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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생활 민주주의’ 경험하는 수단…‘시민 디자인’으로 확장해야

입력 : 2018.04.12 21:05:00 수정 : 2018.04.13 10:07:09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코카콜라는 민주주의였다. 그는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우리와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했다. 워홀의 팝아트 ‘코카콜라’, 1950년대.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코카콜라는 민주주의였다. 그는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우리와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했다. 워홀의 팝아트 ‘코카콜라’, 1950년대.
디자인은 민주주의다

소비사회와 민주주의

“내가 미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소비한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고 코카콜라를 마시는데, 대통령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우리와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코카콜라는 코카콜라일 뿐이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나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는 없다.”-앤디 워홀

미국의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민주주의는 코카콜라였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24시간 편의점이, 누군가에게는 국민투표가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표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소비사회에서 민주주의는 평등한 소비(소비의 민주화?)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앤디 워홀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그런 소비를 할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다. 물론 부자는 더 많은 소비를, 가난한 자는 더 적은 소비를 한다는 점에서 현실은 결코 평등하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누군가의 비판처럼 소비의 자유는 정해진 범위 내에서의 선택의 자유일 뿐이다. 이 상품과 저 상품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상품 자체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바꿔놓는 기능을 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양식이 중요한 정치적 선택의 행위를 대체하는 것이다.”-존 버거, <보는 방법들(Ways of Seeing)>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떻게 소비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동일시하도록 만드는가를 지적한다. 당연히 정치적 자유는 소비의 자유에 한정될 수 없다. 하지만 소비의 자유 없이 정치적 자유가 있을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문제는 정치인가 소비인가가 아니라 어떠한 정치, 어떠한 소비인가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좀 더 근본적이고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생활 민주주의로서의 디자인

민주주의는 단지 정치 제도가 아니라 생활양식이라고 말한다. 주기적인 선거와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개념은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경제적 민주주의로, 그리고 문화적 민주주의로 확대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정치적 평등만이 아니라 경제적 평등을, 나아가 문화적 평등까지 민주주의의 과제로 삼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것들이 제도를 넘어 생활 속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되어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는 생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생활 민주주의란 대중의 일상적인 삶 속에 민주주의의 원리가 뿌리내리고 민주주의적인 삶의 방식이 체험되는 것을 말한다.

바바라 크루거의 사진 콜라주 작업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1987년.

바바라 크루거의 사진 콜라주 작업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1987년.

생활 민주주의에는 나쁜 환경으로부터 해방되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도 포함된다. 디자인은 바로 그러한 생활 민주주의를 가장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생활양식이라는 말에 충실하려면 민주주의의 디자인(설계) 못지않게 디자인의 민주주의(체험)가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대중(Demo)의 자기 통치(Cracy)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디자인의 민주화 또는 디자인 민주주의는 대중이 자기 자신을 디자인하는 것, 즉 스스로 쾌적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구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 민주주의의 명제는 오늘날 소비 자본주의의 현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대중은 상품의 소비를 통해서만 디자인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디자인 능력은 소비 능력에 압수되어 있다. 물론 소비사회에서 소비 행위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으며, 소비 또한 하나의 능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소비사회의 명제는 이렇지 않은가. “잘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소비를 통해서만 디자인을 체험하는 것은 결국 디자인 무능력을 낳을 뿐이다.

디자인 민주주의를 위한 기획

현대사회에서 디자인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연결해주는 감성적 장치로서 광고와 함께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은 자본주의와 쌍생아인 민주주의와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전자와의 동맹이 소비주의 디자인이라면 후자의 산물은 디자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 민주주의의 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주체를 설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디자인 역사에서 엘리트, 민중, 대중이라는 각기 다른 주체에 의한 디자인 민주주의의 기획을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 예술의 민주화와 생활화를 주장하며 ‘미술공예 운동’을 일으킨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19세기 예술의 민주화와 생활화를 주장하며 ‘미술공예 운동’을 일으킨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19세기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 운동’을 비조로 삼는 유럽의 모던 디자인 운동은 철저히 엘리트 중심의 디자인 민주주의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디자인에서의 ‘현능주의(Meritocracy)’로서 전문가인 디자이너가 창조해낸 최상의 디자인을 다수 대중에게 공급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던 디자인은, 과거 소비에트의 노동자들에게 볼쇼이 발레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문화의 민주화 모델에 부합한다. 원래 윌리엄 모리스가 문제로 삼은 것은 생활로부터 분리되고 소수에게 독점된 예술, 즉 살롱예술이었다. 모리스에게 공예와 디자인은 예술의 생활화와 민주화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법학자인 박홍규 교수는 모리스를 생활 사회주의자라고 평가한다(<윌리엄 모리스 평전>). 하지만 모리스에게 예술의 민주화란 여전히 문화의 민주화, 즉 공급 중심의 민주화였다. 모리스의 사상을 계승한 20세기의 모던 디자인은 디자인에서 일종의 급진 민주주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던 디자인은 사회주의와 친화성을 보이는데, 이 역시 엘리트에 의한 계몽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전개한 ‘민예 운동’의 중심인 일본민예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전개한 ‘민예 운동’의 중심인 일본민예관.

