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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일과 말하는 일

오은 | 시인
입력 : 2018.04.09 20:56:00 수정 : 2018.04.09 20:57:03

듣는 일과 말하는 일

한 인터넷 서점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진행 제안이 왔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당황은 이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걱정으로 이어졌다. 이때껏 이런저런 오프라인 행사에서 진행을 맡은 적이 꽤 많지만, 그것은 대부분 일회성 행사였다. 한 차례라는 말에, 한 번이면 된다는 말에 승낙하곤 했다. 실제로 한 차례 행사는 한바탕 웃으며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두 시간쯤 되는 행사가 끝나면 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청중들의 반응이 좋았던 날에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한 번이었기에 집중해서 잘 마칠 수 있었어. 초대 손님과 생각만큼 소통이 잘되지 않은 날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도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이었으니 다행이야. 다음 번과 다음 차례가 언제 또 올지 모르기에 한 번과 한 차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지 않았다.

반면, 팟캐스트 진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지속적인 일이다. 불규칙적으로 업로드되는 방송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확한 일시에 새 에피소드가 제공된다. 성실하게 임하되, 그 성실함이 꾸준해야 하는 것이다. 팟캐스트는 또한 마음을 합하는 일이다. 게스트 섭외부터 대본 방향에 이르기까지 PD와 작가와 상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청취자들의 피드백에 신경을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게스트와 대화를 나눌 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자주 만나는 친구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할 말이 없는 것처럼, 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사람과의 만남 전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어도 어떤 발자국들을 찍으며 여기까지 왔는지 알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에게 마음을 써야 한다. 시간을 들여 그 사람이 쓴 책을 읽고 더 긴 시간을 들여 그 책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해야 한다. 손님을 환대하는 몸가짐과 손님에게 차를 내가는 마음가짐 둘 다 필요하다.

팟캐스트 첫 게스트로 김민정 시인이 나왔다. 시인이자 편집자, 출판사 대표이기도 한 그는 아픈 와중에도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첫 방송이라 긴장할까 봐 편한 게스트를 섭외해준 제작진에게도 고마웠다. 스튜디오는 좁고, 좁아서 더 덥게 느껴졌다. 녹음이 끝날 때쯤에는 스튜디오 안에 열기가 가득했다. 내가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들었기 때문이다. 시종 웃고 떠들었지만 속으로는 많이 울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머리끝과 발끝에 힘을 주고 있었다.

녹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첫 방송이 무사히 끝나서 개운하기도 했지만 분명 뭔가가 더 있었다. 방송이 끝나면 보통 비우고 났을 때의 개운함이 찾아오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 기분은 채우고 났을 때의 개운함에 훨씬 더 가까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을 때의 개운함이 아닌, 누군가의 말을 천천히 듣고 그것을 차분하게 새기고 난 후에 찾아오는 개운함이었다.

듣는 일에서 찾아오는 충만함은 말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홀가분함과 결이 전혀 달랐다. 내가 지금껏 만끽하지 못한 개운함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양념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런저런 오프라인 행사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갈 때마다 소금을 치듯 후추를 치듯 순간순간 재치를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말하는 사람이었다. 프로그램에 풍덩 빠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펄펄 끓고 익어야 하는 주재료였다. 이는 내가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옆에서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창하게 말하는 재능은 반짝이지만, 귀 기울여 듣는 태도는 둘 사이에 뭉근한 믿음을 만들어준다.

이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양념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잘 들어야 한다. 주의 깊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그다음 말, 나아가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함께 호흡하듯, 함께 산책하듯 상대의 리듬에 맞춰 나가야 한다. 잘 듣는 일이 상대가 하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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