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임기 여성 5명 중 1명 "낙태한 적 있다" 대부분 "경제사정, 일 때문에"

2018.04.09 15:13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2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관계를 하는 가임기 여성 다섯 명 중 한 명은 인공임신중절(낙태)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현행 형법과 모자보건법 상 허용 기준에 드는 ‘합법적’ 낙태는 전체의 1.1% 뿐이었다. 현실과 법의 괴리 속에 ‘불법 낙태’를 하느라 상당수가 상담이나 병원 선택에 애를 먹었고, 심리적 후유증도 심각했다. 낙태죄를 없애고 임신중단 유도제를 합법화하는 것에 10명 중 7~8명이 찬성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16세~44세 가임기 여성 2006명을 대상으로 지난 1~2월 낙태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조사한 결과를 9일 발표했다. 낙태죄와 유산 유도약 도입에 대해 정부 기관이 당사자 의견을 묻는 조사를 한 것은 처음이다.

■ “임신 여성 절반이 낙태 고려”

형법 제269·270조는 낙태를 금지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많은 여성들이 겪는 일이다. 이번 조사에서 낙태를 고려해봤거나 실제로 했다는 사람은 전체의 29.6%(593명)에 달했다. 실제로 낙태한 사람은 21.0%(422명)로 5명 중 1명 꼴이었다. 임신을 해 본 사람으로 좁혀 보면 41.9%가 낙태를 한 적이 있었다. 20대 이하가 30대 이상보다 많았고,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많았다.

낙태를 한 이유는 ‘경제적 준비가 되지 않아서(29.7%)’, ‘계속 학업과 일을 해야 해서(2.2%)’, ‘이미 낳은 아이로 충분해서(11.0%)’ 등을 들었다. 모자보건법 상 허용되지 않는 이런 사회경제적 이유가 98.9%이었다. 임신부에게 심각한 건강상 문제나 유전적 질환이 있거나, 성폭행·근친상간으로 임신한 등 경우 등 현행법 상 합법에 해당하는 낙태는 1.1%에 불과했다. 원치 않은 임신의 근본 원인은 피임 문제에 있었다. 낙태를 고려한 사람 76.7%는 성관계 때 ‘피임을 특별히 하지 않았다’고 했고 그 중 63.7%는 ‘질외사정이나 월경주기법으로 피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남녀 모두에게 성관계와 임신·출산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 “안전한 의료기관 찾기 어려워”

가임기 여성 대다수는 임신과 낙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임신 경험이 없는 952명 중 94%가 성관계 때 임신할까 두렵다고 했다. 임신과 낙태가 두려운 이유로는 전체 응답자의 70%가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꼽았다. 임신이나 낙태에서 ‘남성보다 여성을 더 비난하는 시선이 있다고 본다’는 문항에 80%가 동의했다.

가임기 여성 5명 중 1명 "낙태한 적 있다" 대부분 "경제사정, 일 때문에"

낙태가 ‘범죄’로 규정돼 있어 여성들 건강권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은 많았다. 실제로 낙태를 한 사람 중 46%는 ‘낙태죄 때문에 안전하게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 의료기관을 찾는 데 제약이 됐다’고 답했다. 전문 상담기관을 찾는 데에 제약이 됐다는 응답도 28.2%였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정보를 온라인에서 얻었고, 의료인에게서 얻은 경우는 20%에 그쳤다. 낙태 후 몸에 이상이 생겨도 치료받지 않은 사람이 70%가 넘었다. 35.3%는 낙태 뒤 전혀 혹은 충분히 쉬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국내 시판이 허용되지 않은 유산 유도약을 먹어본 사람은 6.7%(29명)였다. 대부분 지인이나 구매 대행기관을 통해 약을 구했다고 답했다. 유도약을 사용한 이유로는 비용부담이 적어서(31%), 임신 초기여서(24.1%), 시술을 받기 두려워서(20.7%) 등을 꼽았다.

■ 임신 유지한 여성 절반 “학업·일·꿈 포기”

낙태를 한 여성 대부분은 심리적 후유증을 호소했다. 낙태는 슬프고 아픈 경험(92.7%)이라고 했고, 죄책감이 들고(62.7%), 당시 일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려 노력한다(54.5%)고 답했다. 낙태한 사실을 타인이 알까봐 두렵다(44.8%), 낙태 얘기만 나와도 위축된다(32.2%)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낙태 경험자의 55.4%는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낙태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낙태를 고려했으나 임신을 유지한 사람 절반 이상은 ‘하던 일, 학업, 꿈을 포기해야 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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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낙태죄에 대해선 77.3%가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낙태죄를 그대로 둬야 한다는 22.7% 중에서도 모자보건법의 낙태 허용 기준을 넓히는 데는 75.7%가 찬성했다. 유산 유도약을 합법화하는 것에는 전체의 68.2%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연구원은 “정부는 낙태죄 폐지를 적극 검토하고, 유산 유도약 합법화를 추진해야 한다”며 “또한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기 위해서 피임은 필수이며, 남녀가 모두 평등하게 실천하도록 실질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 20만명 이상이 서명하자 지난해 11월 청와대는 이에 대한 답변에서 “실태조사로 현황과 사유를 정확히 파악해 논의를 진전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번 연구와 별도로 보건복지부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이달부터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착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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