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분단의 끝, 평화의 시작’ 판문점

2018.04.19 17:59 입력 2018.04.19 18:00 수정
이기환 논설위원

1953년 7월 초 시작된 휴전회담의 장소는 원래 개성이었지만 석달만인 10월  개성과 문산 사이 1번국도변에 있는 판문점으로 바뀌었다. 판문점을 중심으로 반경 1000야드(914.4m)는 이때부터 쌍방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회담장소가 되었다. (출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 휴전사>, 1989)

1953년 7월 초 시작된 휴전회담의 장소는 원래 개성이었지만 석달만인 10월 개성과 문산 사이 1번국도변에 있는 판문점으로 바뀌었다. 판문점을 중심으로 반경 1000야드(914.4m)는 이때부터 쌍방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회담장소가 되었다. (출처: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 휴전사>, 1989)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한국전쟁 휴전회담의 장소는 개성의 광문동 민가(예비회담)과, 한때는 고급요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내봉장(본회담)이었다.

개성이 한국전쟁 전의 분단선인 38도선상의 도시라는 점이 감안됐다. 그러나 그 당시 공산군측의 치하에 속했다는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공산군측은 의도된 무력시위는 물론 유엔군이 개성을 폭격했다는 날조 사건까지 퍼뜨려 회담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유엔 공군기 1대가 항로에 착오를 일으켜 개성에 실제로 기총소사를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회담장소 변경은 불가피했다.

양측은 옥신각신 끝에 “쌍방 접촉선의 중앙 부근, 개성·문산 사이의 중립지대인 판문점 근처가 적격”이라는 합의에 도달한다. 널빤지(板) 대문(門)으로 알려진 판문점(板門店)은 당시 보잘것없는 주막거리였다. 도로변에는 4채의 초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 달 이상 중단된 휴전회담은 이곳 판문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재개됐다.

이후 양측의 팽팽한 공방 속에 159회의 회담과 575회의 공식회의를 연 끝에 1953년 7월27일 마무리됐다.

유엔·공산 양측이 1년7개월의 줄다리기 끝에 휴전협정에 서명한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의 판문점 풍경은 지극히 무미건조했다.

판문점의 초기 모습. 널빤지 대문이라는 의미의 판문점 일대에는 당시 초가 4채만 있었다.

판문점의 초기 모습. 널빤지 대문이라는 의미의 판문점 일대에는 당시 초가 4채만 있었다.

“양측 수석대표는 인사도, 악수도 없이 휴전협정문에 서명하고 돌아섰다. 단 12분 만이었다”는 기록(<휴전사>)이 남아있다.

이후 판문점은 쌍방이 공동으로 경비하는 회담장소로 유지됐다. 반경 1000야드(914.4m)의 원형구역 안에서는 군사분계선 표시도 없었고, 쌍방 경비원들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휴전 후 얼마간은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실수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경우가 제법 있었는 데도 무사히 돌아왔다.

예컨대 1953~54년 사이에는 65명의 한국군 유엔군 병사들이 넘어갔다가 3~4일 안으로 돌아왔다. 인수증도 필요 없었다. 1955년 8월 번파스 공군 소위도 T-6 조종실수로 북한 영공을 칩입했다가 격추됐다. 그러나 역시 4일만에, 인수증 없이 돌아왔다.

1962년 9월 5일 돌발사건이 벌어졌다. 추석을 맞아 남북한 경비병들이 “우리끼리 재미있게 지내자”고 술판을 벌이다가 언쟁이 벌어졌고, 급기야 총격전으로 번졌다.

자주 섞여 대화도 나누었던 병사들이지만 ‘그 ×의 술’이 문제였다. 북한군 사병 3명이 사망하고, 장교 2명이 다쳤다. 한국군 병사 몇명도 다친 것으로 보고됐다.

냉전이 고착화하면서 판문점은 삿대질과 욕설이 오가는 정치선전장으로 변질됐다. 1968년 11월28일 양측 비서장 회의에서는 아이들 장난같은 촌극이 빚어졌다. 당시 북한측은 “유엔사측의 판문점 기자 대기실 옥상에 설치된 탐조등이 북한 초소를 너무 환히 비춘다”면서 “즉시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유엔군측이 거부하자 북한군 정치장교가 아주 강력한 빛을 발하는 탐조등을 가져와 유엔사 비서장인 루카스 대령을 비추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이리저리 피하자 북한의 한주경 대좌가 “이것봐라. 우리가 당신한테 이렇게 불을 비추면 견딜 수 있겠느냐”고 놀려댔다. 루카스 대령이 “어두운 밤은 도둑들에게 안전한 시간이며. 밝은 빛은 올바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고대 그리스 극작가 유리피데스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자 한주경은 “그렇게 밝은 빛을 좋아하면서 왜 대낮에 탐조등(등불)이 무서워 얼굴을 피하느냐”고 더욱 놀렸다.

판문점을 반복과 갈등의 역사로 굳힌 결정타는 역시 1976년 8월18일 일어난 도끼만행사건이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인민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당신측(유엔군측) 총사령관에게 전해주기 바란다”면서 직접 유감의 뜻을 표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유감을 표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의 후속조치로 “재발방지를 위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도 군사분계선을 두자”고 제의한다.

“현존하는 공동경비구역 안의 안전보장 질서로는 양측 군사인원의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 쌍방의 군사인원들의 충돌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쌍방의 경비인원들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격리시켜야….”

이로써 이제는 판문점마저도 군사분계선 표시가 생겼다. 1978년 6월13일에도 희대의 촌극이 빚어졌다. 북한으로 송환되는 어부 8명이 우리측이 내준 옷과 구두, 선물까지 내팽개치고 맨발에 속옷차림으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것이다. 1984년 11월23일 구 소련인인 바실리 야코블레비치의 판문점 탈출 때는 쌍방이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판문점에 늘 흑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방북했던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가 민간인 최초로 귀환(1989년)했고, 고 정주영 전 현대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통과한 곳도 판문점이었다. 27일 바로 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그동안 판문점이라 하면 분단과 냉전이 낳은 증오의 시작점으로 각인되었다. 이젠 달라야 한다. 판문점을 분단의 끝이자 평화의 출발점으로 삼으면 어떨까.<참고자료>

이문항, <JSA-판문점(1953~1994)>, 한림과학원총서 84, 소화, 200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휴전사>, 1989

국방군사연구소, <한반도 휴전체제 연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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