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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알고 싶다면 ‘1000만 영화’가 아니라 ‘밤섬해적단’을 보라. 독립영화에 진짜 한국이 있다”

2018.04.13 14:47 입력 2018.04.13 21:26 수정

12일 저녁, 한때 안기부장 공관으로 사용됐던 남산 ‘문학의 집 서울’은 독립영화인들의 웃음이 넘치는 자리가 됐다. 권해효, 구교환, 기주봉, 이민지, 정하담 등 지난해 최고의 독립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모였다. 국내 유일의 저예산·독립영화 시상식인 제5회 들꽃영화상 자리였다.

거액의 상금이나 중계방송은 없었다. 수상자들은 쌀,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진촬영권 등을 부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수상했든 못했든 모든 이들의 표정엔 기쁨이 넘쳐 흘렀다. 100억원 들인 상업영화에 비해 덜 주목받는, 하지만 더 창의적인 영화들이 차례로 호명됐다.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가 다큐멘터리로는 처음으로 대상을 받았다. 시상식장 입구에서는 왼쪽 가슴에 꽃을 꽂은 외국인이 참석자들을 환영했다. 들꽃영화상 집행위원장인 미국인 달시 파켓(46)이었다.

파켓과 함께 들꽃영화상을 이끄는 오동진 운영위원장은 파켓에 대해 “인간적으로 선량하고, 영화에 대한 지향점이 뚜렷하며, 객관적으로 영화를 파악한다”고 평했다. 매사추세츠 시골 출신의 미국인은 어쩌다 한국 독립영화의 옹호자가 되었을까. 시상식을 코앞에 두고 준비에 한창이던 파켓을 최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파켓은 영화평론가, 자막번역가, 부산 아시아영화학교 교수, 그리고 간혹 배우로 활동 중이다. 인터뷰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미국 출신 한국영화 평론가 달시 파켓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미국 출신 한국영화 평론가 달시 파켓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왜 한국의 독립영화에 관심을 기울였나요.

“2009년쯤 독립영화만을 위한 시상식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그때 좋은 독립영화가 많이 개봉했거든요. 연말에 ‘한국영화 톱 텐’을 만들면 상당수가 독립영화였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포럼처럼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는 많지만, 온전히 시상에만 집중하는 행사는 없었습니다. 청룡상, 대종상이 상업영화에 주듯, 독립영화에 상을 주는 시상식을 만들면 독립영화를 관객에게 더 많이 알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상식을 5년간 치른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일 텐데요.

“응원하는 분, 도와주겠다는 분은 많아요. 다만 예산이 문제죠(웃음). 지금은 트로피와 부상은 있고 상금은 없는데요, 앞으로는 수상자에게 상금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스태프들 인건비도 잘 주고요.”

-최근 한국 독립영화, 저예산영화의 상황은 괜찮습니까? 다큐멘터리는 약진하는데, 극영화는 부진하다는 평가가 있던데요.

“우선 지금 한국의 독립 극영화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주목은 덜 받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들이 많아요. 김대환 감독은 <철원기행>(2014)에 이어 작년에 <초행>이 주목받았습니다. 신연식 감독은 <페어 러브>(2009), <러시안 소설>(2012), <로마서 8:37>(2017) 같이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똥파리>(2008)의 성공을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건 <똥파리>가 처음이어서 주목받았을 뿐이지, 이후에도 좋은 극영화가 많이 나왔습니다. 개봉 중인 <소공녀>는 <똥파리>와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지만, <똥파리>만큼 유니크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내년 들꽃영화상의 주요 후보가 될 겁니다. 작년엔 정치적인 다큐멘터리가 많았는데요, 올해 시상식에선 더 다양한 소재의 다큐멘터리가 나왔어요. 팔레스타인 가족의 일상을 그린 <올 리브 올리브>, 티베트 불가 고승의 전생을 그린 <다시 태어나도 우리>에도 힘이 있습니다.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이 있다면 상업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독립영화 속 한국이 훨씬 다양하고 전체적이니까요.”

