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꽃뱀과 예비 강간범…이 시대의 ‘사랑’은 어디로

2018.05.11 16:42 입력 2018.05.11 16:51 수정
필자 안희경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그날 밤, 티라미수 케이크는 달콤했고, 캐모마일 차는 쌉쌀했다. 카페 창밖으로 손님을 싣고 강을 건너려는 택시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선배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며 한층 생기가 돌았다. 일주일 전에 아들의 여자 친구와 함께 아들이 복무하는 부대로 면회를 다녀왔다고 했다. 남친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 남친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새벽길을 나선 스무 살 아가씨가 스스럼없었다고도 했다.

선배는 긴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꼰 다리를 풀고 자세를 낮추었다. ‘아들 앞길 지키기 팁’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아들 친구의 엄마들이 직장맘인 선배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 엄마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강남 거주민으로, 대체로 세상의 부당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다. 그 팁은 대학생 아들의 지갑에 수표를 넣어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들의 ‘원나이트 스탠드’를 양해하겠다는, 그러니 그때 이 수표를 사용하라는 당부의 일환이었다.

나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선배가 덧붙였다. ‘화대’라고. 상대 여성이 강간으로 신고할 때를 대비한 예방이라 했다. 선배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술렁이게 한 청년 여성 이야기를 꺼냈다. 갓 대학생이 된 남성과 성관계를 맺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을 반복했다며, “꽃뱀은 있다”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아들을 둔 엄마들에겐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줄 ‘(대가를 지불한 관계였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청춘이 몸으로 나눈 욕망은 합의였다는 증명이 있어야 하고, 합의가 아니었다면 더더욱 화대를 지불했다는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수표는, 애타는 모정이 못 미더운 아들의 행동에 들어놓는 일종의 부적 같은 보험이었다

내 머릿속에 작은 균열이 생긴 듯했다. 나는 그동안 이렇게 생각했다. 남성은 태어날 때부터 (마치 지구상에서 백인으로 태어난 것처럼) 태생적 권력을 부여받으며, 더 강하고 높은 권력에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기에 여성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여성은 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거리의 폭력, 가정의 폭력에 노출된다. 남성들이 일부 남성의 일일 뿐이라고 남성 전체를 ‘예비 강간범’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말할 때, 이를 기울어진 사회구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어깃장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성들이 ‘예비 꽃뱀’으로 취급받듯이 남성들도 ‘예비 강간범’으로 취급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남성들의 억울함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아들 지갑에 수표를 꽂아주는 모성은 어지간히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에는 의문을 풀어줄 뭔가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열흘 뒤 대구에서 북토크를 할 때였다. 행사 말미에 주제가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면서 뒷줄에 자리한 남성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내 딴에는 남성들이 갖는 난처함도 고려해보자는 의도로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를 옮겼다. 하지만 섣불렀다. 내가 충분히 익히고 고르지 못한 말들은 한 청년 여성의 항의에 직면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성폭력을 고발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 가족, 직장, 인간관계까지 죄다 걸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좌절해야 하는 현실인데 섣불리 거짓 고발을 할 수 있겠냐는 질책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인데, 왜 나는 어설픈 화합을 하겠다고 나서며 현실 속에 엉켜 있는 억압의 구조를 뭉개고 말았을까. ‘예비 강간범’ 프레임과 ‘예비 꽃뱀’ 프레임이 작동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잊고 말았다. 남성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강간범이 되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여성에게는 꽃뱀이 되지 않을 선택권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도처에 만연한 성추행과 성폭행 실태를 발설하는 순간, 여성들은 꽃뱀으로 낙인찍힌다. 성폭력 범죄의 경찰 신고율은 1.9%(2016년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조사)에 불과하다. 2차 피해가 만연하기에 더욱 입을 다문다. (2차 피해율 25%, 2014년 한국 성폭력상담소 발표) 신고됐다 해도 사건의 반은 법정 문턱을 못 넘고 불기소 처분된다. 강간 사건 불구속률 또한 91.6%(2016년 경찰 범죄 통계)이다. 꽃뱀 프레임은 여성에게 법적·사회적 형벌로 작동하며 도리어 가해자를 보호하고 있다.

▶[인터랙티브]세상을 고발한 여성들

안일했던 나를 발견했다. 나 또한 아들의 지갑에 수표를 꽂아주는 엄마들과 한 울타리에 발을 딛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언젠가부터 그토록 흔하던 남성들의 무례와 도발이 나를 비켜 가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연장자의 지위를 누리게 되면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으면서, 여성이기에 받았던 무시와 희롱의 빈도수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돈, 권력, 명예 무엇 하나 소유할 수 없는 사회 초년생에게 집중되는 위협과 모욕은 여전하다. 이런 사회 속에서 청년 여성은 가칠한 ‘미러링’으로 도사릴 수밖에 없다. 지금 나와 또래의 중년 여성들이 누리는 상대적 안전은 어쩌면 우리가 그것들에 저항해왔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지금도 분투하고 있는 청년 여성들의 처절한 저항에 무임승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의 지갑에 수표를 넣어주는 엄마들 역시, 그것이 스스로 만든 지위이든 남편과 공유하는 지위이든, 사회적 취약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젠더 불평등에 대한 감성 또한 사회에 적응한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무감해졌을 것이다.

