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알아야 할 것 하나

2018.04.10 21:23 입력 2018.04.11 09:34 수정
이대근 논설주간

김정은·트럼프 간 북·미 정상회담이 하루하루 다가오지만, 김정은이 핵폐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릴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체제보장을 해주면 정말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까? 하나의 체제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불가침 조약, 평화협정?

[이대근 칼럼]트럼프가 알아야 할 것 하나

우크라이나에서 핵폐기 논의 때 군과 보수파는 러시아 위협을 들어 핵폐기를 반대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미국·영국과 함께 안전보장 각서를 체결했다. 핵이 폐기됐다. 그리고 7년여 지난 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역사는 조약 협정을 맺고도 전쟁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협정 이상이 요구된다. 항구적인 평화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법제도, 정책, 질서의 총체, 즉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체제보장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김정일 시대에도 비핵화-체제보장(평화체제)을 위한 협상이 있었지만 김정일은 평화 대신 핵을 선택했다. 김정일의 시각에서 평화체제는 체제보장책이 아니다. 체제불안 촉진책이다. 평화가 북한 내부로 스며들면 비평화체제인 북한 정권이 무너진다고 김정일은 믿었을 것이다. 그때 북한은 ‘우리 체제는 우리가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이 보장해준다는 건 가소로운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이게 체제보장의 본질이다. 김정일처럼 자기 통치에 불안감을 느끼면 외부의 체제보장은 약이 아니라, 독이다.

김정은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권 안정을 확신하지 못하면 한·미가 비핵화-체제보장 교환 로드맵을 아무리 정교하게 짠들 소용없다. 협상 국면을 공허한 논리 대결과 제자리를 맴도는 소모적 논쟁의 수렁에 빠뜨리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지금 세계가 김정은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노심초사한 김정일과 달리 자신감에 찬 김정은은 북한을 확 바꿔 놓고 있다. 김정일은 정권 붕괴 걱정에 선군정치를 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선군정치 정당화의 근거를 무너뜨렸다.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김일성 유격대 결성일인 1932년 4월25일에서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게 1948년 2월8일로 옮긴 것이다. 인민군에 덧씌워진 항일 혁명 전통의 계승자라는 신화의 베일을 걷어내서 보통 군대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조치였다. 선군정치의 제도적 장치이자 상징이었던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무위원회를 신설했다. 선군정치는 껍데기만 남았다.

선군정치의 거품을 뺀 김정은은 지난 9일 당 정치국회의 내용을 하루만에 공개하는 등 정치를 정상화했다. 김정일의 은둔 통치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경제정책도 다르다. 김정일은 2002년 경제 활력을 위한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도입, 안팎으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체제안정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3년 만에 그만두었고 결국 경제난이 심화됐다. 반면 김정은은 과감한 시장 요소를 도입했고, 경제 상황을 개선시켰다.

☞ ‘이대근의 단언컨대’ 팟캐스트 듣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통제·빈곤·부족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북한-은 사실 김정일의 작품이다. 북한에서도 1960년대까지 김일성 시대는 좋은 시절, 1970년 이후 김정일 시대는 나쁜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그 때문에 김정은이 가히 살부(殺父)의 정신으로 김정일 시대의 나쁜 기억을 지워나가는 것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빈말로 하던 광폭정치도 그가 실천하고 있다. 북한 내 정권교체와 다를 바 없다.

김정은이 핵 문제에 대해 김정일과 다른 계획을 갖고, 다른 선택을 한다면 그 근원은 외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변화 가능성을 지닌 체제로의 전환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는 김정일 시대에는 실패했던 비핵화-체제보장이 김정은 시대에는 가능해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트럼프도 체제 변화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하면 북한의 시간 벌기라는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아직도 김정은에게서 김정일을 보고 있다. 트럼프는 북한의 변화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김정은의 핵폐기 결단이 임박했다고 예단해서도 안된다. 핵폐기는 북한 내부의 변화로 충분하지 않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카드를 보고 결심할 것이다. 역시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있고, 아버지가 못 이룬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겠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핵폐기는 김정은·트럼프 두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공동작품이다. 우리는 분단 70년 만에 낡은 냉전의 섬에서 탈출해 한반도 평화를 손에 쥘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를 맞고 있다. 우리가 왜 트럼프가 잘하기를 빌지 않겠는가?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