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여운형 친일행적 찾아라”

2018.04.15 21:58 입력 2018.04.22 18:28 수정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여운형은 순수한 민족주의자”

“그는 한국 지도자로 적합한 사람”

조선총독부 간부들 미군정에 진술

1947년 6월3일 비행기 사고로 숨진 조선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씨의 장례식으로 추정되는 행사에서 여운형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이로부터 한 달 반 후 조선체육회 회장 여운형 역시 암살당함으로써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조선체육회는 회장과 부회장을 동시에 잃었다.

1947년 6월3일 비행기 사고로 숨진 조선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씨의 장례식으로 추정되는 행사에서 여운형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이로부터 한 달 반 후 조선체육회 회장 여운형 역시 암살당함으로써 1948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조선체육회는 회장과 부회장을 동시에 잃었다.

한국 젊은이들 존경 받는 여운형

정치력 약화·타격 입히기 위해

친일행적 찾기 돌입한 미군정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가 당수로 있었던 조선인민당에서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에게 탈당하도록 했던 미군정의 정치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의 좋은 친구인 굿펠로(Goodfellow)의 공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젊은이들 사이에서 여운형의 명성과 영향력은 컸고, 친일 경력의 논란이 있었던 여운홍의 탈당은 조선인민당의 분열로 보도되었을망정 그다지 큰 정치적 타격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당시 동아일보 1946년 5월10일과 13일자에 보도되었지만, 한 줄로 짤막한 기사가 실렸을 뿐이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③“여운형 친일행적 찾아라”

미군정은 ‘잘 도망다니는’ 여운형의 정치력에 타격을 입히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돌입했다. 여운형의 친일행적을 찾는 것이었다. 1946년 8월2일 버치는 ‘여운형의 관계에 대해 제안된 조사’라는 제하의 문건을 작성했다.(이하 버치문서 박스 1) 여운형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고위층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이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있었던 수차례(8번에서 14번 사이) 일본 여행이 조사대상이었다.

여운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도조히데키(東條英機),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를 만났으며, 이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일본 제국 내에서 한국이 제한적인 자치를 얻고,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영속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 그 혐의였다. 버치는 “그가 미군정과 어떤 관계를 갖든 간에 그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여운형이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친일과 관련된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론했다.

버치는 이러한 조사를 위해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오리오단(Charles O’Riordan) 소령을 조사 실무자로 추천했다. 또한 도조 히데키와 고이소 총독, 그리고 아베 총독을 조사해야 하고, 일본 내에 있는 관련 문서들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만큼 여운형의 친일행적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그의 친일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 극우계 신문이자 여운형 암살이 필요하다는 사설을 썼던 대동신문은 1946년 2월10일 여운형의 친일행위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었다. 여운형이 1943년 학병동원 회견을 했다는 것이었다. 1946년 8월10일 하지는 조사 명령을 내렸다.

일본에서의 조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일부 요원들은 일본 정부와 국회도서관 내의 문서자료를 찾기 시작했고, 오리오단 소령과 호프(Hope) 소령은 1945년 이전에 여운형을 만났거나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와 관련된 일부 심문 자료는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 234~236쪽에 일부 수록되어 있다.) 조사는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주한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은 8월29일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9월18일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9월20일 고이소 등 전 총독, 11월17일 니시히로 다다오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12월12일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전 정무총감, 12월19일 이소자키 히로유키 전 조선총독부 경찰국장, 그리고 도조 히데키 전 일본 내각수반(일자 미상) 등을 심문했다. 이들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나온 질문은 미군정이 파악하고자 하는 사실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일본에 미국 정예요원 파견해

“반일활동에도 왜 체포 안 했나”

“스탈린 친구인 것 아나” 등 물어

질문의 첫 번째 범주는 여운형과 일본 총독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친한 일본인이 있었는가? 여운형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가? 여운형이 총독부의 돈을 받았는가? 그는 반일활동을 했는데 왜 체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범주는 그가 공산당과 연결돼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가 스탈린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가?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서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아는가?”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약점을 얘기해줄 다른 친구가 있는가?”

