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부족한 존재들의 서로를 채우려는 몸짓…그것이 진정한 ‘오늘’

2018.04.19 21:04 입력 2018.04.19 21:05 수정

오늘이, 그 이름의 비밀

이성강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늘이>(2005)에서 매일이와 장상이가 만나는 장면이다. 오늘이가 길에서 만난 이들은 그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오늘이는 이를 하나하나 해결해주면서 신녀, 즉 무녀가 된다.

이성강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늘이>(2005)에서 매일이와 장상이가 만나는 장면이다. 오늘이가 길에서 만난 이들은 그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오늘이는 이를 하나하나 해결해주면서 신녀, 즉 무녀가 된다.

신의 이름에는 비밀이 있다. 천신(天神)을 풀면 ‘하늘님’인데 우리 신화에서 하늘님의 다른 이름에는 환인·천지왕·옥황상제 등이 있다. 환인은 불교의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에서 왔고, 옥황상제는 도교에서 왔고, 천지왕(天地王)은 무교(巫敎)에서 하늘님 대신 사용하는 이름이다.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튀르크어에서는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가 천신의 이름이고, 일본에서는 빛나는 태양을 뜻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가 천신의 이름이다. 만주어에서는 하늘을 뜻하는 ‘압카’와 여음(女陰)을 뜻하는 ‘허허’가 합쳐져 천신의 이름이 되었다. 최고신들의 이름은 대개 하늘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렇게 신들의 이름을 추적해가노라면 한 권의 책이 될 테지만 오늘은 특별한 이름 하나를 불러보고 싶다. 제주도 무속신화인 <원천강본풀이>의 주인공 ‘오늘이’가 그 이름이다. 강림들판에 홀로 버려진 아이,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고아. 여자아이를 발견한 세상 사람들은 “너는 낳은 날을 모르니 오늘을 낳은 날로 하고 이름을 오늘이라고 하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 오늘이는 누구인가?

오늘이를 알려면 먼저 <원천강본풀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원천강본풀이>는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하나는 아카마스 지조 등이 1930년대에 조사한 자료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에 진성기 선생이 조사한 자료다. 둘 가운데 오늘이가 주인공인 신화는 앞의 것이고 박봉춘 심방(무당)이 구술했다. 하지만 두 자료 가운데 <원천강본풀이>라는 제목에 더 어울리는 신화는 조술생 심방이 구연한 후자다. 왜 그런가?

제목에 포함된 원천강(袁天綱)은 <구당서>에 따르면 7세기 무렵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관상이나 풍수, 또는 점술에 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관상감의 관원이 되기 위한 과거시험의 교과목으로 사용되었던 책의 제목도 <원천강오성삼명지남>(袁天綱五星三命指南)이었다. 원천강이 조선시대 이래 점쟁이의 대명사처럼 쓰인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술생 심방이 구연한 <원천강본풀이>가 바로 여주인공이 점쟁이가 되는 이야기다. 본래 여주인공의 남편은 왕이 될 영웅이었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다. 남편은 이를 미리 알고 숨었고, 역적을 찾아낼 방도가 안 보이자 권력은 여자의 질투심을 이용한다. 느닷없이 작은 마누라가 아이를 안고 나타나자 여자는 장독을 열고 남편한테 따진다. 그 순간 ‘안가’가 노출된 영웅은 체포된다. 사지로 떠나는 남편이 남긴 말은 “나를 잡아가면 너는 살 수 없을 테니 원천강이나 보면서 살아라”였다. 여주인공이 원천강이란 이름을 얻고, 원천강을 보면서 살게 된 내력이다. 원천강이 점쟁이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원천강본풀이>라는 제목에 딱 맞다.

조술생 버전과 달리 박봉춘의 <원천강본풀이>는 당나라 출신 원천강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신화다. 이 신화에서 원천강은 인명이 아니고 천상에 있는 공간의 이름일 따름이다. 하지만 따지다 보면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왜 그런가? 의문을 해소할 단서가 오늘이의 이름 안에, 행로 뒤에 숨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날 “옥 같은 계집애가 적막한 들에 외로이 나타나니 그를 발견한 이 세상 사람들이 ‘너는 어떤 아이냐’고 묻”는다. 고독한 인간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첫머리 진술이다. 아이는 부모가 없으니 제 정체를 모른다. 아이를 키운 것은 하늘에서 날아온 학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발견한 세상 사람들이 ‘오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비로소 첫 정체성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그 이름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아이는 제 이름에 걸맞은 일을 찾기 위해 부모를 찾아간다. 떠돌다 만난 백씨 부인으로부터 부모의 소재지가 원천강이라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오늘이가 원천강을 찾아가는 길은 ‘복(福) 타러 가는 사람 이야기’, 곧 ‘구복여행담’의 길을 빼닮았다.

