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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이승만과 그 친구들의 타락

2018.04.29 21:25 입력 2018.04.30 08:30 수정
박태균 | 역사학자·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승만은 테러 친화적…북한 공산주의 정권보다 더 낫다 할 수 없다”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촬영일시는 불분명하다.  국가기록원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촬영일시는 불분명하다. 국가기록원

버치 중위가 한국에서 떠나온 지 4년이 지난 1952년 한 한국인이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미국의 이민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전쟁이 진행 중인 한국에서 한국인이 미국에 망명 신청을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남한 정부가 자신을 탄압한다면 북한을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북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정부를 돕고 있는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것이다. 남한 정부가 독재국가라면 인권의 측면에서 망명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만약 망명을 수용한다면 미국이 독재 정부를 도와주고 있는 꼴이 되었다.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⑤이승만과 그 친구들의 타락

미국의 이민국은 한국 상황을 잘 아는 사람에게 자문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 정부와 그 수반을 잘 알고 있는 버치에게 연락이 갔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버치는 서울의 주한미국대사관의 담당자인 킹에게 장문의 답장을 썼다.

나는 3년 동안 이승만과 가깝게 지냈다. 그의 활동을 분석하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예견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이승만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하였다. 미군이 사용하는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지금도 이승만과 함께 살고 있는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인 미시즈(Mrs.) 이(프란체스카 여사)의 가사 도구 구매를 위하여 PX의 특권과 도서관 시설을 제공하였다. (대통령의 원 부인은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필자 주: 버치는 이 편지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를 이승만의 concubine(첩)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승만에게 첫 부인이 있었고, 이혼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와의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대화, 그의 검열된 편지들에 대한 숙독, 그의 과거 경력에 대한 조사, 그리고 그와 함께 지내면서 일했던 사람들로부터의 일반적인 평가 등을 통해 이승만의 성격을 알게 되었다.

망명 피신청자에 대한 불법적, 육체적 폭력의 위험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박사의 성격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박사는 그의 권력을 견제하는 정치적 움직임을 좌절시키는 데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이용하였고, 대한민국의 정부를 사적으로 마음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정부에 대한 철학은 다음과 같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잘 드러난다. 하나는 볼셰비키라는 적에 충성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한국의 정치세력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그와 내가 토론하고 있을 때의 경우인데,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협력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나는 말했고 썼으며 이를 반복했다. 나는 모든 한국인들이 예외없이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

다른 사례는 그의 원칙에 충성한다는 이름 아래에서 그들의 사적인 토굴에서 고문과 살해를 자행하는 대한민족청년동맹에서 일하는 정치적 암살자와 강탈자들로 구성된 이승만의 요원들에 대해 항의했을 때였다. 이 박사는 나에게 답변했다. “당신은 내가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좌파들이다.” (삽입한다면 죽고 강탈당한 많은 사람들은 좌익이 아니었으며, 공산주의라는 야만주의가 더 나쁘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정치적 통찰력을 갖지 못한 문맹의 한국인 농민들을 적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 추종 그룹과 이승만 정부 구성원의 잔인함과 타락 때문이었다. 메리놀 수도회의 캐럴 신부님과 영국 성공회의 세실 코퍼 주교가 이승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성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총으로 쏜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항의했을 때 이승만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다.)(필자 주: 거창 양민학살사건으로 보인다.)

정치적 도구로서의 살인에 대한 용서와 탄압을 위한 적극적인 지시가 이승만의 정책이었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부터 잘 드러난다. 하지 장군 아래에서 군사법정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전문적 살인청부업자이자 강탈자이고 마약업자인 김두한은 감옥에서 나와 이승만에게 갔고 대통령궁 경호실의 높은 지위에 임명되었다. (필자 주: 김두한의 경무대에서의 지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위대한 대중주의자이자 이승만의 경쟁자인 좌파 여운형이 1947년 10월 암살된 것은 이승만과 김구의 모임에서 결정되었다. (필자 주: 1947년 7월의 오기이며, 이승만과 김구가 배후에 있었다는 주장을 정확하게 증명해주는 증거는 어떤 문서에서도 확실하게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사건 3일 전과 암살 다음 날 미군정에 보고했다. 김구의 살인은 이승만에 대한 충성의 열정이 넘치는 육군 중위에 의해 실행되었다.(김구는 진정한 대중적 우익 지도자이고, 앞으로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암살자는 장기간 징역형을 받았는데 실제로 이승만 정부에 보상을 받았으며 소위에서 시작해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그후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존스턴에 의해 목격되었다.) (필자 주: 존스턴은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인터뷰하면서 조선공산당은 한국이 장래 소련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해 물의를 일으켰던 기자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승만의 재정적인 횡령과 관련이 있다. 공산주의와의 선전전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서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2500만엔을 주었다. (민주의원에게 주었고 민주의원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전달했다.) (필자 주: 1945년 당시 100엔은 2006년 가치로 19만엔 정도였다. 2500만엔은 475억엔이고, 1945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 물가 10배 상승, 그리고 민주의원이 조직된 1946년의 인플레이션(1945년의 478%)을 고려하면 약 8억원에서 10억원 상당의 액수로 추정된다. 당시 미군정의 문서는 ‘원’이 아닌 ‘엔’ 단위를 썼다.)