모든 심문자에게 공히 ‘이 조사는 전범에 대한 조사가 아니다’라는 전제하에서 솔직하게 진술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조사기록을 보면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소자키 “그는 한국 독립 주장”

고이소 “진실로 좋은 사람이다”

한목소리로 여운형 높이 평가

우가키·고이소 전 총독들을 심문한 문서.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 번역본이 따로 만들어졌다.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전범이 아니었던 우가키는 조선 총독 중 여운형에 대한 신뢰가 가장 두터운 인물이었다.

우가키·고이소 전 총독들을 심문한 문서.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고, 영어 번역본이 따로 만들어졌다.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전범이 아니었던 우가키는 조선 총독 중 여운형에 대한 신뢰가 가장 두터운 인물이었다.

“나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 나는 진실로 여운형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은 건전했다. … 여운형은 천성적으로 온화하기 때문에 그는 전쟁 후 한국인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이소)

“내가 총독부에 있는 동안 공산당은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젊은 사람들이 여운형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들었다.”(아베)

“그는 극단적인 반일주의자였다. 그는 한국을 떠나 상해로 갔지만, 내가 한국에 간 이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 했다. … 상해로부터 돌아오면서 그는 한국이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훌륭한 성격을 가진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다. … 만약 한국이 정치적 힘이 있다면 그가 한국의 지도자로서 적합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우가키)

“여운형은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 그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 … 러시아인들이 들어오면 급진적인 사람들이 풀려나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여운형의 권고대로 그 전에 이들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여운형에게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약속을 깼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지 못했다. … 그는 매우 세련된 사람이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그는 기회주의자이지만, 그건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성격이다. … 나는 그가 순수한 민족주의자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국이 러시아나 중국(국민당)을 따라갈 것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 내가 아는 한 그는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그는 일본 정부 또는 총독부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일본은 그를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싶어 했다.”(엔도)

“일본의 전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으로부터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와 얘기했다. … 불가능했다. 우선 그는 독립을 원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독립과 상호 양보의 정신하에서 함께 간다’는 선언을 원했다. 이것은 자치나 반(半)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은 그것을 동의할 수 없었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 그는 민족주의자다. … 그는 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이다. … 우리는 그에게 돈을 조금 주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돈을 준 목적은) 공산주의자들과 급진적 젊은이들의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였다. … 그는 한국 독립을 원했지만,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피의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항상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의 협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 외교적 군사적으로 일본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그는 전쟁 직후에 방송을 통해서 일본인들에게 비극적인 학살을 모면하도록 해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일본인들을 죽이지 말라는 생각을 주려고 한 것 같다.”(니시히로)

“그는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일본 지배의 반대자였다. … (여운형이 100만엔을 받았다는 것) 단지 소문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그를 기회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긍정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전쟁에 협력하도록 하려고 했다.”(이소자키)

일본 외무문서까지 뒤졌지만

‘1945년 8월16일 아베 총독

여운형에게 질서유지 부탁’ 등

미군정, 원하는 결과 얻지 못해

버치문서에 들어있는 여운형 명함.

버치문서에 들어있는 여운형 명함.

심문과정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던 미군정의 요원들은 일본 외무성의 문서를 조사했다. 조사관들이 찾아낸 외무성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미나미 총독은 남경으로 특사를 보내서 여운형에게 과거를 잊고 돌아와서 젊은이들의 조직을 이끌어달라고 했다. 고노에 내각의 시기인 1940년 여운형은 동경에 가서 고노에 총리를 만나 장개석과의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다고 했다. 아베 총독의 초대로 1945년 8월16일 아베를 만났다. 아베는 여운형에게 평화와 질서 유지를 부탁했다. 이후 허헌, 김일성과 함께 여운형은 그때부터 한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했다.’

일본 정부 내 중앙 연락사무소의 문서에 대한 조사도 있었지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미군정 요원의 수도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여운형 개인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에 정예요원을 파견했건만, 이들이 얻은 정보 중 여운형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1947년 1월 11일 최종 ‘조사보고서’가 하지 사령관에게 제출되었다.(버치 문서 박스 1) 최종보고서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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