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노무현의 지방분권 씨앗 ‘결실’ 눈앞…보수는 뿌린 대로 거둘 것

2018.04.07 06:00 입력 2018.04.07 07:14 수정

6·13 지방선거와 보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김명수 대법원장 지명과 김기식 금융감독원 원장 임명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굳게 믿던 초엘리트 판사와 관료들에게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같은 충격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강금실 법무장관이 ‘일탈’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일상’의 공포다. 박근혜,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이 무기력하게 구속되는 것을 본 터라 ‘충격과 공포’는 미래진행형이다.

보수가 몰락하고 있다. 2016년 총선에서 2당으로 밀리더니 2017년 대선에서는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 1987년 이래로 보수가 서서히 몰락한 이유는 선거 때문이다. 선거는 보수의 가장 약한 고리다. 다른 영역의 보수·수구 카르텔이 강고했던 것에 비하면 비교적 평평했던 선거는 치를 때마다 보수의 성을 조금씩 무너뜨려왔다.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지금 보수진영의 선거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포비아’ 수준이다. 6·13 지방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즉 ‘북한에는 강경하고 시장에는 관대한’ 전통적 보수세력의 몰락을 볼 수도 있다.

지방자치는 민주당의 핵심 브랜드다. 30년 전인 1988년 총선에서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지방자치’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제1야당이 되었다. 1990년에는 단식까지 하면서 지방자치선거를 쟁취했다.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대표가 김대중 총재가 입원 중이던 세브란스병원으로 찾아가 지방자치선거에 합의하던 장면이 생생하다. 1987년 대선에 출마했던 김대중은 금권 선거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관권 선거’를 막지 못하면 앞으로도 대통령 선거는 ‘해보나 마나’라고 판단했다. 밑바닥 권력을 바꾸지 않고는 정권교체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이듬해인 1991년 3월에 기초의원 선거, 6월에 광역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단체장 선거는 1995년에 처음 실시되었지만 기초단체장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앞다퉈 단체장에 도전하는 시대로 바뀌는 데는 불과 2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권력을 만드는 지방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국제흐름을 놓친 건 그렇다 쳐도
국내 정치 변화를 읽는 수준은 끔찍할 정도다
대망의 히스테리 증상이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가 보이는 과대망상은
열등감·패배감·불안감 등에
사로잡힌 결과다

노무현은 누구보다 지방자치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정치인이었다. 낙선의원 시절이던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만든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오늘날 친노 핵심으로 불리는 쟁쟁한 인사들이 그 시절 연구소에서 실무를 보면서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지방자치와 관련한 책과 잡지를 만들고, 수많은 출마 희망자들을 조직하고 교육했다.

1994년 10월에 창립 1주년 기념으로 (출마자들을 교육하려고) 개최한 행사에는 출마 예정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는 남에게만 출마를 권한 것이 아니라 1995년 민주당 불모지인 부산 시장 선거에 직접 뛰어들었다. 선거 초반 노무현의 기세는 대단했다. 청문회 스타인 그는 탁월한 연설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집권당의 실세 중 하나인 민주자유당의 문정수 후보를 앞서 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돌풍은 거기까지였다. 훗날 ‘DJP 연합’으로 발전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지역등권론’이 서울에서 발표되자 갑자기 선거가 (노무현이 그토록 깨고 싶었던) 지역주의로 돌아가고 말았다. 노무현은 아군이 쏜 포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자 그와 함께 지방자치, 지방분권의 시대를 꿈꿨던 동지들과 참모들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그의 유지를 위해 대거 출마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극복과 균형발전을 위해 싸웠다. 모두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세종시와 혁신도시는 그의 유산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동지이자 참모인 문재인 대통령은 한 발 더 나갔다.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위해 개헌이 필요합니다.” 권력구조 개편보다 지방분권이 개헌의 절실한 이유라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철학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력한 중앙권력을 어떻게 시민들에게, 지방에 골고루 나눠주느냐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방선거를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 만일 이번 지방선거에서 예상대로 민주당이 압승한다면 보수진영은 중앙권력의 상실과는 또 다른 충격을 받을 것이다. 수십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보수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걸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전국적 확산이다. 한국의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

어쩌다 그 강고했던 한국의 보수가 한순간에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지게 되었는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2012년 총선 때만 하더라도 탈북자와 이민자에게 비례대표 공천을 할 정도로 개방적이었고 경제민주화를 받아들일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지금 자유한국당은 이념적 자폐증이 점점 심해져 거의 마린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전선’을 보는 느낌이다.

비행기는 이륙할 때와 착륙할 때가 위험하다. 사람도 잘나갈 때와 힘들 때 인격이 드러난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크게 이겼을 때 오만에 빠지기 쉽고, 충격적으로 졌을 때 ‘네 탓’하며 자중지란에 빠진다. ‘분열해서 패배하고, 패배해서 분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리더십의 부재, 정체성의 혼란, 조직의 붕괴, 자부심의 소멸, 만성적 분열이 지난 몇 년간 계속되고 있다. 얼핏 지금 보수의 모습을 묘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몇 년 전 새정치민주연합의 모습이다. 당시에 새정치민주연합은 ‘새정치’도 없고, ‘민주’도 없고, ‘연합’도 없다는 조롱을 받았다.

