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D-6

되짚어본 1·2차 남북정상회담···김대중 “서울 답방 명시해야”, 노무현 “말이 좀 통하네”

2018.04.21 06:00 입력 2018.04.21 10:09 수정

되짚어본 1·2차 남북정상회담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영접 나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밝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월13일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영접 나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밝은 표정으로 악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1년 만에 열리는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20일 현재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면하는 이번 회담은 27일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집에서 ‘당일치기’로 열린다. 앞서 2000·2007년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은 모두 남측 대통령이 방북해 2박 3일 일정으로 머물며, 김 위원장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역대 정상회담 모습을 되짚어본다.

■ 분단 후 첫 남북 정상 만남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월13~15일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한 것은 분단 이후 남북 정상의 첫 만남이라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공군 1호기(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북한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 위원장은 예고없이 ‘깜짝’ 등장해 김 전 대통령을 영접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 인민군 의장대도 사열했다.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로 향하려는 김 전 대통령 차량에 김 위원장이 동승하는 등 초반부터 파격적인 예우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차량 안에서 약 50분 동안 독대했다.

북한은 그해 3월9일 김 전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직후부터 비공식 경로를 통해 남측에 특사 접촉을 제의했다. 3월17일 중국 상하이에서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을 시작으로 두 차례 추가 접촉이 이뤄진 뒤 4월8일 정상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했다.

남북은 당초 6월12일 김 전 대통령이 방북하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회담 이틀 전 북한은 ‘기술적 준비 관계’를 이유로 하루 연기를 요청했다. 3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원로자문단장을 맡고 있는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서 북한의 회담 연기를 두고 “우리는 이것을 ‘김 위원장이 공항 영접을 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회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 보고된 김 위원장의 신상 정보는 부정적이었다. 그해 5월 김 전 대통령은 임 전 원장에게 김 위원장을 만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임 전 원장은 김 전 대통령에게 “상대방 말을 경청하며 말하기를 즐기는 타입” “말이 논리적이지 않지만 주제의 핵심은 잃지 않는 좋은 대화 상대자라는 인상” 등이라고 보고했다. 김 전 대통령도 그제야 안심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6월14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3시간14분 회담 끝에 6·15 공동선언문 작성에 합의했다. 그러나 회담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남북은 선언문 서명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김 위원장은 김용순 당시 비서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이름을 명기하자고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의 이름과 직책을 써야 한다고 계속 설득하자 김 위원장은 “대통령이 전라도 태생이라 그런지 무척 집요하군요”라고 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도 전라도 전주 김씨 아니오. 그렇게 합의합시다”라고 말해 좌중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선언문에 명시하는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제안에 김 위원장이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임 전 원장은 “김 대통령 설득은 간청이라도 하듯 간곡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도 2008년 출간한 회고록 <동행>에서 “잠시 휴식차 온 그는 많이 지쳐 보였다. 다시 회담장으로 갈 때는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무거운 걸음을 떼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고독하고 힘겨워 보였다. 결혼생활 중 만난 가장 고독한 모습이었다”고 당시 힘겨웠던 분위기를 전했다.

남측은 김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궁전을 참배하는 일정을 놓고 진땀을 빼기도 했다. 북측은 의전 절차 등을 이유로 회담 전 비밀접촉 때부터 회담 당일 오전까지 남측에 참배를 요구했다. 남측은 반대 입장을 견지했고 결국 이 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채 김 전 대통령 방북이 이뤄졌다. 금수산궁전 참배는 결국 하지 않았다.

회담 이후 열린 만찬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김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비롯한 양측 참석자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불렀다. 두 정상은 만찬 도중 공동선언 최종안을 보고받고 합의했다. 그러고나서 연단으로 나와 손을 잡고 두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촬영 기자들이 그 자리에 없어 기자들을 부른 뒤 다시 같은 포즈를 취했다.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된 이 장면은 연출로 이뤄진 셈이다.

방북 마지막 날 김 전 대통령이 귀환할 때도 김 위원장은 순안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이 자리에서 두 정상은 악수와 함께 세 차례 포옹을 했다.

■ 김정일 “하루 더 체류” 돌출 발언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주재한 환영오찬을 하며 건배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주재한 환영오찬을 하며 건배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2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MDL)을 넘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대한민국 국가원수가 MDL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이 장면은 CNN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노 전 대통령은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차량을 타고 평양으로 향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고 오픈카에 탑승해 퍼레이드를 했다. 이어 4·25문화회관으로 이동했는데, 1차 회담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예고없이 등장해 노 전 대통령을 영접했다.

다만 7년 전 김 위원장이 김 전 대통령을 맞이할 때 크게 웃으며 화통하게 두손을 맞잡았던 것과 달리 잠깐 웃은 뒤 무표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건강악화설이 나오기도 했다.