제5회 들꽃영화상 포스터

제5회 들꽃영화상 포스터

제5회 들꽃영화상 대상 수상작인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정윤석 감독  /들꽃영화상 제공

제5회 들꽃영화상 대상 수상작인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의 정윤석 감독 /들꽃영화상 제공

12일 남산 문학의 집 서울에서 열린 제5회 들꽃영화상의 달시 파켓 운영위원장(왼쪽)과 오동진 집행위원장.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12일 남산 문학의 집 서울에서 열린 제5회 들꽃영화상의 달시 파켓 운영위원장(왼쪽)과 오동진 집행위원장.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파켓 위원장이 말하는 한국 독립영화의 저력은 상업영화의 부진과 상대적으로 맞물린다. 지난해 한국 영화산업 전체관객수는 2억1987만명으로 5년 연속 2억 관객을 돌파했다. ‘1000만 영화’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산업규모는 여전하지만, 상업영화의 에너지와 창의성은 예전만 못하다는 의견이 많다.

-한국의 상업영화에는 활력이 남아 있나요.

“아무래도 일반 관객보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데요, 비슷한 이야기에 비슷한 상황,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 느낌입니다. 답답하죠. 요즘엔 관객도 점점 새로운 걸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개봉하기 전에 <곤지암>이 잘될 거라고 생각한 영화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곤지암>은 개인방송의 형식을 빌린 공포영화로, 비수기에도 불구하고 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중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멜로영화로선 오랜만에 흥행했습니다. 스릴러만 만들 것이 아니라 코미디, 멜로, 공포처럼 다양한 상업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상업영화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불만도 많습니다.

“작년 대종상 심사위원을 하면서 상업영화를 다시 봤는데요, 그 이전 몇 년을 돌아봐도 좋은 여성 캐릭터가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차라리 독립영화 <꿈의 제인> <초행> <용순>의 여성 캐릭터가 훨씬 좋아요. 개봉을 앞둔 <당신의 부탁>에 임수정씨가 출연합니다. 비교적 저예산 영화에 메인스트림의 스타가 관심을 가진다는 건, 이쪽에 재미있는 역할이 있다는 뜻이겠죠.”

-한국 상업영화의 문제는 왜 생긴 걸까요.

“많은 분들이 1990년대의 활력과 비교하는데, 90년대는 워낙 특별한 시대였습니다. 영화 만드는 사람, 영화에 투자하는 사람 모두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야 한국영화가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죠. 그렇게 10~20년간 잘되니까 어쩔 수 없이 지금 같은 상황에 온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에너지가 떨어졌다고 할까요.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감독이 있긴 하지만, 이들은 ‘1%’일 뿐이고 그 다음 세대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지금 독립영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독립영화와 메인스트림 영화가 교류하고 서로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파켓이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로 일한 건 1997년쯤이었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영화를 업으로 삼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때가 바로 파켓이 말한 한국영화의 ‘특별한 시대’였다. 임권택의 걸작들을 비롯해 <8월의 크리스마스> <넘버 3> <처녀들의 저녁식사> <조용한 가족>같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한국영화가 일제히 나왔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극장을 찾은 파켓은 한국영화 자체에 빠져버렸다. 우연히도 강의하던 학교(고려대) 부근에 있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곳에서 영화를 더욱 많이 볼 수 있었다. 파켓은 한국영화를 영어로 소개하는 웹사이트(koreanfilm.org)를 취미로 만들어 운영했는데, 이 사이트를 눈여겨본 영화전문지 스크린 인터내셔널 측에서 기자직을 제안했다. 파켓은 몇 차례 거절한 끝에 영어 강사를 그만두고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해외에선 한국영화의 새로운 에너지에 놀라워하면서도, 한국영화 산업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파켓은 “IMF 위기 이후 한국영화가 무너진다는 얘기가 많았는데, 오히려 새로운 영화가 더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미국 출신 한국영화 평론가 달시 파켓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미국 출신 한국영화 평론가 달시 파켓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오랜 시간 한국영화를 지켜보며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990년대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영화계가 됐습니다. 2000년대 중반쯤에는 힘있고 철학이 있는 프로듀서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걱정스럽습니다. 갈수록 투자배급사의 힘이 세지니까 프로듀서의 역할이 줄어듭니다. 앞으로 한국영화가 잘되려면 좋은 프로듀서가 더 나와야 합니다. 독립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해외에서 한국영화를 보는 시선은 어떻습니까.

