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은 체육을 싫어해? 남학생판이 된 ‘기울어진 운동장’

2018.04.13 16:48 입력 2018.04.13 16:49 수정
필자 최현희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미의 규범…여학생들에게도 신체활동의 즐거움을 허하라

영화 <달링>의 해외 포스터(왼쪽)와 한국판 포스터. 한국판에선 여배우 얼굴의 기미, 주근깨를 지우고, 팔뚝의 근육도 없앴다.

영화 <달링>의 해외 포스터(왼쪽)와 한국판 포스터. 한국판에선 여배우 얼굴의 기미, 주근깨를 지우고, 팔뚝의 근육도 없앴다.

연재 마지막 글이다. 운동장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한동안 일명 ‘운동장 여교사’로 인터넷 남초 사이트에서 회자되었다. 학교 운동장이 남학생들에게 전유되는 현상을 지적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학교 현장에서 근무하는 교사로서 학교에서 일상으로 목도되는 풍경에 의문을 갖고 문제를 제기한 것임에도 수많은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비난의 내용은 두 가지로 갈렸다. 첫 번째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여학생도 많다는 주장이었다. 초보적인 관찰능력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하루 이틀만 지켜봐도 알 수 있을 만한 눈에 보이는 현상을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왜곡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생산적인 논의의 시작 자체가 불가능함을 느껴 일절 반론을 생략한다.

두 번째는 누가 여학생에게 운동장을 금지했느냐며 여학생들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개인의 행동이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을 거라는 가정은 순진함을 넘어선 악의적인 무지이며 심각한 반지성적 사고이다.

학교 운동장 사용의 성별 불균형 문제는 최근에야 제기된 새로운 이슈도 아니다. 1990년대부터 이에 대한 연구와 대응방안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자신의 신체능력을 탐색하고 계발하며 신체활동에 몰두할 기회는 성별을 떠난 모든 인간의 발달단계에 필수적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상은 분명히 교육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며 많은 나라에서 관련 연구를 기반으로 교육정책을 세우고 지역사회와 학교가 대책을 마련하여 보다 많은 여학생들의 신체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평등 의제를 적극적으로 교육에 반영하고 실천하는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운동장의 성별문제제기 자체에 집단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암담하다. 그것도 20년 넘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문제는 해결책이 단순하고 명쾌하지 않다. 그저 여학생들에게 ‘여러분에게도 운동장이 열려있느니 열심히 운동을 하라’고 격려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여학생들이 학년과 학교급간이 높아질수록 운동장에서 멀어지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여성의 몸에 대한 규범, 왜곡된 여성성,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등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연구가 있다. 여성청소년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는 자신이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같은 성의 교사, 선배, 동급생이 체육활동에서 기량을 나타내는 모습을 꾸준히 관찰하게 했다. 다른 집단에는 미디어를 통해 날씬한 몸매를 가진 여성이 섹시하고 관능적인 포즈로 운동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자 첫 번째 그룹에 비해 두 번째 그룹의 운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현저히 저하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특히 운동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으로 대상화하며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매순간 검열하는 모습도 발견되었다. 반면 첫 번째 그룹은 운동시간 내내 자신의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운동 자체에 몰두하고 체육활동의 즐거움을 깨닫고, 다양한 스포츠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몸 규범은 운동하는 몸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당장 포털에서 배너 광고로 뜨는 여성의류 쇼핑몰의 광고 문구를 보면 ‘여리여리한 핏’ ‘날씬해보여’ ‘뱃살 쏙’ 등의 단어가 보인다. TV 예능에서는 조금만 ‘정상’ 체격에서 벗어나는 여성 연예인이 나오면 그의 몸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웃음거리로 소비한다.

최근 한 외국 영화 포스터가 한국판으로 바뀌면서 여배우의 이미지를 수정한 일이 논란이 된 바 있다. 한국판 포스터에는 원작의 여성배우 얼굴에 있던 기미와 주근깨, 눈가의 주름이 모두 포토샵으로 제거되었다. 그뿐만 아니다. 팔뚝의 근육을 없애고 대신 매끈하고 부드러운 팔뚝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획일적인 규범과 잣대가 가히 강박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미디어 현실에서 10대 여성청소년들이 자라고 있다.

여성에게 허락되는 근육은 비키니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복근뿐이며, 운동으로 단련된 승모근, 두툼한 팔뚝과 불뚝 솟은 종아리 등은 미의 규범에서 벗어난다. 적당히 볼륨 있는 가슴에 처지지 않은 뱃살, 늘씬한 팔뚝과 다리, 가녀린 어깨선 등 여성에게 이토록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미의 규범이 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 여성청소년은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과 외모에 대한 압박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여학생들이 체육을 싫어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아무리 체육활동을 독려해도 여학생들이 생리가 있다, 몸이 아프다 등의 핑계를 대며 좀처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교사들의 푸념이나 고충도 자연스러운 통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교사는 이러한 통념에 기대면 별 고민 없이 하던 대로 체육수업을 해도 될 테니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의 본질을 성찰하지 않고 학생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행위야말로 자신의 교육적 책임에 대한 방기이자 핑계일 뿐이다.

신체활동 경험의 부족은 체육활동에의 몰입감과 즐거움을 경험할 기회를 빼앗고 이는 다시 신체활동 경험의 부족으로 나타나는 악순환이 여성의 학령기 내내 반복된다. 앞머리를 붙잡고 뛰는 여학생, 가슴을 붙잡고 뛰는 여학생, 손을 양옆으로 흔들며 뛰는 여학생 등의 이미지는 실제로 여학생의 자연스럽고 타고난 모습이 아닌 사회에서 만들어낸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격한 운동을 하면 땀이 난다. 땀을 흘리면 냄새가 나고 머리가 망가진다. 여학생들이 체육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고 ‘꾀를 부리는’ 것이 땀을 흘리기 싫어하고 자기 외모를 더 신경 쓰는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왜 유독 남성청소년에 비해 여 성청소년이 땀 냄새와 머리모양이 흐트러지는 것을 더 걱정하게 되었을까.

남학생들은 땀을 흘리는 것, 자신의 몸에서 나는 땀 냄새, 땀에 전 머리 모양 등에 개의치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성별 권력이다. 그렇다고 남학생에게서 마음껏 땀 흘릴 수 있는 성별 권력을 빼앗자는 말이 아니다. 학교운동장 문제는 성별 간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땀 흘리며 자유롭게 어울려 뛰놀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며, 우리 모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

학교 안팎으로 함께 고민하며 평등하고 자유로운 학교 공간을 상상해보자던 현직 교사의 제안이 조롱과 악성 민원, 신상털이와 인신공격으로 이어진 사회가 어느 때는 몹시 절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몰아치는 파도를 두 손으로 막을 수 없듯, 한쪽의 조롱과 무지에도 결국 사회는 변화해갈 것이다. 모두에게 자유롭고 평등한 운동장은 사실 엄청나게 어렵고 실현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다. 다만 너무 머지않기를 바란다. 그때까지 페미니스트 교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고민과 실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리즈 끝>

▶필자 최현희

[최현희 교사의 학교에 페미니즘을]여학생은 체육을 싫어해? 남학생판이 된 ‘기울어진 운동장’


13년차 초등교사. 좋은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던 중에 페미니즘을 만나버렸다. 페미니스트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꽤 좋은 교사라고 믿었으나,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다시 바라본 교실과 학교는 좋은 교사에 대한 고민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했다. 페미니즘으로 직업과 일상이 고단해졌지만 고민하고 실천하는 삶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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