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의 합목적성

2018.04.09 21:11

[베이스볼 라운지]투수의 합목적성

투수의 길에는 왕도가 있을까. 올 시즌 선발 투수 중 속구 평균 구속이 가장 빠른 투수는 앙헬 산체스(SK)와 헨리 소사(LG)다. 둘 모두 평균 구속이 149.9㎞다. NC 왕웨이중도 평균 147.3㎞의 빠른 속구를 던진다. 김광현(SK), 에스밀 로저스(넥센·이상 146.4㎞) 등이 뒤를 잇는다. 강속구는 투수가 성공하는 ‘왕도’에 가깝다. 왕웨이중, 산체스, 김광현 등은 9일 현재 모두 2승씩 거뒀다.

모두가 성공하는 길은 아니다. 한화 키버스 샘슨은 평균 148.4㎞의 강속구를 던진다. 구속으로 치면 산체스, 소사의 바로 뒤다. 그런데 성적은 좋지 않다. 3경기 등판해 0승3패, 평균자책이 9.22나 된다. 9이닝당 삼진이 15.15개로 리그 1위지만, 9이닝당 볼넷 역시 9.22개로 압도적인 1위다. 투수의 목적은 “빠른 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야구규칙에 따르면 투수는 ‘타자에게 투구하도록 지명된 야수’다. 타자에게 공을 던지되 타자가 잘 때리라고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잘 때리지 못하도록 던져야 한다. 강속구는 아예 못 때리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투구의 목적은 상대의 공격을 억제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물론 한 가지가 아니다.

KT 금민철은 2경기 선발 등판해 2승0패, 평균자책 2.25다. 성적은 여느 강속구 투수들 못지않지만 금민철의 속구 평균 구속은 133㎞다. 속구가 ‘강속구’는 아니다. 투구 궤적 측정 장치는 금민철의 속구를 ‘슬라이더’로 인식한다. 금민철의 올 시즌 슬라이더 구사율은 무려 72.7%다. 좌완 금민철은 검지와 중지를 가깝게 붙이고, 손가락을 지면과 수직 방향으로 세워서 공을 챈다.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 들어가는 ‘자연 커터’가 된다. 대신 손가락이 붙으면 제구에 어려움을 겪는다. 금민철은 통산 9이닝당 볼넷이 5.28개로 좋지 않다.

그게 항상 문제였다. 금민철은 “볼넷을 줘도 땅볼이 많아 잡아낼 수 있는데,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볼넷을 주면, 마운드에서 쫓겨나듯 내려왔다. 제구를 잡겠다고 공을 살살 던지면 자연히 커터의 위력이 떨어졌고, 더 엉망이 됐다. 해결의 길은 거꾸로였다. 지난 3일 넥센전, 금민철이 1회 볼넷, 볼넷, 폭투로 흔들리자 KT 김진욱 감독이 마운드를 향했다. “괜찮으니까 더 세게 던져.” 금민철은 박병호를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며 1회를 무실점으로 끝냈다. 결국 7이닝 1실점 승리투수. 금민철은 “나는 원래 지저분한 공을 던지는 투수”라고 했다. 선발 등판 최소 투구 70개 보장이 금민철의 지저분한 공을 더 세게 던질 수 있는 비결이다. 투수의 목적은 안 맞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중심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한화 송은범은 평균 147㎞를 던지던 강속구 투수였다. 깨끗한 투구폼은 많은 고교생 투수들의 롤 모델이었다. 누구 못지않은 빠른 공을 던지는데 부진이 계속됐다. 올 시즌을 앞두고 모든 것을 버렸다. 지난 8일 수원 KT전 8-8로 맞선 8회 마운드에 올랐다. 2이닝을 1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최고 구속은 간신히 144㎞였다. 9회말 KT 윤석민을 상대로는 6구 전구 슬라이더 승부를 했다. 힘차게 뿌리던 150㎞ 언저리의 포심 패스트볼 대신, 커브와 슬라이더, 투심 등을 이리저리 섞는다. 리그를 호령하던 ‘강속구 투수’에서 이른바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다. 아웃카운트 6개 중 삼진 1개를 빼고 모두 내야 땅볼이었다. 시즌 기록은 2승0패, 평균자책 2.38이다.

금민철과 송은범 모두 멋을 버렸지만, 더 멋진 투구를 한다. 멋은 꾸미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러나는 것이다. 야구도 인생도 대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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