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전’ 부활을 상상하며

2018.04.16 22:08 입력 2018.04.16 22:09 수정

[정윤수의 오프사이드]‘경평전’ 부활을 상상하며

일제강점기의 스포츠 문화는 대체로 ‘나라 잃은 설움으로 청년들이 어울려’ 같이 낭만적으로 서술된다.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제강점기라 해도 시민/노동자에 의한 새로운 도시 문화의 형성과 그에 따른 집합적 정서의 강렬한 표출이 여러 도시에서 전개되었다.

[정윤수의 오프사이드]‘경평전’ 부활을 상상하며

북방의 대표적인 항만, 무역, 공업 도시 원산. 이곳에서는 1897년에 6홀 규모의 골프가 시작되었고 그 하늘 위로 축구공이 날아다녔다. 1926년 11월18일자 신문을 보면 폭우로 경기가 취소된 줄 모르고 관중들이 ‘우중에 장시간을’ 기다렸으나 주최 측은 ‘하등의 일언반구도 끗(끝)까지 막연’하여 결국 관중들은 원산체육회를 항의 방문까지 했다.

개항 이후 항만, 정미, 목재, 연초, 제분, 철강 등 근대적인 산업 도시로 탈바꿈한 인천에서 1920년대에 인배회, 율목리팀 같은 자생적 ‘클럽’이 생겨나고 이들이 제물포고교 자리였던 웃터골에서 매해 ‘전인천 축구대회’를 가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압권은 역시 경평전이다. 경성과 평양은 근세기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경쟁 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해왔다. 청나라를 통해 일찌감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대륙 기질의 평양과 한반도의 중심 거점 도시로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진 경성은 축구에 있어서도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였다.

경성에는 조선축구단과 경성축구단이 있었다. 1918년 창단되었다가 재정난으로 해산한 불교청년회 팀을 1925년에 재규합한 조선축구단은 경성의 휘문의숙에서 수학하던 통도사와 해인사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하여 상당한 공격축구를 전개했다. 이 축구단은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일본이나 중국 원정까지 다녔다. 1933년에 창단한 경성축구단은 연희전문 출신들을 주축으로 하여 조선축구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평양에는 1918년 무오년에 창단했다 하여 ‘무오축구단’이란 이름으로 출발하였다가 1933년에 재편된 ‘평양축구단’이 있었다. 대성학교, 숭실중학, 숭실전문 출신들의 역사다. 전국 주요 도시마다 축구 문화가 활성화되던 때다. 부산을 거점으로 하는 전동래축구단은 김해, 밀양, 마산 등을 돌며 순회 경기도 가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대륙을 향한 전쟁을 도모하던 일제는 그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조선의 주요 도시에 사람들이 운집하는 것을 철저히 막고자 했다. 1931년 11월 함경남도 안변에서 개최 예정이던 축구대회도 시국 불안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1931년 경평전 또한 일제는 대회 자체를 ‘불온’하다고 규정하고 홍보 작업을 한 평양의 구두 공장 노동자 전영택을 경찰서로 끌고 가서 ‘엄중한 취조를’ 하고 구류를 살게 했다.

그럼에도 이 시절에, 요즘의 프로 축구와 같은 특징이 이미 장착되었다. 지역 연고가 뚜렷했으며 스카우트 경쟁도 벌어졌다. 경성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용식은 1940년대에 평양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서울 팀에서 뛰다가 평양의 어느 팀으로 소속이 바뀐 셈인데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70년 가까이 지속된 ‘분단 체제’는, 오래전 경성 선수가 평양 선수로 이적하여 뛰었다는 사실조차 쉽게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929년을 전후로 하여 수년 동안 전개된 경평전은 ‘홈 앤드 어웨이’ 및 ‘정기전’이라는 요소, 즉 단지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만이 아니라 본격적인 ‘현대 도시의 프로 스포츠 문화’라는 특징을 충분히 실현해 가고 있었다.

1933년 4월,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3회 대회가 열렸다. 무려 2만여 명이 몰렸다. 이때부터 경평전은 ‘홈 앤드 어웨이’를 전제로 한 라이벌전 성격을 갖게 된다. 당시 신문은 ‘제바닥’(홈) 경성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원래’(遠來·어웨이)의 평양이 이길 것인가라고 썼다. 해방 직후의 시대적인 혼란과 열기는, 1946년 서울에서 열린 경평전을 격렬한 혼란과 열기로 휩싸이게 하였다. 관중 난동이 발생하고 경찰은 공포탄까지 쐈다.

그리고 수십 년이 그냥 흘러버렸다. 1990년 가을에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고 2002년 가을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남북통일축구경기’가 열렸으나 단발성 이벤트로 끝났다. 이런 이벤트는, 현대 도시의 집합적 열기가 서려 있는 격렬한 축구 정기전이라는 ‘경평전’의 역사성을 잇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상상’이라서 우울하지만 ‘상상’의 가능성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하여 남한은 지리적으로 고립되고 북한은 체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자동차로 서너 시간이면 오가는 거리면서도 ‘상상력의 완전한 고립’ 상태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때마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분위기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어쨌거나 평화 체제의 구축을 향한 발걸음이다. 여러 측면의 남북 교류가 예상되며 그중 첫번째는 역시 스포츠 교류다.

이럴 때에 ‘경평전’의 부활은 의미가 있다. 단순한 축구 경기가 아니라 한반도를 살짝 흔들어대는 문화 행위가 될 수 있다. 한반도의 중심 도시로 정치와 경제와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두 도시가 다시 ‘경평전’으로 서로 왕래해야 한다.

아무래도 일회적인 이벤트로 시작하겠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일회적인 이벤트는 대체로 싱겁다. 공 하나로 짐짓 으르렁대면서도 다 함께 함성을 지르는 풍경이 벌어져야 된다. 그저 우애와 친선의 한마당이 아니라 일단 휘슬이 불리면 이기고 봐야 하는 ‘홈 앤드 어웨이’의 각축전이 펼쳐져야 한다.

경기는 격렬할수록 아름답다. 강슛으로 골이 터지면 미안해할 거 없다. 끝난 후 서로 안으면 된다. 심한 몸싸움으로 넘어지면 가서 일으켜주면 된다. 축구는 축구답게! 그럴수록 다음 경기, 홈 앤드 어웨이가 기다려진다.

이렇게, 중앙정부 차원이든 서울시 차원이든, 살아 펄펄 뛰는 ‘경평전’의 부활을 기필코 이뤄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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