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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개입 필요한 가정폭력을 개인적 문제 축소…안일한 KBS

2018.05.11 16:32 입력 2018.05.11 17:37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안녕하세요’ 이걸 왜 공영방송에서 봐야 하나

KBS 2TV <안녕하세요>의 진행자들은 사연의 가해자를 비교적 정확하게 비판하지만, 개인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

KBS 2TV <안녕하세요>의 진행자들은 사연의 가해자를 비교적 정확하게 비판하지만, 개인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다.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공영방송 KBS에서 <안녕하세요> 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 것을. ‘대국민 토크쇼’를 표방하며 시청자들의 고민이 담긴 사연에 대해 MC(진행자)와 게스트, 사연의 실제 주인공들이 함께 이야기해보는 콘셉트의 이 토크쇼는 언젠가부터 단순한 고민의 수준을 넘은 폭력적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당장 7일 방영분에선 삼형제를 낳고 넷째까지 임신해 출산일을 한 달 앞둔 여성이 육아뿐 아니라 남편 소유의 가게에서 새벽까지 일을 하는 사연이 소개됐다. 이미 만삭의 몸으로 독박 육아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청자의 분노를 자아낼 만한 이 사연의 주인공은 그저 집에서 아이들만 돌보고 싶다며 남편이 가게 일을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육아를 아내에게 일임하고 본인이 따로 운영하는 푸드트럭 일이 일찍 끝나도 본인의 욱하는 성격을 죽이기 위해 일부러 골프나 볼링 같은 취미 생활을 하고 늦게 들어온다는 남편의 변명을 들으며,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함께 출연한 사연 당사자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선 갈라서라고 하고 싶어요.” 예능 스튜디오보다는 가정법원을 향하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사연이 ‘전국 고민자랑’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되는 것이 <안녕하세요>의 현주소다.

다행히 <안녕하세요>의 MC인 신동엽과 이영자는 해당 사연의 부조리함과 폭력성을 웃음으로 눙치진 않는다. 과거 청소년의 고민을 다룬 SBS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에서 자매들 사이에서 유별나게 차별받는 막내의 ‘현대판 콩쥐’ 사연에서 출연자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던 유재석보단, 피해받은 당사자를 위해 분노해주고 가해자를 향해 쓴소리도 하는 신동엽과 이영자가 좀 더 책임감 있는 진행자다. 하지만 그걸로 된 걸까. 지난주 방영분에선 끔찍할 정도로 주사가 심한 남편을 고발하는 사연이 ‘졸혼할까요’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이영자는 1960~1970년대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된다고 충고하고 제보자의 남편은 금주를 약속했으며, 이번주 방영분에선 실제로 1주일 동안 금주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일말의 공익적 성격이 있을지는 모른다. 피해자들에게 일종의 신문고 역할을 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술에 취해 가구를 부수고, 암 투병하느라 탈모가 생긴 아내의 외모에 대해 폭언을 한 남편의 사연은 졸혼 여부보단 안전 이혼을 고민해야 할 일에 가깝다. 앞서 만삭 제보자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본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가게를 엎기도 할 정도로 욱하는 성미의 남편에 대해 당연히 모두들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영자는 이에 더해 제보자에게도 “본인의 인격과 존재감을 (남편에게) 강조”했어야 했다고 조언했다. 선의인 건 알겠지만 한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가정폭력과 그에 대한 여성들의 합리적 두려움을 떠올린다면 적절하지 못한 조언이다. 남성의 가정 내 주폭이, 여성의 독박 육아와 노동력 착취가, 못된 남편과 아내의 자존감 하락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정의되는 순간 인민재판 같은 방송 분위기와는 별개로 해당 문제들의 공적 심각성은 탈색된다.

