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합의 안 하면 부도낸다

2018.04.16 22:04 입력 2018.04.16 22:05 수정
박용채 논설위원

해피엔딩일까. 아마 모두들 그렇게 말할 것이다. 혹은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되돌아보자. 지난 3월30일 밤 9시. 금호타이어 노사는 중국 더블스타로의 매각이 포함된 노사합의서에 합의했다. 산업은행이 정한 법정관리 데드라인 3시간 전이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당일 오전 “합의가 없으면 법정관리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청와대에서는 “정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라는 발언이 나왔다. 해외매각 결사반대를 외쳤던 노조는 결국 뜻을 굽혔다. 금호타이어 사태가 해결되고 열흘 뒤인 지난 10일에는 STX조선 사태가 똑같은 방식으로 타결됐다.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싫으면 노사 간에 확약서를 제출하도록 한 데드라인을 하루 넘겼지만 산업은행은 이를 수용했다. “원칙에서 벗어날 경우 계획대로 처리하겠다. 자구계획이 없으면 회생절차 신청작업에 돌입하겠다”는 정부와 산업은행의 압박은 유효하게 작동했다.

[박용채 칼럼]빨리 합의 안 하면 부도낸다

이제 남은 것은 GM. 다만 GM사태는 두 사례와 결이 다르다. 금호와 STX가 ‘정부=산업은행=경영진 대 노조 구도였다면 GM사태는 GM, 정부·산업은행, 노동자가 각기 다른 전제조건을 걸고 3각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현 단계에서 칼자루는 GM이 쥐고 있다. 지난 2월 군산공장 폐쇄 계획을 내놓은 GM은 정부의 지원, 노사 간 합의가 전제되면 신차 배정 등을 통해 한국 사업장을 유지해보겠다는 입장이다. 반면 정부와 산업은행은 한국지엠에 대한 실사결과와 GM의 신차 배정 계획 등을 본 뒤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GM이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너부터 먼저’이다.

다시 되짚어 보자. 이동걸 산업은행장은 금호와 STX 사태 해결을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그의 설명처럼 파국 직전에 대안을 도출한 것은 의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럴까. ‘도장을 찍지 않으면 부도를 내겠다’는 말에, 그것도 그 말이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들로부터 나온다면 누가 항거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협상이었다. 노동자들의 투항으로 회사는 고통을 분담하면서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고 할 것이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형편은 그만큼 열악해졌다.

특히 STX의 사정은 심각하다. 노사는 희망퇴직과 아웃소싱 같은 인적 구조조정 대신 5년간 매년 6개월씩 무급휴직과 임금 및 상여금 삭감을 선택했다. GM은 어떻게 될까. GM은 오는 20일을 데드라인으로 노사합의가 안되면 법정관리에 보내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법정관리 신청작업에 들어갔다느니, 한국에 배정될 신차 물량을 중국으로 옮겼다느니, 부도가 나면 30만명이 길거리에 나앉는다느니 하는 얘기도 흘린다. 정부·산업은행은 아직 수수방관이다. 일자리와 세금 투입문제를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 속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전례를 감안하면 노조의 양보를 지렛대로 GM과 협상하겠다는 생각임은 쉬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구조조정은 정부의 묵인 아래 자본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정리해고 요건을 긴박한 경영상 이유로 폭넓게 인정한 상태여서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의식해 지난해 구조조정의 원칙을 재정립하면서 기존 재무 중심에서 산업적 요소를 반영하겠다고 했다. 최근에는 정치적 개입 없이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며 구조조정의 정·경분리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말의 성찬에 그치는 인상이 짙다. 구조조정의 정·경분리는 얼핏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적으로 불리한 노동자의 협상 여지를 차단하면서 결국 산업은행에 유리한 쪽으로 작동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재무중심 구조조정에서 나아진 것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구조조정의 다른 말은 정리해고이다. 정리해고는 삶의 터전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회사 일에만 목매던 노동자들에게 회사 밖은 결코 만만치 않다. 난파선을 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구명조끼는 던져줘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훗날 난파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 할 책임 추궁 작업도 없었다. 기업을 망가뜨린 기업주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나랏돈을 뭉텅이로 쏟아부은 정부·산업은행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결국 고통분담은 늘 노동자 몫이었다. 노조가 커지면서 관료주의화된 측면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구조조정과정에서 터져나오는 노동자의 주장을 밥그릇 챙기기란 말로 폄훼하지는 말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미생들에게 사회적 시선마저 차가운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결단코 해피엔딩 구조조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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