중산층이 무너지는 양극화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추락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자신이 속한 계층의 사다리 속에 아들까지 안전하게 편입시키려는 우리 세대 중년 여성들의 욕망이, 청년 여성들을 모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갑에 수표를 넣고 다니는 아들은 과연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정작 아들에게 전해야 했던 것은 ‘수표로 된 팁’이 아니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 아니었을까. 지난해, 6학년 아들이 성인 사이트에 접속했던 적이 있었다. 당혹스럽고 두려웠다.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 밤을 지새울 즈음 떠오른 답이 있었다. 2014년 벽두에 교육심리학자인 하워드 가드너를 만나 인터뷰할 때 나눈 이야기였다. 그에게 진짜 교육이 무엇이냐 물었다. 그는 간단히 답했다. 돌아온 답이 성에 차지 않았다. 다중지능이론의 창시자다운 비법을 얻고자 나는 여러 번 돌려 물었으나 진전은 없었다. 그의 대답은 “아이들 주변에 좋은 어른이 많이 있도록 해줘라”였다. 그의 하버드대학교 연구실에서는 그 말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어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고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를. 결국 나 자신이었다. 좋은 학교, 좋은 선생님, 좋은 학원을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 그 상태를 유지하며 아이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흔하디흔한 말이었다고 아쉬워했던 하워드의 부연설명 또한 나의 행동을 의식하게 했다. “아이들은 결코 부모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단 부모의 모습을 관찰할 따름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네가 행복하길 바라’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태도로 산다면, 아이들은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삶으로 보여줘야 하는 길, 어렵고 부담스러운 해결책이다. 그래서 ‘수표’라는 손쉬운 비법이 나온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손쉬운 비법 이전에, 우리가 꿈꾸는 사랑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먼저 아닐까.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상대를 유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귀띔했어야 했다. 정념에 사로잡히면 몸이 마음을 이끌게 마련이다. 우리는 ‘너를 이끄는 욕망 속에, 너의 순정을 함께하도록, 그렇게 사랑을 나눠라’고 조언하는 엄마였어야 했다.

나는 이 시대가 무엇보다 서둘러 복원해야 하는 것이 ‘청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정념이 소멸한 청년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대가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질 때,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가 품은 삶의 가치, 그와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 그리고 저마다의 속사정까지도 이해하려고 마음 쓰게 된다. 그야말로 세상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상대의 사랑이 나에게로도 온다면? 존중받음으로써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스스로의 가치까지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접촉이 가능한 순간이 사랑이다. 삶의 의미는 그 속에서 단단히 엮여진다. 서로가 서로를 기대고 버텨주는 세상살이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 ‘사회’란 오롯이 ‘관계’이다. 따라서 정념이 메마르면 개인이나 사회 모두가 위태롭게 된다. 예비 강간범이나 예비 꽃뱀으로 의심받는 우리는, 서로를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기 전에, 서로가 연대하고 교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그 연대 속에서 모든 약자가 안전할 수 있는 ‘법의 정의’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선배와의 만남 이후 두 달이 지났을 즈음, 미투(MeToo) 운동이 번져나갔다. 지금쯤 그 엄마들도 아들의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가지 않았을까. 그들도 분명 피해여성들의 사연에 분노하고, 별 탈 없이 지나왔구나 여겼던 과거가, 사실은 견디기 위해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쳐놓았던 기억의 왜곡이었음을 마주했을 수도 있기에, 느닷없이 선명해지는 모멸감에 당혹했을 수 있기에. 지난날의 마을과 학교와 회사는 여성의 피와 몸과 감정을 거리낌 없이 조롱했고, 여성의 생각을 성가셔했다. 우리는 여성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여성성을 거세하며 돌파해왔으며, 그 세월 속에서 어쩌면 사회의 오랜 습속을 학습하며 취약한 지위에서 벗어났는지도, 그렇게 우리는 기성세대의 안락함에 안착했는지도 모른다.

아들딸을 위해 ‘나의 신념’쯤은 접어둬야 맞을 것 같은 경쟁시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타인에게 억울함이 남지 않을 선택을 하는 일일 것이다. 나 또한 제대로 된 어른으로 숨 쉬고 있는지 자신이 없다.



[안희경의 일상과의 대화]예비 꽃뱀과 예비 강간범…이 시대의 ‘사랑’은 어디로


▶필자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 불교방송 PD 출신으로 200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서구의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 모색을 소개하는 글을 써왔다. 윌리엄 켄트리지 등을 인터뷰한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2014), 놈 촘스키 등 세계 석학 7인과의 대담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2013),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 지성 11명과의 대담을 엮은 <문명, 그 길을 묻다>(2015) 등을 냈다. 지난해에는 경향신문에 마사 누스바움, 레베카 솔닛 등과의 대담을 기록한 <세계여성지성과의 대화>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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