[위근우의 리플레이]공적 개입 필요한 가정폭력을 개인적 문제 축소…안일한 KBS

다시 말해 <안녕하세요>는 제보자의 피해 사연을 웃음으로 소비할 정도로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그 폭력의 구조적 속성과 공적 함의를 지우고 소위 ‘사이다’ 같은 호통이나 비난으로 문제의 해결을 대체한다. 물론 이것은 예능이다. 예능에 실질적인 대책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거나 과도한 것일지 모른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번역가 박지훈 시장 퇴출 요청’이 청와대 청원에 올라오는 게 어처구니없는 것처럼, <안녕하세요>에 소개되는 사연의 상당수는 예능에 소개되어선 안될 것들이다. 시민사회의 공적 규범을 강제해야 할 사안에 개인의 개선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다. 가령 지난 2일 KBS <추적 60분>은 데이트폭력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사실 데이트폭력이야말로 몇 년 전만 해도 연인 간에 해결해야 할 사적 영역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공적 문제로 넘어온 대표적인 경우다. 실제로 지난해 8월 <안녕하세요>에선 여자친구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화내고 폭언까지 하는 남성의 사연이 소개되었고, MC 신동엽은 “이미 경미한 데이트폭력”이라고 지적했다. 경미하다는 부연을 붙일 필요는 없었겠지만 적절한 진단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1년 후 자사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사회적 범죄로 지적하게 된 데이트폭력에 대해 예능에서 다루며 가해자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건 안일하고도 안일하다. 첫째 당사자 개인에게도 여전히 실질적 해결이 아니며, 둘째 구조적 문제를 지우고 한 개인의 잘못으로 문제를 축소한다.

예능에서 다룰 수 있는 사안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하는 <안녕하세요>의 문제가 최근 한국 예능 전반에 제기되는 젠더 감수성 부족과 연결되는 건 필연적으로 보인다.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 모두 이성과의 관계를 소유 모델로 인식하는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체계적 특징이다. 즉 이들 폭력이 단지 둘이서 해결해야 할, 잘해야 조언 이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사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것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공사 분류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분류와 인식은 앞서 보았듯 <안녕하세요> 안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29세 여동생에게 집착하고 ‘아기’라고 호칭하는 오빠에게 신동엽은 “어릴 적 하던 소꿉장난을 혼자 계속하는 중”이라고 역시 심리적으로는 꽤 적절한 진단을 내렸지만, 자기 오빠는 무뚝뚝해서 조금은 부럽다는 모모랜드 주이나, 오빠가 문제를 깨달았으니 금방 나아질 거라는 NCT 127 도영의 발언이 더해지며 오빠와 여동생 간의 젠더 불평등과 부조리는 지워진다. 사연의 심각성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다음 날 연예 뉴스에서 ‘고구마 사연’ 정도의 수식으로 반복되는 상황에서, 웃음이 아닌 분노의 양태로 드러날 뿐 각각의 폭력적인 사연들이 얕고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건 매일반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공영방송에서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난 4월, KBS는 지난 몇 년간 정권에 부역하고 공영방송으로서의 경쟁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을 내부 비판하는 특별 프로그램 <끝까지 깐다>를 특별 편성해 자체적으로 개선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KBS 콘텐츠 질적 하락의 책임을 정권 부역의 암흑기에 돌리는 건 오히려 그들의 문제를 축소 및 왜곡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KBS 광고 수익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던 <개그콘서트>가 몰락한 건 풍자에 성역을 둬서가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를 희화화해서인 것처럼, KBS 예능이 권력과 상관없이 사회적 불의에 가담한 건 딱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정권교체 후 새로이 결의를 다진 <추적 60분>에서 데이트폭력을 다룰 때, 같은 방송사의 <안녕하세요>에서 가정폭력에 준하는 문제들을 예능으로 소비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 결의를 신뢰할 수 있을까. 정말로 KBS가 스스로 밝히듯 공영방송으로서 더 나아질 의지가 있다면, 구조적 불의에 동참한 것이 부끄럽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안녕하세요> 폐지는 가장 빠르고 쉽게 KBS에 누적된 콘텐츠 적폐를 개선하는 방법일 것이다. 지금 그 사연들은 예능 스튜디오로 가져와선 안된다고, 법과 시민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말해주는 것이 공영방송의 ‘대국민 토크쇼’가 해야 할 일이다.

[위근우의 리플레이]공적 개입 필요한 가정폭력을 개인적 문제 축소…안일한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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