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강용흘을 아시나요

2018.05.20 21:54 입력 2018.05.20 22:00 수정

미군정청은 이승만보다 장덕수를 더 신뢰했지만

한국인 조언자 “경찰에게 이승만 외 선택지 없어”

강용흘과 버치가 버치의 딸들과 찍은 사진. 버치는 강용흘과의 사이에 오고간 많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강용흘과 버치가 버치의 딸들과 찍은 사진. 버치는 강용흘과의 사이에 오고간 많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2004년 신동아에는 <재미문학가 ‘초당’ 강용흘의 롱아일랜드 변주곡>이라는 논픽션 공모 우수작이 실렸다. 1898년 함경남도 함원에서 태어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강용흘이라는 작가를 대상으로 한 수필이었다. 지금도 생소한 이름인 강용흘은 자신의 삶을 그린 ‘초당’이라는 작품으로 1933년 구겐하임상을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도미 후 보스턴 대학(의학)과 하버드 대학(영문학)에서 수학했다.

강용흘 주장 바탕 ‘번스 보고서’
미군정 시기 다양한 문제 담겨

[박태균의 버치보고서]⑧강용흘을 아시나요

1946년 강용흘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분석관 겸 자문관을 지냈다. 한국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수립된 미군정에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미군정의 경제정책을 자문하고 있었던 아서 번스는 강용흘의 제안을 받아 ‘미군정에 대한 생각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이라는 문서를 제출했다(1947년 9월25일자. 버치문서 박스 1). 이 문서는 김지현씨의 글에서 일부 공개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할 경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외교정책은 무엇인가’라는 보고서의 내용을 수정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1939년 강용흘의 시민권 획득을 위해 상정된 미 하원법안 7127(왼쪽 사진)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명단(오른쪽). <대지>의 작가인 펄벅과 한국에도 번역된 <평생독서계획>의 저자이자 뉴요커의 편집장이었던 패디먼, 저명한 화가 로크웰 켄트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1939년 강용흘의 시민권 획득을 위해 상정된 미 하원법안 7127(왼쪽 사진)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명단(오른쪽). <대지>의 작가인 펄벅과 한국에도 번역된 <평생독서계획>의 저자이자 뉴요커의 편집장이었던 패디먼, 저명한 화가 로크웰 켄트 등의 이름이 눈에 띈다.

이 문서에서 강용흘은 먼저 친일파들을 비판했다.

“일제 협력자들이 주요 산업 장악
독립운동가는 탄압” 친일파 비판

‘생각이 있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비판은 일제하 가장 큰 협력자들이 정부 고위관료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아직도 한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은 미군정 교육부장인 유억겸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일본을 위해 비행기를 만든 사람들이며, 김연수와 신영욱이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적산 은행과 기업들은 극우정치 그룹에 많은 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다 알려져 있는 비밀이다. 일제 시기 가장 큰 친일파들이 이러한 극우정치그룹들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김성수, 이승만을 지원하고 있다. 친일파들은 1943년 11월5일 서울신문(당시에는 매일신보)을 통해서 학생들을 전쟁터로 동원했다. 백낙준은 조지백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을 위해 더 애국적인 연설을 했다. 장덕수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기간 중 가장 애국적인 연설들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이 군정청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인들은 지금 상황이 식민지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그들의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으며, 이것이 테러리스트들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있다. ‘백남운 같은 사람이 감옥에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김성수와 이광수 같은 사람은 모든 특혜를 누리고 있다.’ 군정청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이러한 한국의 사정을 모르는 ‘아마추어들이다. 미국에서 접시닦이였던 사람이 군정의 민정 관리로 일하고 있으며, 미국 대학의 학장이나 지방 목사가 대학총장을 하고 있다. 건축가가 국가식량처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배치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 훌륭한 한국의 소설가 미술가 무용가들이 북으로 가고 있다. 이들은 북에 집이 있거나 공산주의가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다. 북으로 못 간 사람들은 지하에 묻혀 있다. 미국으로 간 몇몇은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다. 예컨대 로디 현으로 알려져 있는 현재명은 훌륭한 연주자가 아니며 과거 일본 히로히토의 군인들을 위해 연주를 했었다.’

강용흘을 소개하는 그의 강연회 책자. 소설 <대지>로 유명한 펄벅이 소개말을 썼다. 그는 1950년대 이후 소설을 쓰면서 강연을 했는데, 1950년대에 했던 한 강연회의 강사 소개 리플릿인 것으로 보인다.

강용흘을 소개하는 그의 강연회 책자. 소설 <대지>로 유명한 펄벅이 소개말을 썼다. 그는 1950년대 이후 소설을 쓰면서 강연을 했는데, 1950년대에 했던 한 강연회의 강사 소개 리플릿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미군정하에서의 상황을 정리한 후 강용흘은 미군정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찰을 꼽았다. 경찰 문제는 이미 1946년 대구를 중심으로 발생한 소위 ‘추수폭동’을 통해서 가시화되었고, 미군정 내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경무부장인) 조병옥은 계속 자리에 두어야 한다. 도둑으로 도둑을 잡는다. 경찰은 혁명적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수도경찰총장) 장택상은 바로 해고해야 한다. 장택상은 이승만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고 있다. 장택상은 암살 이틀 전 여운형에게 지방에 머물 것을 권고했다. 그는 암살 관련 정보를 그 자신의 부하들로부터 얻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여운형이 암살되기 며칠 전 열린 한 회의에서 여운형을 제거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운형은 서울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했고, 여운형은 암살되었다(고인에 대한 편지를 여운형의 딸에게 전달한 것은 김구가 아니라 이승만이었다).’

