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놀룰루에서 듣는 흘러간 한국 가요, 그에 이끌려 다녀온 고국으로의 시간여행

2018.04.13 16:48 입력 2018.04.13 16:55 수정
이우일·선현경 |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

선현경의 ‘잠시멈춤’

포틀랜드에서 호놀룰루로 이사를 오기 전, 남편은 중고 음반을 살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하와이에 가면 이런 중고 음반은 꿈도 못 꾸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좀 참아줘. 언제 내가 이런 비닐을 이 가격에 사겠냐. 오프라인에서 고르며 살 수 있는 건 여기서 끝이야.”

마뜩지는 않지만 그 생각에는 나도 동의해 참아주기로 했다. 유난히 포틀랜드는 중고 음반가게도 많고 행사도 많이 했다. 중고 비닐판을 모으는 게 인생의 큰 낙인 남편은 한국에 있을 때 늘 이런 음반시장을 부러워했다. 음반가게 근처만 가면 내게 맘대로 돌아다니다 오라며 눈으로 사인을 했다. 한참 보고 싶은 가게들을 돌고 산책까지 하고 와도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플 때까지 음반을 뒤졌다. 몸이 좋았더라면 소장 음반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와이로 갈 이삿짐을 다 부친 후까지 못내 아쉬워하며 판 가게로 향했다.

[다른 삶]호놀룰루에서 듣는 흘러간 한국 가요, 그에 이끌려 다녀온 고국으로의 시간여행

덕분에 호놀룰루로 이사 올 때 고양이와 여름 옷 몇 벌 그리고 일을 하기 위한 노트북과 엘피판을 들고 왔다. 턴테이블은 다른 짐들과 함께 한 달 뒤에나 도착해 당장은 들을 수도 없는 음반을 혹시 깨질까봐 싸고 또 싸서 기내용 가방으로 들고 왔다.

얼마 뒤 집을 구해 들어왔을 때 식기도 냄비도 식탁도 책상도 없는 집에 엘피판이 있었다. 초현실 그림 같았다. 가구도 없는 텅 빈 거실에 사람 둘과 고양이와 노트북, 그리고 엘피판들이 있었다. 짐이 예정보다 늦게 도착해 한참이나 그렇게 그림처럼 지내야 했다. 짐이 도착하기만 하면 챙겨 온 판들이 닳을 때까지 들으리라 다짐했다. 하와이에서는 새로운 중고음반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사 오고 나니 문화생활을 충족할 만한 장소가 없어 아쉬웠다. 포틀랜드는 대형 중고책방 ‘파웰스 북스’만 가도 하루 종일 책을 보며 놀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곳은 1900년대의 어린이 동화책들이 있는 코너였는데 갈 때마다 못 보던 책들이 새로 꽂혀 있었다. 신간도 봐야 하고 미술서적도 뒤져보고 싶은데 언제나 힘들고 배가 고파 제대로 다 못 보고 나왔다.

하와이에서 찾은 한국 음반, 배호·이미자·가야금 산조…나름 풍취가 있다.
음악 취향이 하와이안 뮤직과 옛 우리나라 음악으로 넓어지고 있다 내게 미니멀한 삶은 이번 생에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레코드를 들으며 잠시 그때 그 시절로 갔다 왔더니 정신이 없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그 노래들이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마음 안쪽 깊숙한 작은 방의 스위치를 켜 주었다
부부의 관계란 품이 드는 일이다. 그동안 피곤해서 집어던졌던 이해를 이제야 다시 집어 들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니 책방이라고는 알라모아나 센터에 있는 미국 대형 서점 ‘반스&노블’이 전부다. 구글로 검색해 크고 작은 다른 책방들도 찾아가 보았지만 책방이라고 하기엔 관광 상품이 더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만 책을 두었어도 검색하면 책방이라고 뜨는 곳이다. 별수 없이 심심할 때마다 ‘반스&노블’을 갔다. 몇 번 가니 신간 몇 권을 제외하고는 이미 아는 책들이 되었다. 미술서적과 동화책 위주로 보기에 더 그렇겠지만 소설이나 에세이를 영어로 읽고 싶지는 않았다. 그 분야는 e북으로 다운받아 읽어도 충분히 충족되었다.

일본 중고 서점으로 유명한 ‘북오프’도 있다기에 찾아가 보았지만 돈키호테라는 대형마트 안에 설치된 작은 부스에 불과했다. 일본인이 많은 곳이라 일본판 중고 동화책을 기대하고 갔는데 게임팩과 만화책이 더 많이 구비된 책방이었다. ‘북오프’ 덕분에 돈키호테라는 대형마트를 알게 되어서 좋기는 했다. 그곳은 아시아 제품들과 일본 상품들 위주로 구성되어있는 대형마트인데 세련됨이 떨어져 과거의 서울이나 일본을 여행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문화에 목말라 뒤져보니 도서관에서 음반과 책들을 처리하는 행사들과, 중고 책을 취급하는 크고 작은 중고 음반 가게들이 보였다. 섬의 특성상 비싼 운반비 대신 싸게 자체적으로 처리하려는 행사들이다. 찾아가 보니 원하는 종류의 미술책이나 동화책은 많지 않았지만 음반과 일반도서들은 많다.

그중 ‘아이디어스 뮤직&북스’란 곳의 물건이 다양했다. LP와 CD, DVD도 많고 나름 중고 미술서적과 동화책도 꽤 많이 구비되어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 세일까지 하는데 전 상품을 꽤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덕분에 정기적으로 가보니 순환속도가 책에 비해 음반이 더 빠른 편이다. 갈 때마다 구비된 음반들이 변해있다. 특이한 점은 카세트테이프가 정말 많다는 것이다. 포틀랜드의 어느 곳보다 테이프가 많다. 심지어 비닐도 뜯지 않은 새 테이프들도 여러 개 보았다. 아마도 이 섬에서 못 나가고 갇혀, 돌고 도는 물건들이리라.