나는 몇 년 전 칼럼에서 “새누리당은 ‘조직’이 ‘개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은 조직보다 개인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당이 어려워지고 보스가 위기에 빠져도 당과 보스를 살리기 위해 불출마선언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 비판은 보수세력에 그대로 돌려주어야 할 것 같다. 자기들이 ‘모신’ 두 명의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데 그만둔 국회의원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반면 민주당의 변화는 놀랍다.

2015년 전당대회에서 문재인의 ‘이기는 정당’은 당시 민주당의 절박함을 잘 표현한 슬로건이었다.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승리를 위해) 당대표직도 내려놓고, 측근은 불출마 선언을 하고, 수많은 인사들을 영입하고, 정체성이 다른 김종인에게 당을 맡겼다. 반면 새누리당은 개방과 혁신은 온데간데없고 코미디 같은 옥쇄 파동만 남았다. 보수의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뿌린
지방자치, 균형 발전의 열매를
문재인과 민주당이 거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국 보수는 길도 잃고, 힘도 잃고, 꿈도 잃었다.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변화를 이끄는 사람, 변화를 뒤쫓는 사람, 변화에 둔감한 사람, 변화가 두려운 사람. 한국 보수는 변화에 둔감하거나 두려워한다. 혁신을 게을리하다 스마트폰 시대의 패권을 애플과 삼성에 뺏기고 몰락한 노키아 같은 신세다. 화려했던 시절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미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념적 퇴행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뒤를 보고 걸으면 빨리 갈 수도, 멀리 갈 수도, 똑바로 갈 수도 없다.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곧바로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를 둘러싼 유례없는 대화국면도 보수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한국 보수세력이 북한을 대하는 태도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서 최근의 ‘흡수통일론’, 그리고 박근혜의 ‘통일대박론’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통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문제는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력통일론이나 붕괴론에 기반한 흡수통일론은 주관적 희망의 반영일 뿐, 객관적 실체를 반영한 전략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반면 민주·진보 진영은 상대적으로 통일보다는 ‘평화’에 방점이 있다.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세 명의 민주당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적극적이었다. 1991년에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기 때문에 실체를 인정하고 대화를 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때 북한응원단이 쓴 가면을 두고 ‘김일성 가면’ 논란이 있었는데 천안함 폭침의 주범으로 알려진 김영철과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이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식사를 하는 현실에서 벌어진 (1970~1980년대식) ‘상징조작’ 논쟁은 보수의 시대착오적 현실 인식만 노출시켰을 뿐이다. 중요한 점은 여론 지형이 점점 통일에서 평화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는 이 흐름을 놓치고 있다. (낙관할 수는 없지만) 만일 미국과 북한이 ‘평화체제’에 극적으로 합의한다면 보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보수는 안보에서만 ‘게임체인저’를 놓친 것이 아니라 외교에서도 큰 흐름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한(김정은)의 두려움은 중국이 (장성택이나 김정남 같은 인물을 내세워) 친중 정권을 세울 수도 있다는 의심이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시진핑, 오바마, 박근혜 사이에 오갔던 전략적 대화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김정은의 대응은 두 사람에 대한 공개처형이었다.

중국의 두려움은 북한이 제2의 베트남이 될 수도 있다는 의심이다. 미국과 전쟁을 한 사이지만 미국과 손잡고 중국을 위협하는 베트남처럼 북한이 ‘친미국가’가 되는 것은 중국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몽이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로 미국을 움직여 중국을 견제하든, 중국을 움직여 미국을 견제하든 북한이 강대국의 역학관계를 이용하는 탁월한 능력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도 입증된 적이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북한은 미국을 지렛대로 중국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다.

솔직히 말해 1980년대까지 한국에는 미국과 일본이 전부였다. 안보를 지켜줄 나라도, 돈을 빌려줄 나라도, 물건을 사줄 나라도, 기술을 이전해줄 나라도 두 나라가 절대적이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두 나라를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들도 대부분 미국통 아니면 일본통이던 시절이었다. 국민의 반일 감정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미국이나 일본 입장에서도 소련, 중국, 북한이 공산국가인 상황에서 가난한 독재국가 한국마저 공산화된다면 다음은 일본 차례였기 때문에 한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 한·소 수교, 19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1992년 한·중 수교는 한국 외교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게임체인저가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보수는 (아직까지) 외교, 안보, 경제의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수십년 전의 패러다임 속에 갇혀 외교, 안보, 경제에서도 민주·진보 진영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국제 흐름을 놓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내 정치의 변화를 읽는 수준은 끔찍할 정도다. 대중망상의 집단 히스테리 증상이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가 보이는 (보수표가 결집하면 이길 수 있다는) 과대망상은 열등감·패배감·불안감 등에 사로잡힌 결과다. 자유한국당이 지금과 같은 메신저로 지금과 같은 메시지를 계속 던진다면 단언컨대 역사적 참패를 당할 수도 있다. 명분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는 인물과 전략으로는 ‘원칙 없는 패배’가 예고될 뿐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나오던 단골 메뉴인 ‘연대론’이나 ‘외부영입론’은 쏙 들어갔다. 오히려 (민주당다운) 정체성과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잠재력을 경쟁력이나 능력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할 정도의 여유가 느껴진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뿌린 지방자치, 지방분권, 균형 발전의 열매를 문재인과 민주당이 거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방 권력의 교체는 한국 주류 교체를 가속화할 것이다.

▶필자 박성민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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