%의 우정>은 그럼에도 남자들끼리만 우정을 쌓았으며, 각 분야 전문가 및 논객이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 MBC <판결의 온도>마저 모두 남성 지식인과 방송인으로 채워졌다.

새삼 이 오래된 불평등을 지적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리스크의 분산 투자라는 관점에서만 봐도 이 구성은 엉망이다. 모든 남성이 다 잠재적 성범죄자는 아니라는 항변은 무의미하다. 온통 남성들만 섭외해 놓고 이 중 누구도 사고를 치거나 과거의 성범죄가 폭로되질 않기 바라는 건, 제발 이번 탄창엔 총알이 들어있지 않길 바라는 러시안 룰렛 같은 것이다. 당장 격발은 안될지라도 멍청한 짓이다.

남녀 출연자 비율을 맞추면 위험 부담이 줄어들까? 어느 정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냥 여성들로만 잔뜩 프로그램을 채우는 건 또 왜 안되겠는가?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예능들처럼 남성들만 TV 화면을 독식하는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끼지 않고 굳이 ‘남성 예능’이란 표현도 쓰지 않는다면, 그 반대의 경우가 불공평하다거나 이상할 이유는 조금도 없지 않나. 이것은 당장 남성 출연자의 과거사를 일일이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줄여주지만, 또한 앞으로 벌어질 방송가의 잠재적 가해를 줄여줄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김생민 사건이 증명하는 것은 그토록 배경 없고 주변부에서 가늘고 길게 버티는 방송인조차 여성 스태프와 비교해 훨씬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여성 작가에 따르면, 직접적인 성추행은 아닐지라도 유명 남성 MC가 프로그램 회식에서 성인용품을 들고 와 여성 스태프를 희롱하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간 적도 있다. 여성 스태프, 특히 방송작가의 열악한 고용안정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전제하더라도, 남성 방송인에게 훨씬 관대하고 밀어주는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권력 불균형이 발생하는 건 사실이다. 꼭 미투 운동이 벌어지는 최근으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하차했던 남성 출연자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김구라, 이수근, 김용만이 그러하듯 단지 재기의 기회가 남성에게 훨씬 자주 제공되어온 것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남성에게 조신한 마음가짐과 몸 단속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우연이겠지만, 남성 떼거리 예능의 전범을 확립했던 MBC <무한도전>이 지난주 종영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표방하던 이들의 ‘무모한 도전’이 국민 예능이 되기까진 그들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감내해준 시간이 필요했다. 여성 방송인들에겐 이런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KBS <나는 남자다>의 시청률 부진과 종영은 개별 프로그램의 실패지만, 같은 방송사의 <언니들의 슬램덩크>의 부진은 여성 예능의 실패로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여성 방송인의 시장 가치는 평가절하됐고 남성들의 시장 가치는 과대평가됐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 남성 출연자의 잠재적 손실 가치는 이제 더더욱 커질 것이다. 결방 및 하차 사태는 이미 시작됐다. 그 모든 잠재적 손실을 관리할 수 있게 된 후에, 즉 남성권력이 쪼그라들 만큼 쪼그라들어 그 위험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게 된 이후에 방송에서의 남녀 동일 비율을 논해도 될 것이다. 미투 운동은 필연적으로 타임스 업(Time’s Up)으로 귀결된다.

<무한도전>과 그 후예들로 대표되는, 남자들끼리 명예와 인기와 부를 다 나눠 가지던 시간은 이제 끝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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