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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성희롱, 피해자 입장서 판단” 기준 첫 제시

2018.04.13 21:56 입력 2018.04.13 21:57 수정

‘학생 성희롱’ 교수 해임 취소소송 파기환송…‘미투’ 운동 속 주목

“법원 심리 때 성인지 감수성 잃지 말고 2차 피해 유념해야” 강조

성희롱을 사유로 해임된 대학교수를 복직시키라는 항소심 판결을 대법원이 파기하면서 이례적으로 “법원이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는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하고,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밝혔다. 성희롱 사건 심리에서의 판단 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다.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가운데 대법원도 성범죄 피해자 보호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대법원 제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대학교수 장모씨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해임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장씨에게 승소 판결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장씨는 수업 중에 여학생을 뒤에서 안는 이른바 ‘백허그’를 하고, 학과 엠티(MT)에서 자고 있는 여학생의 볼에 입을 맞추는 등 14건의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2015년 4월 해임되자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성희롱이 있었다고 봤지만 항소심은 피해자 진술을 배척하며 성희롱이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행정2부(재판장 김용석 부장판사)는 백허그에 대해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실습실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손을 겹쳐 마우스를 잡거나 어깨동무를 한 행위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장씨의 적극적인 수업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고 피해자가 그 후에도 계속 수업을 수강한 점을 보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또 피해 즉시 신고하지 않고 한참 뒤에 타인 권유로 신고했다며 성희롱 피해자답지도 않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법원이 성희롱 사건을 재판할 때 취해야 할 태도를 언급했다. 대법원은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했다.

항소심이 어깨동무 등이 수업 방법이었다거나 피해자가 강의를 계속 수강한 사실에 비춰 성희롱이 없었다고 본 것에 대해 대법원은 “이 같은 이유 설명은 자칫 법원이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를 내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적절하지 않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대법원은 “성희롱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피해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도 피해자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대법원은 강조했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가 있고, 피해 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신고를 권유한 것을 계기로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며 “이와 같은 성희롱 피해자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한 증거판단이라 볼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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