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 세습경영, 비정상의 증거

2018.04.18 21:08 입력 2018.04.18 21:09 수정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영국 고위 관료로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에도 관여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이 재산관리를 맡길 정도로 증권 투자 전문가였다. 케인스는 당시 영국 최고 엘리트들을 만나 관찰할 기회가 많았는데, 영국 세습경영자에 대한 그의 평가는 아둔하고 게으르다였다.

[경제와 세상]재벌 3세 세습경영, 비정상의 증거

이런 경험 때문에 케인스는 기업가가 창업하여 대기업을 이루면 2세들이 경영권을 손쉽게 이어받아 그럭저럭 운영하다가 3세 경영에 이르러 파산한다는, ‘3세대 세습경영 주기 이론’을 확고히 믿었다. 케인스는 영국 경제가 20세기 들어 쇠퇴한 원인 중 하나도 세습경영에 있다고 봤다. 그는 포드, 카네기, 록펠러 같은 기업인이 십수년 만에 세계 최대기업을 만들어내는 미국 경제의 역동성을 부러워하며 빅토리아 수구보수 문화에 찌든 세습기업인들이 이끄는 영국 경제를 한탄했다.

가업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역사적으로 사유재산권제도가 잘 정착되고 발달한 나라일수록 경제도 발전했다는 경제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경영권 세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사학자들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유럽 절대왕정 국가에서는 특권 세력이 사법 권력을 활용해서 신흥 상공계층이 이룬 혁신 자산을 탈취하는 일이 빈번했던 데 반해 명예혁명, 권리장전 등의 영향으로 왕권의 사법부 지배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영국은 사법부의 사유재산권 보호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정착될 수 있었기에 새로운 산업자본 세력도 가장 빨리 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잘 정착한 사유재산권제도가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은 기득권 세력의 사유재산권 보호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소상공인과 중소벤처 혁신 기업가의 자산이 기득권 세력의 독점적 횡포와 사법 권력 부패로부터 잘 보호받을 수 있어야 경제도 발전한다는 의미다.

경영 경험도 없는 전 소유경영자의 아내가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운영하다 실패했고 국민은 엄청난 부담을 떠안았다. 2015년 당시 매출액 500억원 이상 국적 외항선사 40개 중 36개가 영업흑자였다. 즉 한진해운, 현대상선 경영부실은 세계 해운업 불황이 아니라 재벌의 무책임 족벌경영 때문인 것이다.

미국에서 경영권 세습은 예외적인 현상이다. 창업기업가가 은퇴하면 전문경영자가 경영을 맡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에서 소유경영자 기업과 전문경영자 기업의 성과를 비교해 보니 소유경영자의 기업성과가 더 좋다는 연구들이 나올 때마다 한국 보수언론은 이를 재벌기업의 효율성을 방증하는 연구인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소유경영자 기업이란 대부분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창업기업이다. 세습경영은 아주 소수고 사회적 이슈도 아니기에 굳이 구분하지 않을 뿐이다. 창업기업, 전문경영, 세습경영 기업으로 구분한 연구에선 세습경영 기업성과가 가장 낮다. 유럽에 가족 대기업이 많지만 2세, 3세가 직접 경영을 하기보다는 대주주로 이사회에서 경영 감시 통제권을 행사하는 형태가 다수다.

상속세와 증여세를 법대로 내면 2세, 3세의 지분율은 창업자보다 현저히 하락하기 때문에 보통 선진국 대기업가 후손들은 경영자를 감시하는 대주주 역할에 만족한다. 간혹 경영능력이 인정되면 이사회에서 2세 최고경영자가 선출되기도 하지만 전문경영자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릴 수는 없다. 이에 반해 한국에서는 부패한 정치·행정·사법·언론·학계라는 엘리트 카르텔의 적극적 협조가 있기에 다른 선진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즉 재벌 2세가 상속·증여 관련 탈세와 일감몰아주기 등의 불공정거래를 통해 일단 경영권을 세습하면 탈법적 배임·횡령으로 엄청난 특권을 누릴 수 있고 그 다음 세대의 경영권 세습도 시작할 수 있기에, 재벌 가족은 경영권 세습을 포기할 수 없다.

제조업 경쟁력을 나타내는 CIP(competitive industrial performance) 지수에서 2015년 중국은 한국을 추월했다. 화웨이, 알리바바, BYD 등 창업기업가가 주도하는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능한 재벌 3세, 4세들이 한국 대표기업을 경영하는 불합리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재벌개혁은 사회정의, 불평등 문제를 넘어서 한국 경제가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느냐는 생존의 문제이다.

창업기업가와 전문경영자가 대기업을 이끄는 것이 정상국가의 모습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정상국가가 아니다. 재벌의 세습경영과 엘리트 카르텔의 부패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재벌 세습경영은 정치·행정·사법·언론·학계 부패라는 한국 사회 비정상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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