이 돈은 반공 선전전에 사용되지 않았다. 그가 받은 돈은 한국에서 불법적으로 (달러로) 교환하여 미국으로 송금되었고, 선교사 재단이 이용할 수 있는 미국의 선교사 자금이 이승만을 위한 돈으로 사용되었다. 이승만은 고 러치 장군이 이러한 과정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절했고, 그때 나는 공식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필자 주: 이 내용은 첫 번째 연재에서 인용하고 있는 1973년에 작성된 편지 속에서도 연급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의 경제협조처(ECA) 행정관이었던 번스에 의해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의 음모가 밝혀지기도 했다. 그들은 한국을 위한 미국의 부흥원조 자금 중 4000만달러를 해외거주 교포들이 채권으로 구입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미국으로 빼돌렸다. (필자 주: 정확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이승만이 원조 자금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가까운 미국인들을 로비스트로 쓰려 한 증거는 적지 않다. 굿펠로와 밴플리트는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진정한 우익인 김성수와 신익희는 정부로부터 밀려나 있다. 이승만 정부는 테러 친화적 생각을 갖고 있으며, 도덕적인 면에서 북한 공산주의 야만적 정권보다도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 정당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망명을 하고자 했던 사람에게는 사형에 준하는 형이 선고될 것이다.

하지 장군이 떠난 이후 한국에서 일을 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공개적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것은 이승만을 비판하는 그러한 성명이 야만적인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한국 행정부가 이번 경우에 한해 정당하게 법을 적용하겠다고 약속한다 할지라도 한국의 관리들이 미국 정부에 했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던 이전의 사실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버치문서 박스 3)



1952년 한국인의 미 망명 신청 탓
대사관에 보낸 버치의 자문 편지엔
고문·살해를 “애국 행위”라 하고
청부업자 김두한을 비호했으며
공산주의와의 선전전 용도로 준
미군정의 돈 2500만엔을 횡령한
이승만 박사에 대한 비판이 가득

한국을 떠난 이후 썼던 버치의 이러한 편지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결코 이승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그가 한국에서 근무할 때 모아 놓았던 문서들로부터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인 내용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일정한 편견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두한의 활동이나 미국의 원조와 관련된 내용은 더 많은 증거를 통해 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들이기도 하다. 이승만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던 버치를 김규식이나 여운형을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로 평가했다.

날짜 미상의 버치의 메모. 김두한에 대해서 ‘전 XX’라고 적어 놓았다. 나머지 부분은 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독하기 어렵다. 버치의 메모에는 김두한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의 이름과 당시 미군정의 정보기관이었던 CIC 관련 내용들이 많다.

날짜 미상의 버치의 메모. 김두한에 대해서 ‘전 XX’라고 적어 놓았다. 나머지 부분은 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독하기 어렵다. 버치의 메모에는 김두한뿐만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의 이름과 당시 미군정의 정보기관이었던 CIC 관련 내용들이 많다.

당시 경찰이 김두한을 어떻게 비호했는가를 보여주는 문서 중 하나. 그가 청년단을 동원해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많은 음식이 제공되었고, 경찰 간부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 경찰이 김두한을 어떻게 비호했는가를 보여주는 문서 중 하나. 그가 청년단을 동원해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많은 음식이 제공되었고, 경찰 간부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승만이 버치에게 보낸 친필 메모. 4시까지 갈 것이며 장군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승만이 버치에게 보낸 친필 메모. 4시까지 갈 것이며 장군의 배려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편지는 많은 시사점과 함께 의문점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버치는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한국 내에서 보수적인 정치세력들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을 서둘렀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그러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미국의 대표로 한국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는 길에도 그에게 군용기를 제공하였고, 하지 사령관으로 하여금 도쿄로 날아와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친구인 굿펠로가
미군정 고문이 되어 정치공작할 때
늘 그 자리에 동석했던 버치
그는 동업자였을까 감시자였을까
미군정은 왜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이승만을 지원했던 것일까

그리고 1945년 12월 말에는 이승만의 좋은 친구이자 전 전략사무국(OSS) 대령이었던 굿펠로를 미군정의 정치고문으로 초대했다. 신탁통치안에 대한 오보가 발표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미군정이 한국인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기관으로 조직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에 이승만이 대표직을 맡도록 정치공작을 담당했다. 한국에 인맥이 전혀 없는 굿펠로가 정치공작을 하는 데에는 미군정의 배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버치는 굿펠로가 정치공작을 진행하는 대부분의 자리에 동석했다. 동업자였나? 아니면 감시자였나? 그리고 위의 편지에서 나오듯이 적지 않은 돈이 미군정으로부터 민주의원에 지원되었고, 그 돈은 이승만에게 다시 흘러들어갔다. 미군정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그런데 왜 미군정과 이승만의 사이는 나빠졌을까? 언제, 그리고 무엇이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결국 미군정이 추진하여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에 다시 이승만이 취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군정이 마지막에 가서 다시 마음을 바꾸고 이승만에 대해 지원했던 것인가?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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