앞서 북핵문제 진전을 계기로 정부는 2007년 7월 초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과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간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다. 김 원장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8월 두 차례 비공개 방북해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은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다. 당초 남북은 회담을 8월28~30일에 개최키로 했으나 북한의 대규모 수해로 인해 10월로 연기했다. 1·2차 정상회담 모두 최초 합의한 날짜에 개최되지 못한 것이다.

정상회담은 10월3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오전과 오후로 나눠 총 3시간51분 동안 진행됐다. 회담 과정에서 김 위원장의 돌출 발언과 행동이 주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오후 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오늘 일정을 내일로 늦추는 것으로 해 모레 서울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라며 갑작스럽게 체류 연장을 제안했다. 외교적 결례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노 전 대통령은 “나보다 더 센 데가 두 군데가 있는데 경호·의전 쪽과 상의해야 할 것 같다”며 즉답을 피하자, 김 위원장은 “대통령께서 그걸 결심 못하십니까”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오전 회담에 예정된 시간보다 33분 일찍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김 위원장이 체류 연장을 제안한 것은 당일 저녁 ‘아리랑’ 공연이 우천으로 취소될 수 있었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오후 회담 말미에 체류 연장 제안을 거뒀다. 오후에 비가 그쳐 ‘아리랑’ 공연도 예정대로 진행됐고 노 전 대통령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함께 관람했다. 북측은 ‘아리랑’ 공연 중 이념성을 강조한 부분을 상당 부분 수정했다.

2차 정상회담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노 전 대통령은 방북 첫날인 10월2일 김 상임위원장을 만난 뒤 “엄청난 사고방식 차이를 느껴 잠을 자지 못했을 정도였다. 벽이 너무 두꺼워 한 가지나 합의할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했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오전 회담 도중 “이렇게 하면 점심 먹고 짐 싸고 가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후 가니까 잘 풀려서 말이 좀 통하더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서울 답방을 공식 요청했으나 김 위원장은 사양했다. 김 위원장은 1차 회담 때와는 달리 회담 이후 남측의 답례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 환송 오찬에 참석한 김 위원장은 “내가 마치 당뇨병에 심장병까지 있는 것처럼 (서방과 남측 언론이) 보도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불쑥 건강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7년 전 김 전 대통령과의 만찬 때처럼 건배를 한 뒤 와인을 ‘원샷’했다. 10·4정상선언 서명식을 마친 뒤 두 정상은 1차 회담 때처럼 손을 잡고 들어올렸다.

■ 3차 회담, 1·2차 합의정신 계승해야

2000년 6·15공동선언은 분단 이후 단절된 남북대화를 재개하는 선언적 성격으로 평가된다. 5개 항으로 구성된 선언문의 첫 번째 항에는 남북은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는 민족문제이면서도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자주’는 베타적인 자주가 아니라 ‘열린 자주’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이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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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15 광복절을 즈음해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한다는 내용이 선언문에 담겼고 실제 8월15일부터 사흘 동안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1985년 이후 15년 만이었다. 남북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도 합의했고, 그해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넘어갔다.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해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합의했다. 별항에는 김 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2007년 10·4정상선언은 8개항으로 구성돼 정치·화해, 평화, 경제협력, 사회문화, 인도 분야 등 40여개 의제를 담았다. 이 중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는 남북 합의사안 중 핵심이었다. 서해에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고,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개발,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추진해 서해를 평화협력지대로 만드는 방안이다. 북방한계선(NLL) 문제 등을 두고 군사적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던 서해를 경제협력의 관점으로 접근해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을 이루겠다는 구상이었다.

남북은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과 한반도 평화 보장을 위한 협력을 명문화했다.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미국 등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는 데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정례화’를 제안했으나 국가 정상 간 이런 선례가 없기 때문에 ‘수시로’ 만나서 현안을 협의한다는 정도로 남북은 합의했다.

10·4정상선언에는 6·15공동선언에 담기지 않았던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한 내용이 포함됐다. ‘남과 북은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공동성명, 2·13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폐기와 관련된 명시적 언급이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반면 당시 북한은 6자회담에 나와 핵폐기와 관련된 조치들을 논의하는 등 비핵화 일정을 밟아가고 있던 상황이라 정상회담에서 이 이상을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지적도 있었다.

10·4정상선언에서 백두산 관광을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키로 합의한 점, 2008년 중국 베이징 올림픽 때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이용해 참가키로 한 점 등도 눈길을 끌었다.

두 차례 남북 정상 합의는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남북은 합의 내용을 실천하기 위해 후속 회담을 진행했으나 북한 핵·미사일 실험 문제 등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3차 회담에서는 경제협력과 관련된 내용보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조치 등이 집중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 두 차례 합의를 계승한다는 의지를 담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3차 정상회담에서는 6·15공동선언과 10·4정상선언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들 합의 사항을 이행한다는 내용이 우선 포함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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