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엄마

2018.04.19 20:44 입력 2018.04.19 21:00 수정

[세상읽기]공무원 엄마

박소진 교수가 작년에 펴낸 <신자유주의시대의 교육 풍경>은 사교육시장의 소비자이자 관리자인 ‘매니저 엄마’의 활약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이에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하는 기업가가 되라고 다그친다. 이에 발맞추어 매니저 엄마는 자녀의 자아를 기업가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자녀의 모든 것을 관리경영한다. 든든한 남성 부양자 덕분에 매니저 엄마가 계층상승을 위한 자녀교육에 몰입할 수 있다. “효율성과 경쟁을 중시하면서 ‘남성 부양자와 여성 전업주부’와 같은 가부장적 성별분업을 강화하고 자녀의 (교육) 성공을 중시하는 ‘성별화된 세대 간 전략’을 통해 사회 이동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모성 담론이 계급을 불문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보고한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지방대생과 그 부모를 연구하고 있는데 내가 수집한 자료에서는 이런 담론이 잘 통하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남편이 가족을 온전히 지원할 경제 능력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가부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죽어라 일하다 집에 돌아오면 바로 쓰러진다. 아내는 무능한 가부장 때문에 집 밖에 나가 임금 노동에 시달린다. 일 마치고 집에 와서도 ‘전업주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시 가사노동에 돌입한다. 중산층도 아니면서 가부장적 핵가족 모델을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려니 둘 다 과잉 노동에 죽을 맛이다. 그러는 사이 자녀들은 경영되기는커녕 돌봄 공백 상태에 빠져 살다 결국 지방대에 간다. 이런 상황에서 ‘가모장’은 자녀가 공무원이나 되었으면 하고 막연하게 바라는 ‘공무원 엄마’가 된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공무원 엄마가 볼 때 공무원이야말로 이 표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방대생은 좀 괜찮다 싶은 사기업에 지원하면 서류전형부터 떨어진다. 공기업에서는 힘들게 1차 전형을 통과한다 해도 최종면접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공무원시험은 기회가 평등하게 열려있다. 시험 자체가 계량화, 표준화되어 있어 시험 과정도 공정하다. 얼마나 시간을 성실하게 투자했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의롭지 못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자아를 경쟁 밖에 놓는 것에 익숙한 지방대생은 애초부터 낮은 급수의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 그나마 돌봄 공백 상태에서 매사 ‘적당하게’ 살아왔기에 시험 준비도 느슨하게 한다. 어쩌다 공무원이 된다 해도 관료제 안에서 자율성 없는 조직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공무원 엄마는 자녀가 공무원이 되었으면 한다. 자녀가 자신과 같은 고된 삶 대신에 평범한 가정을 꾸려 살아가면 좋겠다. 하지만 이 바람은 사실상 자녀가 중산층 이상으로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계층상승 언어’를 대놓고 사용할 수가 없다.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지방에서는 계층상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가 공무원이 되어 가늘지만 길고 안정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자녀에게 공무원이 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지원해준 것이 변변찮아 오히려 미안할 따름이다. 자녀 역시 고생하는 부모를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자이언티의 노래가 떠오른다. 아플까봐 가족끼리 걱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서로 아프게 하지 말자는 강렬한 상호 다짐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족이 무리하게 요구할 때 나는 아프다. 시험에 붙을 자신이 없는데 공무원 되라고 막 요구하면 지방대 자녀가 아프다. 경제 지원 능력이 없는데 사교육시켜달라거나 서울에 가 취업 준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심하게 요구하면 공무원 엄마가 아프다. 잘못하다가는 관계 자체가 끝장날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상대방의 요구에 적당히 맞춰주거나, 아니면 늘 하던 대로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상호 연민에 바탕을 둔 ‘자녀의 적당주의’와 ‘부모의 성실주의’가 서로를 증폭시킨다. 어쩌랴, 지방에 만연한 이 연민의 공동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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