“한국 안에서는 ‘위기’라고들 하지만 영국, 미국 기자들은 여전히 ‘놀랍다’ ‘훌륭하다’ ‘어떻게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는 반응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여전히 한국영화에 힘이 있다는 뜻이겠죠.”

-오랜 시간 한국영화를 평론하면서 영화인들과 마찰을 빚은 적은 없나요.

“리뷰어 입장에서는 너무 좋게 쓰는 게 문제죠. 솔직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가 좋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면 됩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예전에 ‘20자평’을 쓴 적이 있는데, 짧게 압축해 쓰다보니 의도보다 강한 표현이 나오곤 했어요. 어느 감독이 4~5년 후에 만나서 ‘그때 상처받았다’고 하더군요.”

파켓은 자막 번역가로도 명망이 높다. <살인의 추억> <곡성> <택시운전사> <군함도>의 영문 자막 번역이 그의 손을 거쳤다. 모든 번역 작업이 그러하듯, 영화 자막 번역도 어렵고 미묘한 작업이다. 많은 대사를 압축적인 자막으로, 그것도 영화 속 상황과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며 번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히말라야>에서 엄홍길(황정민 분)이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홀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있었다. 이를 본 아내(유선 분)가 “안주도 없이…”라고 말한다. 직역하면 “No side dishes?”라 해야겠지만, 외국에선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뉘앙스가 살지 않는다. 파켓은 결국 “At least eat something”(뭐라도 좀 드세요)이라고 번역했다. 일본어와 고풍스러운 한국어가 뒤섞인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녀 숙희(김태리 분)가 아가씨(김민희 분)의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보며 “매초롬하니 참 미인이세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beautiful’ ‘pretty’ ‘gorgeous’로 번역하기는 어려운 뉘앙스였다. 결국 ‘the charmer’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파켓은 “박찬욱 감독의 대사가 특이하고 언어유희도 많았는데 감독이 모두 살리고 싶어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파켓은 <원 나잇 스탠드>(2010), <돈의 맛>(2012), <박열>(2017) 등에 배우로도 출연했다. 분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돈의 맛>에서는 베드신을 소화하는 등 쉽지 않은 역할도 있었다. 파켓은 “연기는 원래 제 성격과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점이 어렵다”면서도 “힘들지만 재미있다”고 말했다. 파켓은 들꽃영화상을 마친 뒤에는 프로그램 컨설턴트를 맡고 있는 이탈리아 우디네극동영화제 참석을 위해 출국한다. 올해 우디네영화제에는 <1987>과 <여배우는 오늘도>가 동시에 초청돼 각 작품을 연출한 장준환·문소리 부부가 나란히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파켓은 한국영화와 외국의 가교 역할로 쉴 새 없이 바쁘다.

<원 나잇 스탠드>에 출연한 달시 파켓

<원 나잇 스탠드>에 출연한 달시 파켓

<산타 바바라>에 출연한 달시 파켓

<산타 바바라>에 출연한 달시 파켓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에 출연한 달시 파켓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에 출연한 달시 파켓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혼자 혹은 여럿이 함께 창의적인 일을 할 때 행복합니다. 학창시절 연극 연출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좋은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프로젝트를 돕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영화를 제작하거나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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