“원천강은 어떻게 갑니까?” “원천강을 가려거든 별층당에 높이 앉아 글 읽는 아이가 있으니 그 아이를 찾아가 문의하면 소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이와 백씨 부인 사이의 첫째 문답이다. 오늘이는 별층당을 찾아가 아이를 만난다. 아이의 이름은 장상이, 글을 읽으라는 옥황상제의 분부로 종일 책읽기에 매여 있는 인물이다. 통성명을 한 오늘이는 원천강 가는 길을 묻는다. 장상이는 연화못을 찾아가 연꽃나무한테 물어보면 길을 알 수 있으리라고 하면서 이런 부탁을 한다.

음악극으로 만들어진 <오늘이> 포스터.

음악극으로 만들어진 <오늘이> 포스터.

“원천강에 가거든 내가 왜, 밤낮 글만 읽어야 하고, 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 주세요.”

오늘이처럼 장상이도 자신의 존재성 혹은 운명에 대한 의문을 지닌 아이였다. 용궁이나 천상에 복을 물으러 가는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자신의 운명도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듯이 장상이도 같은 부탁을 한다.

이런 식으로 ‘원천강 길 안내’와 ‘팔자 의뢰’ 사이의 교환이 몇 차례 반복된다. 두 번째 만난 연꽃나무는 “나는 겨울에는 뿌리만 살아 있다가 이월이면 가지가 살아나 삼월이면 꽃이 피는데 꽃이 맨 윗가지에만 피고 다른 가지에는 피지 않으니 이게 무슨 팔자인지 물어 주시오”라고 부탁하며 길을 가르쳐 준다. “청수아당가에서 구르고 있는 천하대사(天下大蛇)한테 가서 물으면 좋은 도리가 있을 거야.” 이어달리기하듯 맑은 물가에 살고 있는 다음 주자 이무기를 소개한다.

세 번째 주자인 천하대사의 고민은 “다른 뱀들은 야광주(夜光珠)를 하나만 물어도 용이 되어 승천하는데 나는 야광주를 셋이나 물고 있는데도 용이 못되고 있다”는 자신의 현존이다. 오늘이가 사연을 접수하자 대사는 오늘이를 등에 태워 청수를 건네주면서 매일이라는 여자아이를 만나 물어보라고 한다.

네 번째 주자인 매일이의 처지는 장상이와 닮은꼴이다. 매일 글을 읽고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물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작별에 즈음하여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앞으로 가다 보면 궁녀가 울고 있을 텐데 그 이유를 물으면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전에 옥황의 시녀였다가 죄를 지어 그 벌로 우물의 물을 다 퍼내야 하는데 바가지에 큰 구멍이 뚫려 물을 조금도 퍼낼 수가 없는 것이랍니다.”

시녀를 만난 오늘이는 풀을 모아 구멍을 막고 송진을 녹여 때운다.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수리한 바가지를 시녀에게 주지 않고 우러러 옥황상제에게 축사를 한 뒤 오늘이 스스로 한 바가지 물을 푸자 순식간에 우물물이 말라 버린다. 오늘이가 범상한 소녀가 아니라는 뜻이다. 시녀는 백배사례하며 원천강 가이드를 자청한다.

그러나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천상의 원천강 문을 문지기가 매정하게 막아선다. 문 앞에서 문이 막히는 순간, 아마도 오늘이의 심장 위로 지나온 길들의 고통이, 존재의 괴로움이 화살처럼 쏟아졌을 것이다. 오늘이는 통곡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문이 열리지 않아 미칠 것 같다는 이즈음 아이들의 절규와 같은 통곡이다.

어린이책 <사계절의 신 오늘이>(한겨레어린이)에 그려진 원천강의 모습.

어린이책 <사계절의 신 오늘이>(한겨레어린이)에 그려진 원천강의 모습.

