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 오솔길 쉬엄쉬엄…일흔 살 ‘젊은 아낙네’의 국수 한그릇, 대청호의 자유

2018.04.18 21:40 입력 2018.04.18 21:42 수정

대청호 오백리길 ‘공정 여행’

대전시 동구 세천동에 있는 연꽃마을에 가면 예술가와 함께 대청호 오백리길을 걸으며 착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쓰고 버리는 소비가 아니라 여행에서 쓰는 돈을 지역과 공동체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어 여행자와 여행자를 맞는 이가 모두 행복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대전시 동구 세천동에 있는 연꽃마을에 가면 예술가와 함께 대청호 오백리길을 걸으며 착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쓰고 버리는 소비가 아니라 여행에서 쓰는 돈을 지역과 공동체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어 여행자와 여행자를 맞는 이가 모두 행복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대청호 오백리길을 공정여행 방식으로 돌아보고 왔다. 공정여행이란 여행자들이 쓰는 돈이 지역과 공동체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착한 여행을 의미한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친환경을 추구한다. 대청호는 풍광도 아름답지만 느린 여행 코스로도 좋다. 대전은 전국 동서남북을 실핏줄처럼 연결해 하루 1300만명이 오가는 교통요충지이지만 대청호는 번잡스럽지 않다.

■ 예술가와 떠나는 공정여행

공정무역(fair trade)과 일맥상통하는 공정여행은 “여행하는 이와 여행자를 맞는 현지 주민들이 서로 문화를 존중하고 경험하며 성장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대청호 오백리길에선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대전과 충북 청주, 보은, 옥천이 맞닿아 있다. 한 바퀴는 500리 200㎞인데, 이 중 대전 구간은 59㎞다. 대전 지역 화가인 박석신씨와 함께 맑은 호수를 품고 있는 ‘연꽃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연꽃마을은 행정구역상 대전시 동구 세천동에 속해 있다. 20분이면 충분하지만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걸으면 1시간30분이 훌쩍 간다. 13년째 대청호를 수채화와 유화로 그려내고 있는 ‘송영호 화실’ 앞에 섰다. 소박한 집마당 빨랫줄에 걸린 햇살이 따사로웠다. “물빛이 금빛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시시각각 변합니다. 정형화된 것이 없으니 대청호는 자유인 게지요.” 송 화백이 대청호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호숫가 오솔길 쉬엄쉬엄…일흔 살 ‘젊은 아낙네’의 국수 한그릇, 대청호의 자유

고요한 호수에 안겨 있는 연꽃마을은 한적했다. “들여다보지 못하면 그냥 밟고 지나게 됩니다. 자세히 뜯어보면 예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꽃은 무엇일까요? 이름을 알면 정말 재미있어요.”

박석신씨와 발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야생화 천지였다. ‘쇠뜨기’는 신기하게도 뚝뚝 줄기가 끊어졌다. ‘냉이’는 향긋한 봄내음을 주는 것도 고마운데 여린 잎이 하트 모양으로 생겨 더 사랑스럽다. ‘꽃마리’는 이름처럼 예뻤고 하얀 ‘별꽃’은 새초롬한 새색시 같았다. 밥상에 올라오는 돌나물, 광대나물, 원추리 등등 야생화들이 반갑다. 민들레 줄기를 잘라 ‘후’ 하고 불었다. 피리 소리가 났다. 하얀 팝콘이 달라붙은 것 같은 조팝나무 가지를 꺾어 화관을 만들어 써봤다. 제비꽃으로는 자그마한 꽃반지를 만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들꽃을 바라보며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봄빛이 찰랑거리는 호숫가를 쉬엄쉬엄 걸었다. 자연을 닮은 대청호는 평화로웠다. 나무 데크가 아닌 흙을 밟으며 나무와 꽃을 만났다. 게다가 지금은 호수에 물이 가득 차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만수기. 곧 모내기가 시작되면 모래톱이 백사장처럼 나타나는데 옛 마을 김장터, 우물터가 그대로 드러난다고 했다. 물속 깊은 곳에 고향을 두고온 수몰 지역 마을 주민들은 터만 봐도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했다.

