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인사 팔만대장경

2018.05.11 16:32 입력 2018.05.11 16:39 수정

부처님도 놀랐을 불심…현대 과학자도 놀란 신비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왔다. 여느 해처럼 전국 산사, 도심 곳곳에 연등이 내걸렸다. ‘깨달은 자’의 탄생을 축하하면서다. 또한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의 탐진치(貪瞋癡)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이 깨달음의 지혜를 갈구하면서 내건 등이다. 삶을 맑고 밝고 향기롭게 할 ‘깨달은 자의 말씀’이 유난히 생각나는 때다.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700여년 전 고려시대 당시 동아시아 불교의 고갱이를 하나로 모아 8만1000여장의 목판에 5200여만자를 돋을새김했다. 사진은 해인사 법보전에 있는 국보 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의 모습이다.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700여년 전 고려시대 당시 동아시아 불교의 고갱이를 하나로 모아 8만1000여장의 목판에 5200여만자를 돋을새김했다. 사진은 해인사 법보전에 있는 국보 3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의 모습이다.

우리가 ‘해인사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고려시대 문화유산의 공식 명칭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이다. ‘대장경판’(大藏經板)은 대장경을 새긴 목판(경판)을 말한다. ‘대장경’은 불교의 성전인 ‘삼장’(三藏)을 중심으로 부처의 가르침과 관련된 기록을 총칭하는 용어다. 삼장은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장(經藏), 스님 등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도덕적 규범인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경장과 율장을 포함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논설을 모은 논장(論藏)이다. 여기서 ‘장’(藏)은 ‘그릇’ ‘광주리’란 의미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결국 부처의 가르침과 2000여년 불교 역사의 고갱이가 담긴 그릇이다.

‘몽고 침입을 부처 힘으로 막자’
국론 모으고 불안한 민심 달래

8만1000여개의 경판

대장경을 새겨놓은 경판(이하 팔만대장경)들은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국내외적으로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은 귀중한 문화재다. 지금의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인 1237년부터 1248년에 걸쳐 만들어졌다(1236~1251년에 걸쳐 완성됐다는 유력 학설도 있다. 명확한 문헌기록의 부족으로 제작 시기가 달라진다). 대장경을 목판에 새기는(판각) 작업은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 국가가 나선 국책사업이었다.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라도 막아보자는, 불교 국가인 고려의 간절한 호국사업이다. 또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 불안감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했을 수 있다.

사실 고려시대에 이 팔만대장경이 처음 새겨진 것은 아니다. 이미 200여년 전, 현종 때인 1011년에 첫 대장경 판각이 이뤄졌다. 거란의 침입에 따른 이 대장경 제작은 108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당시 대장경을 ‘초조대장경(판)’이라 부른다. ‘처음으로 새긴 대장경’이란 의미의 초조대장경은 송나라의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초조대장경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든 한문 목판대장경이었다. 고려의 불교 역량이 집결된 초조대장경은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됐다. 하지만 1232년 몽골군의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현재 초조대장경을 종이에 찍어낸 당시 인출본은 매우 귀해 현존하는 유물은 대부분 국보다. ‘초조본 대보적경 권59’(국보 246호)처럼 문화재 명칭에 ‘초조본’이 붙으면 초조대장경 인출본이란 뜻이다.

불경이 새겨진 경판의 세부 모습.

불경이 새겨진 경판의 세부 모습.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이 없어지자 다시 만든 것이다. ‘다시 새긴 대장경’이어서 ‘재조대장경’이라 불린다.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사이에 ‘고려 속장경’도 만들어졌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조성한 것이다. 이 속장경은 초조대장경과 함께 부인사에서 불타버렸다.

팔만대장경 판각 작업은 초조대장경과 송나라·요나라(거란)의 대장경 등을 비교·검토한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 13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이다. 송나라, 요나라 대장경들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팔만대장경은 온전히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대장경이다. 또 5200여만자에 이르는 글자들이 하나같이 일정하게 돋을새김됐다. 특히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 꼼꼼하게 교정까지 본 덕분에 오자·탈자가 적어 내용의 충실함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 물론 목판인쇄사나 불교문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그럼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몇 개나 될까?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사 이후 8만1258판으로 알려져오고 있다. 하지만 2015년 문화재청이 재조사한 결과 8만1352판으로 확인됐다. 알려진 것보다 94판이 많은데 이 중 36판은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때 제작된 경판을 제외할 경우 팔만대장경 경판은 8만1316판이다. 팔만대장경에 일제강점기 경판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려 문화재청은 아직 그 숫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각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 세로 24㎝ 내외다. 두께는 2.6~4㎝이며, 각 판의 무게는 3~4㎏다. 글자는 각 판의 앞뒤 양면에 440자 내외가 새겨졌다. 각 글자의 크기는 가로·세로 1.5㎝ 정도다.

2015년 조사 때 8만1352판 확인
이 중 36판은 일제 때 만들어져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건물들인 ‘장경판전’ 전경. ‘팔만대장경’이 안치된 곳은 길쭉한 건물 왼쪽(법보전)과 오른쪽(수다라장)이다. 그 사이의 작은 건물이 ‘동사간전’(왼쪽)과 ‘서사간전’이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건물들인 ‘장경판전’ 전경. ‘팔만대장경’이 안치된 곳은 길쭉한 건물 왼쪽(법보전)과 오른쪽(수다라장)이다. 그 사이의 작은 건물이 ‘동사간전’(왼쪽)과 ‘서사간전’이다.