강용흘은 해방정국에서의 암살 사건에 경찰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했다.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이들을 모두 배후에 있었다는 혐의로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이승만이 갖고 있는 시나리오와 여운형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언급했다.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실패하고 전쟁이 일어나서 미국이 승리하면 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민주당이 집권하면 히틀러하의 독일이나 무솔리니하의 이탈리아처럼 될 것이다. 여운형의 죽음은 한국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김구와 이승만이 집권한다면 한국은 혼돈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총통(Feuhrer)이 될 것이다.’

강용흘의 주장을 바탕으로 한 번스의 보고서 내용은 미군정 시기의 다양한 문제를 담고 있다. 요약된 부분의 뒤에는 앞으로 미군정이 추진해야 할 정책 제언이 담겨 있다. 그런데 위 보고서에서 주목되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친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경찰에 대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 시기 주요 정치인의 암살 사건과 관련된 부분이다.

실상 이 두 문제는 이승만이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가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암살 사건과 관련해서 누가 죽였는가는 사건 직후에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련자들은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것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죽음으로써 초래된 상황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주요 지도자들이 암살당한 이후 과연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지도자가 있었을까? 미군정은 김규식이 여운형 없이 단독으로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1947년 3월29일 번스가 웨컬링 준장에게 보낸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 문제’ 버치 문서 박스 3).

물론 이들 외에도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당시 돈과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지도자가 누구인가였다. 일단 친일 잔재 청산을 주장했던 정치인들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친일 경력으로 인해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었던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군정의 환대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 주었다. 다음과 같은 한 한국인의 말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이 해방되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승만을 보았고, 그가 군정에 의해 잘 대우받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박사가 즉각적인 정부 수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고, 그에게 100만엔을 주었다. 영수증도 없었고 감사의 말도 없었다. 내가 어떻게 느끼겠는가? 나는 멍청했다. 그의 최고의 약점은 다른 동료들과 협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게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하지는 못한다. 그는 매우 외로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반쯤 최면에 걸린(semi-hypnotized) 사람들은 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그에게 기꺼이 이끌렸다. 그가 지금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그의 능력 때문도 아니고, 그가 성취한 것 때문도 아니다. 단지 지금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1947년 8월4일 정치고문단의 D C 유스가 작성한 ‘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배경: 그의 현재 상태의 원인과 이유’, 버치 문서 박스 3)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은 경찰
친일 행적 덮을 ‘보호막’ 필요
여운형 등 죽음 조사 철저히 안 해
이승만 정권 수립에 중요한 배경

미군정이 영원히 38선 이남을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 협조했던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보호막이 필요했다. 어쩌면 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그 보호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던 송진우는 1945년 12월 암살되었고, 그나마 한국민주당 내에는 원세훈이나 김약수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의 불의의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 즉 전범들에게 안전한 우산이 되기는 어려웠다.

1958년 강용흘이 버치에게 보낸 편지. 두 사람은 미국에서도 계속 접촉했다.

1958년 강용흘이 버치에게 보낸 편지. 두 사람은 미국에서도 계속 접촉했다.

강용흘이 이승만과 김구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했지만, 김구는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친일과 전범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김구는 철저하게 잔재를 청산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는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였던 장덕수였다. 특히 장덕수의 경우 강용흘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제국에 협력한 경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굳건한 대안이 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미군정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반면 장덕수는 송진우처럼 미군정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느 친일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언변과 영어실력, 그리고 서구적 매너를 갖춘 인물이었다. 미군정의 눈에는 매우 합리적 사고를 가진 보수적이며 친미적 지도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 정부는 38선 이남에서의 선거를 통해 남쪽에서만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미군정은 장덕수에게 정치적 주도권을 주고 싶었다. 장덕수가 이승만만큼 알려진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최고지도자로 내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가 수석총무로 있었던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내각책임제 정부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민족반역자이면서 전쟁범죄자였던 이들이 정말 원한다면, 이승만은 내각책임제하에서 힘빠진 바지저고리 대통령에 앉히면 되었다. 이승만이 그것을 받아들였을지는 모르지만. 미군정은 이승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에서 내각책임제가 아닌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체제로 대한민국 정부가 시작된 것일까?

필자 박태균 교수

‘버치 보고서’를 발굴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현대사 전문가다. 1966년생으로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 국제한국학센터 소장을 지냈다.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의 자문을 맡고, CBS 라디오 <박태균의 한국사>를 진행했다. 2015년에는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에서 40회에 걸쳐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주요 담론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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