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내 ‘메갈 찾기’는 정당한 소비자 운동일까

2018.04.07 14:57
백철 기자

“게임을 즐기는 소비자들이 반사회 성향을 가진 자들이 속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게임을 피하기 위한 목적.”

3월 21일을 기점으로 한때 게임 커뮤니티에 퍼졌던 ‘메갈 게임 목록’이라는 글이 스스로 밝힌 글의 목적이다. 이 글은 페미니즘, 정확하게는 ‘메갈리아’(과거 존재했던 급진적 페미니즘 웹사이트)와 관련된 게임을 4단계로 분류하며 게임 이름 옆에 간단한 사유도 밝히고 있다. 2년 전 ‘여성들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적힌 티셔츠 인증샷을 올렸다가 게임 ‘클로저스’ 녹음에서 하차한 성우 김자연씨를 옹호했거나, 페미니즘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올린 사람이 참여한 작품이 대개 여기에 해당한다.

3월 26일에는 온라인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 원화가가 ‘‘메갈’이라는 의혹에 대해 제작사인 IMC게임 김학규 대표가 직접 입장을 밝혔다. 입장문에서 김 대표는 자신이 해당 원화가에게 ‘왜 한국여성민우회 계정을 팔로어했느냐’고 묻는 등의 면담 내용을 스스로 공개했다. 이후 게임계의 페미니즘 사상검증 논란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확산됐다.

게임계 사상검증의 흐름은 이렇다. 남성 게임 이용자들이 특정 게임 원화가나 성우가 ‘메갈’에 연관된 증거가 몇 개 있다고 지적하며 해당 게임 공식 사이트에 항의글을 여럿 올린다. 그러면 게임사에서 이를 수용해 원화가의 그림이나 성우의 목소리를 게임 속에서 배제한다. 3월 21일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의 신규 캐릭터 K7의 경우 원화가가 ‘메갈’이라는 의혹이 불거진 지 4시간 만에 소녀전선 측에서 K7의 업데이트를 잠정 연기하기도 했다.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은 신규 캐릭터 원화가가 ‘메갈’로 의심 받자 4시간 만에 신규 캐릭터 출시를 연기했다. / 소녀전선 홈페이지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은 신규 캐릭터 원화가가 ‘메갈’로 의심 받자 4시간 만에 신규 캐릭터 출시를 연기했다. / 소녀전선 홈페이지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다”

‘사상검증’에 동의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활동은 소비자의 정당한 불매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30대 직장인 ㄱ씨는 위에 언급된 소녀전선 등의 게임을 가볍게 즐기는 사람이다. ㄱ씨는 “메갈리아는 일간베스트처럼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반사회적인 집단이다. 방송 뉴스에 일베가 나오면 시청자들이 퇴출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메갈 퇴출운동’은 정당한 소비자 운동”이라고 말했다.

30대 전문직 ㄴ씨는 ‘메갈 게임 목록’에 동의한다면서도 자신들을 일간베스트 등과 동급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ㄴ씨는 ‘메갈 게임 리스트’에 올라온 또 다른 게임을 이따금 즐기는 유저다. 한때는 업무시간을 제외하고 종일 핸드폰을 붙잡을 정도였던 ㄴ씨는 원화가가 페미니스트라는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는 하루에 한두번만 게임 상황을 체크할 뿐이다.

ㄴ씨는 “저희가 일베와 다른 점은 페미니즘이라고 무조건 다 배척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미투 운동도 여성과 남성 모두가 지지하기 때문에 이렇게 확산되고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즉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일 뿐이라는 것이다. ㄴ씨는 “많은 직장인들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서 게임을 한다. 그런데 게임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내가 쓴 돈으로 유지되는 게임인데 이 정도 요구도 사상검증이라고 하는 건 지나치다”라고 말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사상검증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게이머 모임인 페이머즈(Famerz)다. 페이머즈의 안나 활동가는 남성 게임 이용자들의 ‘메갈’ 운운은 하나의 핑계일 뿐 페미니즘 자체를 공격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으로 봤다. 안나 활동가는 “‘여자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적힌 핸드폰 케이스를 가져도 ‘메갈’이 되고, 전연령 여성 베스트셀러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어도 ‘메갈’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잣대에 반대했다고 해서 회사 대표로부터 사상검증을 당하고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려야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페미니즘’은 대체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김환민 게임개발자연대 사무국장은 게임계 내에서 남성 이용자들의 목소리가 과다하게 대표되기 때문에 게임사들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사상검증을 벌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콘진원)의 2017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별 모바일 게임 이용률은 여성 60.3%, 남성 59.3%로 여성이 오히려 조금 높았다. PC 온라인 게임의 경우 남성의 이용률은 50.4%, 여성은 26.8%로 나타났다.