이 통곡이 결국은 문을 연다. 딸의 통곡이 원천강의 신이 된 부모의 귓전을 때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부모 앞에 도달한 오늘이는 자신이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더불어 부모가 자신을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 오늘이는 원천강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인간의 사계절을 관장하는 원천강의 신성함도 알게 되었다. 사계절은 자연의 질서를 뜻하고, 자연 질서의 순조로움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되는 것이니, 원천강은 결국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들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원천강에 닿아 있는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존재성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다. 원천강을 찾아가는 길이 정체성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면 강림들판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정체성을 펼치는 길이다.

그래서 오늘이는 귀환의 행로에서 매일이·대사·연꽃나무·장상이를 역순으로 만나 그들의 존재론적 물음을 해결해 준다. 매일이와 장상이는 부부가 되는 것으로 의문이 해결되고, 천하대사는 야광주를 하나만 갖고 둘은 오늘이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연꽃나무는 우듬지 꽃을 따 처음 만나는 사람, 곧 오늘이에게 넘기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야광주 하나를 문 대사는 용이 되어 승천하고, 한 송이를 따버리자 연꽃나무 가지마다 꽃이 피고, 야광주와 연꽃을 획득한 오늘이는 신녀(神女)가 된다.

이런 주인공의 행로와 원천강 또는 오늘이라는 이름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원천강본풀이>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결핍을 지닌 존재들이다. 인간을 대표하는 오늘이는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식물계를 대표하는 연꽃나무는 적화(摘花)를 몰라 결핍을 지닌 존재이고, 동물계를 대표하는 이무기는 욕심이 지나쳐 오히려 결핍을 지닌 존재이고, 신령계를 대표하는 선녀는 지상에서는 구멍 뚫린 바가지 하나 고치지 못하는 존재이다. <원천강본풀이>는 결핍을 지닌 존재들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신화이다.

그런데 이들의 결핍을 채우는 춘하추동, 비밀의 방들이 있는 곳이 바로 원천강이다. 원천강의 상상력은 점술가·관상가·풍수가인 원천강에서 출발하여 조술생 구연 <원천강본풀이>의 점쟁이 마누라 원천강으로 변형되었지만 박봉춘의 <원천강본풀이>에서는 더 창조적으로 변형된다. 사실 점술이란 자연의 은유를 읽어내어 인간의 운명을 예견하는 기술이다. 따라서 점술가는 개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신령한 세계로부터 꺼내오는 이야기꾼(storyteller)이다. 박봉춘 본 <원천강본풀이>는 그 신령한 세계가 바로 원천강이라고 말하고 있다. 점쟁이 원천강에서 더 나아가 점쟁이-이야기꾼의 존재의 근거가 되는 원천강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이는? 오늘이는 세계의 운명을 점지하는 신령한 곳, 곧 원천강의 딸이고 신녀다. 이 말은 오늘이가 원천강의 메시지를 이 세상에 전해주는 메신저라는 뜻이다. 원천강의 메시지를 들고 귀환의 행로에서 모든 존재들의 결핍을 해소해 준 소녀가 오늘이 아니었던가! 타자들의 결핍을 채워줌으로써 자신의 결핍마저 치유한 여신이 오늘이 아니었던가! 이제 알겠다. 세상 사람들이 이 메신저의 이름을 왜 오늘이라고 불렀는지. 그것은 원천강의 비의를 아는 오늘이야말로 오늘(today)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여신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비밀이고, 오늘이라는 이름의 비밀이다.

<원천강본풀이>는 현재 전승이 끊어져 제주 굿에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원천강본풀이>는 본래 제주도 ‘신굿’에서 불렸던 무가라고 한다. 신굿이란 심방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을 위해 벌이는 비밀스러운 굿이다. 그런 굿에서 <원천강본풀이>가 구연되었다는 사실은 심방들의 정체성과 신녀 오늘이의 관계가 깊다는 뜻일 것이다. 정체성을 찾아 떠난 긴 여행의 끝에서 우주의 비밀을 얻어 그것으로 결핍된 존재들의 소원을 이루게 하는 오늘이의 행로는 심방들의 삶의 행로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이는 제주도 심방들이 자신들의 소명에 대한 자각을 투사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난제들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중이다. 작고 큰 공동체의 난제만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 자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결핍을 해소해 줄 오늘이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 당장 오늘이한테 물어보아야 한다.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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