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의 정치사 이끈 DJ·YS ‘애증의 동지’

2018.04.18 21:28 입력 2018.04.18 21:34 수정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6선의 김상현 전 의원 별세

김상현 전 의원이 2005년 1월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상현 전 의원이 2005년 1월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6선 국회의원을 지낸 후농 김상현 전 국회의원이 18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 전 의원 측 관계자는 이날 “김 전 의원께서 노환으로 연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작고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독재 시기 야당을 이끌었다. 1965년 31세에 민중당 소속으로 서대문구갑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1966년 3월15일 국회 한일협정 대일청구권자금 사용안에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4시간30분간 진행했다. 제6대 국회의 최장기록이었다.

김 전 의원의 정치인생 8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겹쳐 있다. 애증이 교차한 것이 둘의 관계였다.

김 전 대통령이 운영하던 웅변학원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김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을 따라 민주당에 입당했다.

김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중이던 1984년 김 전 대통령을 대리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고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창당준비위원으로 참여한 신민당은 19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김 전 의원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계는 1987년 대선을 계기로 변곡점을 맞았다.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합류하지 않고 김영삼이 주도한 통일민주당에 잔류했다. 이후 두 사람 관계는 종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김 전 의원은 여러 번 옥고도 치렀다. 6·7·8대 국회의원까지 내리 3선한 김 전 의원은 1972년 10월 유신,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징역형을 살았다.

김 전 의원은 1970년 정론 월간지인 ‘다리’ 창간 때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다리’는 1970년 11월호에 게재된 문학평론가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 때문에 발행인과 주간이 구속되는 등 필화를 겪었다.

김 전 의원은 호방한 성격과 폭넓은 인맥으로 유명했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회고록에서 “술을 잘하고 말도 유창하며 잡기에도 능한, 그러면서도 통도 크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소설가) 이병주씨와 김상현 의원”이라고 했다.

김 전 의원의 정치 말년은 씁쓸했다. 2004년 광주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17대 총선에 도전했으나 당시 신생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강기정 의원에게 패했다. 2007년 기획 부동산업자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뒤 정계를 떠났다.

동교동계 한 인사는 “김 전 의원은 이념적으로 중도적 실용주의 노선을 처음 걸어본 인물”이라며 “민주화운동 출신도 아니고 보수수구세력도 아닌 정치인이라 어찌 보면 양극단 정치의 모순을 몸으로 느낀 인물”이라고 평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정희원 여사와 아들 김윤호·준호·영호(더불어민주당 의원)씨, 딸 현주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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