하와이니 당연히 하와이안 뮤직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옛날 한국 음반들도 꽤 나온다. 이곳의 이민 역사가 길어서인지 한국 음반들이 보통 1960~1970년대 음악들이다.

남편은 재즈와 하와이 음반을 주로 구입했는데, 이미자나 배호의 음반도 곁들이기 시작했다. 하와이에서 듣는 흘러간 옛 가요라니 나름 풍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싸다는 핑계로 한국말이 쓰여 있는 판이라면 모조리 집어 들기 시작했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상처 입은 사랑’, ‘금방울 자매’의 ‘마도로스 키타’(기타를 이렇게 표기했다)도 데리고 오더니, 가야금 산조에 한국 가곡 전집까지 들이기 시작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와이에 오면 음반은 끝이라기에 내심 속으로 좋아라 했다. 하와이에서는 단출한 모습으로 1년만 살다가자고 마음먹었는데 영 틀려먹었다. 음악의 취향이 하와이안 뮤직과 옛 우리나라 음악으로 더욱더 넓어지고만 있다. 내게 미니멀한 삶은 이번 생에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얼마 전에 아는 사람이 엘피 마니아라며 이곳의 음반 가게를 추천해 달라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이 ‘아이디어스 뮤직&북스’를 소개해 주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거기 한국 음반 코너에는 ‘김세레나’만 한 장 있을 거야. 그것만 내가 안 집어 왔거든.”

그렇게 남편이 들여온 한국 가곡 음반을 무심코 듣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내가 그 판에 수록된 곡들을 다 알고 따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아버지는 집에서 자주 노래를 부르셨다. 피아노를 배우고 있던 내게 잘 알지도 못하는 가곡의 악보를 들이밀며 연주해 달라고 해 귀찮았던 기억이 났다. 남편이 찾아들고 온 그 판에는 어릴 적 아버지가 부르던 애창곡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옛 동산에 올라’나 ‘보리밭’, ‘봉선화’나 ‘고향생각’의 가사가 저절로 내 입에서 술술 나왔다. 내가 초등학교 때의 일이니 벌써 삼십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듣지도 찾아보지도 않았던 노래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부르고 있자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어설픈 반주를 하고 있는 어린 내 옆에, 지금의 나보다 젊은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홈드레스를 입은 젊고 아름다운 엄마가 우릴 보며 웃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사업은 틀어지고 병이 생겨 일찍 돌아가실 거란 걸 알았다면,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며 반주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노래를 아버지보다 더 늙은 나이에 하와이에서 듣게 될 줄 알았다면 그리 귀찮아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레코드를 들으며 잠시 그때 그 시절로 갔다 왔더니 시간여행을 하고 온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다. 그 노래들이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마음 안쪽 깊숙한 작은 방의 스위치를 켜 주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 아침이면 남편은 내가 늦게 일어날까 봐 조바심을 낸다. 우리 부부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각자 달라 서로의 아침잠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인데 이날만은 다르다. 아침부터 커피를 대령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일부러 크게 틀어 날 깨운다. 운전기사가 필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스 뮤직&북스’의 정기 세일. 일찍 일어나야 더 좋은 음반을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귀찮지만 일어나 빨리 움직여야 한 달이 편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날이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시간여행을 하고 온 그날부터다.

그도 내가 모르는 그만의 어릴 적이 듣고 싶고, 보고 싶어 물건을 들이는 걸까? 부부란 이렇게 결국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나보다. 특정한 한때를 그리워하는 그를 상상하니 그동안 보기 싫어 덮어두었던 보자기가 걷히며 마음 한구석이 짠해졌다. 생각해보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점이 살면서 가장 큰 결점이 되어 있었다. 이제야 그 결점이 내가 예전에 그를 사랑했던 이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옛 물건들과 혼자만의 세상을 즐기며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남편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 중 단편 ‘가리는 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때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되거든.”

부부의 관계란 품이 드는 일이다. 그동안 피곤해서 집어던졌던 이해를 이제야 다시 집어 들고 있다.

며칠 전 내 친구가 결혼을 했다. 오십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겠다고 장난치듯 이야기하더니, 보란 듯이 거짓말처럼 만우절날 결혼을 했다. 늘 유머가 인생의 우선순위에 있는 그녀이기에 거짓말 아니냐고 물었더니 사진을 보내왔다. 늦은 결혼이니만큼 조촐하게 식구들끼리만 치른 결혼 사진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처럼 결혼을 했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와 그 짝을 보니, 품이 드는 일도 마다 않고 잘 살아갈 것 같다. 거짓말 같은 진실을 만들어준 그녀에게 고맙다. 거짓말을 이야기하니 진짜 거짓말이기를 바랐던 사월의 일들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하다. 그들에게도 거짓말 같은 진실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사월이다.



[다른 삶]호놀룰루에서 듣는 흘러간 한국 가요, 그에 이끌려 다녀온 고국으로의 시간여행


▶이우일·선현경 부부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이우일은 <콜렉터> <좋은 여행> <굿바이 알라딘> 등을 쓰고 그렸으며 <노빈손 시리즈>와 <용선생 한국사>의 그림 작가다. 선현경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가족 관찰기>를 쓰고 그렸으며 <이모의 결혼식> <엄마의 여행가방> 등 동화를 냈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포틀랜드에서 딸, 고양이와 함께 쓰고 그리며 살다가 최근 하와이 오아후섬으로 터전을 옮겼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