남성 게임 이용자들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는 이유로는 매출을 꼽을 수 있다. 콘진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성 게임 이용자들은 여성에 비해 게임에 지출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의하면 게임에 월 1만원 미만을 쓰는 비율은 남성은 전체 남성 중 40.5%, 여성은 전체 여성 중 55.3%였다. 반면 3만원 이상을 쓰는 비율은 남성 21.6%, 여성 16.6%였다.

김 사무국장은 게임시장 자체가 모바일 게임 중심으로 재편되고 확률형 아이템이 보편화되면서 남성 이용자의 과대 대표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여러 자료를 봐도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남녀 유저의 숫자의 차이는 크지 않다. 하지만 확률형 아이템에서 매달 몇만~몇십만 원을 지출하는 직장인 남성 이용자들이 게임사의 매출을 지탱하는 핵심 계층인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게임사도 섹시 콘셉트의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는 게임을 더 많이 만들게 되고, 게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남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반영하는 것”이라며 “이 점이 여전히 콘솔 게임이 시장에서 많이 팔리고 있고 게임이 보다 대중화되어 성별 간 매출 격차가 줄어드는 해외 게임 시장과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블랙 컨슈머 요구 들어주지 말아야”

이용자들이 비교적 손쉽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소규모 게임사에 민원을 집중한다는 지적도 있다. 오버워치, 스타크래프트 등을 제작한 블리자드의 경우 메인 디렉터인 제프 카플란이 공식 행사장에서 한국의 여성운동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오버워치 등 블리자드 게임은 불매운동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페이머즈의 안나 활동가는 “작은 게임사일수록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쉽지만 블리자드는 결코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세계적인 게임회사의 메인 디렉터의 말이니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제프 카플란이 잘 몰라서’ 같은 소리만 했다”고 말했다. 안나 활동가는 게임사 측에서도 이용자들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봤다. 그가 적절한 대처의 예시로 든 것은 키위웍스의 모바일 게임 ‘마녀의 샘’이다. 마녀의 샘 원화가는 트위터에 소녀전선 K7 업데이트 연기를 비판하는 글을 ‘리트윗’했다. 이 일로 게임 이용자들은 마녀의 샘 원화가도 ‘메갈’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키위웍스 장수영 대표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3월 22일 올린 입장문에서 “키위웍스는 불법이 아닌 이상 직원의 개인적 활동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며 “불법활동이 아닌 이상 개인의 외부활동까지 회사가 관여할 권한은 없다. 그 활동이 회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더라도 피해는 묵묵히 받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안나 활동가는 “게임사도 블랙 컨슈머들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말고 무엇이 옳고 상식적인 선인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블랙 컨슈머들의 ‘메갈 리스트’에 대답할 것이라면 대체 ‘메갈’이 무엇인지, 그 기준으로 개인의 노동권을 침해해도 옳은 것인지 우리에게도 게임계가 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아예 소비자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시민단체에서 소비자운동을 하는 ㄷ씨는 소비자운동에 대해 “개개인으로 흩어진 소비자들이 힘의 우위에 있는 큰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다. 법이나 제도 등의 수단으로 소비자들의 권리를 구제 받지 못할 경우 취할 수 있는 일종의 시민 불복종 행위”라고 설명했다. ㄷ씨는 “지금 게임 이용자들의 항의는 대체로 게임회사가 아니라 게임회사에서 일하거나 외주를 받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다. 소비자가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에 비해 ‘을’의 위치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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