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나무

2018.04.09 20:50 입력 2018.04.09 20:51 수정

[이굴기의 꽃산 꽃글]쉬나무

평양 대동강지구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의 공연 녹화방송을 보았다. 조용필, 최진희, 이선희, 강산에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열창하는 모습 사이로 무대에 쓰인 한 문장이 간간이 부각되었다. ‘봄이 온다.’ 우리 쪽의 웬만한 추위보다도 어쩐지 조금 더 추울 것 같은 평양에도 관객들의 박수와 웃음소리에 실려 정녕 봄이 도래하는 듯했다. 가수들이 북상할 때 나는 남하했다. 경주는 봄꽃이 먼저 찾아오는 고장 중의 하나이다. 경주를 나의 꽃고향으로 여기기로 한 이후, 이 천년의 도시를 거치지 않고는 봄의 나라로 입국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은 초등학교 수학여행의 기억이 생생하게 퇴적된 토함산이 아니라 단석산을 탐방하기로 했다. 독경소리가 울려퍼지는 아담한 동네를 지나 물안개 피어오르는 저수지에 도착했다. 땅에 납작 엎드려 겨울을 슬기롭게 이겨낸 달맞이꽃이 몸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 달맞이꽃은 아무도 없는 공중에 저만의 웅장한 세계를 펼칠 것이다. 고단했던 달맞이꽃의 허리춤에 햇빛이 찰랑찰랑 넘친다.

바야흐로 봄이 왔구나. 봄기운이 고슬고슬한 땅을 딛고 나아간다. 나무마다 가득한 꽃인가 했더니 꽃만큼이나 예쁜 봄잎들이다. 그중 하나는 이제 막 겨울눈에서 터져나오는 연두색의 잎, 잎, 잎. 몇 해 전 경산의 삼성산에서 보았던 쉬나무가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 이름에서 떠오르는 한 편의 시. “(…)환갑이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이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아이쿠 아이쿠, 시원하시겄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누였다고 합니다//(…)//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문인수, ‘쉬!’)

경산에서 보았을 땐 오줌을 다 눈 노인의 통쾌한 얼굴이더니 경주에서 보는 쉬나무는 봄을 만끽하는 환한 웃음을 숨기지 않는다. 어이쿠, 시원한 봄기운으로 활짝 피어나는 저 노인의 해탈한 표정! 참 조용한 우주 속의 쉬나무, 운향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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