신비로운 보존, 그 비결은

팔만대장경 판각은 경남 남해에서 이뤄졌다는 게 주류 학설이다(남해에서 진행됐다는 ‘남해 전담설’, 남해·강화도에서 분담했다는 ‘남해·강화 분담설’, 이외 지역에서도 판각했다는 학설도 있다). 판각된 대장경은 강화도성 서문 밖에 보관됐다가 강화도 선원사를 거쳐 조선 태조 때인 1398년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팔만대장경이 봉안되면서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을 지닌 ‘법보사찰’로 자리매김됐다.

팔만대장경은 지금 해인사 내 ‘장경판전’(藏經板殿)에 보관돼 있다. 가야산 자락 해인사 경내에서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다. 장경판전은 남북 방향으로 세워진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 동서쪽으로 서 있는 작은 규모의 ‘동사간전’ ‘서사간전’ 등 4동의 건물로 구성됐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에는 팔만대장경이, ‘동·서 사간전’에는 경전과 고승들의 저술 등을 새긴 고려시대 다른 목판들이 있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은 조선시대 건축물로 국보 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이 세계문화유산 건축물에 봉안된 것이다.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장경판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세조 때인 1457년, 성종 때인 1488년에 각각 다시 지었고, 광해군 때인 1622년과 인조 때인 1624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서 사간전에 있는 고려목판들도 국보 206호(‘합천 해인사 고려목판’)다. 이들 목판은 대장도감이 아닌 지방 관청이나 사찰에서 판각한 것이다.

장경판전의 과학적인 통풍구조
습도 줄이고 온도 일정하게 유지

팔만대장경은 훼손되기 쉬운 나무로 만든 문화재임에도 불구, 700년이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어떤 과학적 원리가 적용돼 잘 보존되는지는 늘 화제를 모으고, 분석도 많이 나왔다. 그 이유는 경판 자체의 특성, 장경판전 건물의 특성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각 경판의 제작 과정을 보면 훼손을 막기 위한 숨은 노력이 엿보인다. 경판용 목재는 30~50년 자란 나무 중 옹이가 없고 곧은 것이 선택됐다. 나무는 산벚나무가 가장 많고 돌배나무·자작나무·소나무 등 10여종이다. 벌채된 목재는 바닷물에 1~2년 담가놓은 후 경판 크기로 잘랐고, 자른 목판들을 다시 소금물에 삶은 후 건조시켰다. 이런 과정은 병충해, 갈라지거나 비틀어지는 것을 막는다. 경판용 목판이 완성되면 판각하는 각수들은 글자를 한 자 한 자 돋을새김했다. 경판들이 서로 부딪치는 등의 훼손을 막고자 양 끝에 마구리 작업도 했다. 여기에 해충 피해를 막기 위해 옻칠을 하고(경판이 검은색인 이유다) 네 귀퉁이에는 구리판도 장식했다. 비로소 한 장의 경판이 완성된 것이다.

수다라장, 법보전의 구조적 특성 등도 주목된다. 경판 보존을 위해선 무엇보다 통풍이 원활하고, 낮은 습도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게 중요한데 이들 건물은 이를 충족시키고 있다. 온·습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통풍은 전문가들이 놀랄 만큼 자연적으로 이뤄진다. 우선 창문인 살창에 그 원리가 숨어 있다. 수다라장·법보전 건물의 앞면과 뒷면에는 각각 아래위에 창문이 있다. 그런데 앞면과 뒷면의 창문 크기, 한 벽면의 아래와 위의 창문 크기가 모두 다르다. 앞면의 창은 아래가 크고 위가 작으며, 뒷면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이는 건조한 공기가 내부로 쉽게 들어오게 하고, 들어온 공기는 최대한 아래위로 골고루 퍼진 뒤 돌아나가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경판의 모양도 글자가 새겨진 부분이 양쪽 마구리 부분보다 얇다. 경판들을 아래위로 쌓아놓았을 때 공기가 아래위로 흐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즉 창문과 경판 모양은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앞뒤, 아래위로 원활하게 흐르도록 작용한다.

내부 바닥도 의미가 있다. 겉으로 보면 맨흙이지만 그 속에는 숯, 횟가루, 소금, 모래가 쌓였다.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인데, 조선시대 장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건물들의 배치도 통풍의 원활함을 노렸다. 장경판전 건물들은 가야산 중턱인 해발 약 650m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뒤쪽은 막혔고 앞쪽은 해인사 경내를 내려다보며 훤히 뚫렸다. 건물들은 가운데 마당을 두고 마주 보게 배치돼 바람이 자연스레 흐르도록 유도한다. 여기에 건물 형태, 건물 내부의 경판들을 놓은 가구도 아무 장식 없이 매우 단순하다. 경판 보존을 위한 기능만을 최대화시킨 것이다. 현재 문화재청과 합천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보존 비결을 과학적·객관적으로 규명코자 첨단장비를 설치, 조사 중이다.

팔만대장경은 700여년의 시간 동안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훼손될 위기를 여러 번 맞았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맑고 향기로운 깨달음의 지혜가 보다 오래 깊고 넓게 퍼져나가기를 기대하며.

<사진 | 문화재청·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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