윌리엄 모리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향성을 가지는 것으로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전개한 ‘민예 운동’이 있다. 민예 운동은 민중을 주체로 삼는다. 민예(民藝)라는 말 자체가 ‘민중적 공예’의 줄임말로, 야나기 자신이 만든 것이다. 조선의 공예에서 민예의 이상을 발견한 야나기는, 민중이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잡기(雜器)와 ‘평범한 물건(게테모노)’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그것을 현대 디자인의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나기의 민예 운동은 디자인의 민중주의라고 할 수 있다. 민예 운동은 근대 이전의 미분화된 민중예술의 상태를 이상으로 삼아 서구의 근대적 자아를 지워버리고 집단적 민중을 통해 개아(個我)를 넘어선 유토피아를 꿈꿨다. 그것이 야나기가 생각한 미의 종교로서의 민예였으며 불교미학의 세계였다. 이처럼 몽롱한(?) 미의식은 다분히 중세적 낭만주의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민예 운동은 확실히 교육적 효과를 발휘했고, 일본인들에게 일상적 미학의 감각을 고양시켰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을 겨냥한 디자인 교양주의의 산물 ‘굿 디자인 운동’의 시작인 1951년 뉴욕현대미술관의 ‘굿 디자인’ 전시.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을 겨냥한 디자인 교양주의의 산물 ‘굿 디자인 운동’의 시작인 1951년 뉴욕현대미술관의 ‘굿 디자인’ 전시.

한편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른바 ‘굿 디자인(Good Design) 운동’은 중산층 대중을 겨냥한 디자인 교양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초대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 2세(Alfred Barr Jr.)의 주도로 기획된 일련의 전시는 이른바 중산층 취향의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을 설정함으로써, 전통적인 청교도적 금욕주의와 현대의 소비주의적 욕망의 타협점을 찾아보려는 절충적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국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가능한 최대치의 디자인 민주주의 기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굿 디자인 운동’은 코카콜라처럼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일본과 한국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전혀 다른 토양에서 그것들이 같은 의미를 가질 수는 없었다.

시민 디자인이라는 기획

식민지적 근대화를 경험하고 뒤늦게 급속한 산업화를 이뤄낸 한국의 경우 디자인에 대한 민주주의적 인식은 자리 잡지 못한다. 한국에 디자인 운동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디자인 진흥 운동’이 있을 뿐이다. 이는 디자인의 권위주의적 동원이었을 뿐 민주주의적인 기획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현대 디자인에는 서구나 일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엘리트에 의한 급진 민주주의 기획이나 아래로부터의 민중주의적인 접근도, 소비자 운동적 성격을 띤 중산층 중심의 디자인 이념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 디자인은 오로지 소비의 대상일 뿐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인식 자체가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한국 민주주의와 디자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거꾸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생활양식으로서 구체적으로 체험되어야 하며, 디자인은 그러한 민주주의의 매개 장치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디자인은 기존의 국가주의와 유사관료주의, 소비주의적인 메커니즘을 넘어선 시민사회적 기획의 일부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한 연구에서 시민 디자인을 이렇게 정의 내린 바 있다.

“시민 디자인이란 시민이 주체가 되는 디자인을 가리킨다. 시민이 디자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시민이 디자인의 중심으로서 그 방향, 결정, 향유에서 주도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시민 디자인이란 ‘시민 주체 디자인’이며 ‘시민 중심 디자인’이고 ‘시민 주도 디자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디자인의 주체를 관과 전문가로부터 시민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디자인을 좁은 의미의 전문영역을 넘어서 확장된 사회적 활동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 최범, <시민 디자인 2020 정책 연구>(서울디자인재단, 2013)

물론 이것이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주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와 자본을 위한 디자인과 스타 디자이너 타령만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일단은 이러한 방향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디자인 민주주의 기획을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시민 디자인(Civic Design)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모던 디자인에서처럼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의’ 기획도, 민예 운동에서와 같은 낭만적 민중주의적 태도도, 중산층 취향의 타협적인 ‘굿 디자인’도 아닌, 시민의 구체적 삶 속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고 형성해가는 디자인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민 디자인은 생활 민주주의와 분리될 수 없고, 시민이 자신의 환경을 정치적·미학적으로 형성해가는 과정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 시리즈 끝 >

▶필자 최범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많은 디자인 평론가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에서 디자인 이론을 강의하며 출판·전시·공공 부문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 국내 유일의 디자인 비평 전문지 ‘디자인 평론’ 편집인이다. 평론집으로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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