“여기 바위를 보세요. 쩍쩍 갈라져 있지요. 둥글둥글 모나지 않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저기 거북바위 앞에서 잠시 쉬어갈까요.”

고요한 섬들이 떠있는 것 같은 대청호.

고요한 섬들이 떠있는 것 같은 대청호.

박씨가 화구통을 내려놓더니 나무 의자에 앉았다. 풀뿌리를 모아 엄지손가락만 한 붓을 만든 뒤 호숫가 물을 나뭇잎에 받아오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누가 생각납니까?” 박씨가 물었다. 아름답고 호젓한 호숫가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대전이 고향인 어머니가 떠올랐다. 박씨는 A4 용지만 한 도화지에 어머니를 떠올리며 살짝 선을 그어보라고 했다. 5분쯤 지났을까 박 작가가 “산 넘는 길, 꽃을 지고 예쁘게 넘었다”며 어머니의 이름을 탐스러운 꽃을 얹은 그림으로 완성해 주었다. 나도 몰래 눈시울이 붉어졌다.

■ 국수 한 그릇으로 만나는 공정여행

“이곳은 오리골마을입니다. 가장 젊은 아낙네가 70살이시죠. 국수를 삶아 여행자들에게 한 그릇에 5000원씩 파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맛난 국수는 물론이고 떡과 막걸리, 겉절이에 나물반찬까지 내오셨어요. 40명이라봐야 고작 20만원인데 재료값을 빼면 남는 것도 없지요.”

박씨는 “관광버스가 몰려오면 쓰레기만 늘고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앞집은 국수를 삶고, 옆집은 육수를 내고, 뒷집은 떡을 하면서 잊혀졌던 30년 전 동네 잔치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텃밭에서 기른 상추와 완두콩을 팔아 손주들의 용돈을 벌었다. 여행자들은 로컬 푸드를 값싸게 사갔다. 지금까지 20여차례. 수익금은 올봄 80~90세 어르신을 위해 동네 잔치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거북이 알처럼 모나지 않은 바위를 지나 황새바위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1년여 전 불이 나 벌거숭이가 된 산자락이 보인다. 화재 후 심은 어린 소나무의 키가 30㎝쯤 돼 보였다. 10년 뒤면 어른 키만큼 자랄 텐데 어서 빨리 상처를 보듬어 울창한 숲을 이루기를 기도했다.

황새바위 앞에는 대청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황새바위같이 생긴 바위는 없었다.

“마을이 수몰되기 전 저 아래 강가에서 보면 황새바위 같았다고 해요.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황새바위라고 부르죠.”

박씨가 창작한 거북바위와 황새바위를 주제로 한 동화를 들려줬다. 거북바위가 알을 낳기 위해 강 아래 모래톱을 오르는데 산불이 나서 아우성치는 황새바위를 발견했고 온 힘을 다해 불을 끄지만 끝내 목숨을 잃는다는 조금은 슬픈 동화였다.

돌아오는 길은 근사했다. 마치 유럽에 온 듯 두 사람이 손잡고 걸으면 딱 좋을 만한 오솔길이 도란도란 이어졌다.

도자기 체험여행으로 지역주민을 도울 수 있는 ‘하늘강 아뜰리에’.

도자기 체험여행으로 지역주민을 도울 수 있는 ‘하늘강 아뜰리에’.

“도자기를 만들고 사진을 찍어 여행책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올가을에는 추동 가래울마을에서 호박축제를 처음 열 계획입니다. 마을 주민들의 살림에 도움이 되는 착한 여행은 어떠신지요.”

최철규 대전마케팅공사 사장은 “대청호를 찾으면 마을 주민과 여행자가 모두 행복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고 정을 나누며 어우러져 사는 것, 공정여행을 통해 얻은 값진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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