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를 살린 백인 변호사, 남아공 헌법재판소 ‘주춧돌’ 놓다

2018.06.29 17:19 입력 2018.06.30 12:24 수정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액트 오브 디파이언스’(감독 얀 반 데 벨데, 2017년 남아공·네덜란드)

영화 <액트 오브 디파이언스>에서 브람 피셔 변호사가 리보니아 사건으로 기소된 넬슨 만델라를 찾아가 재판 전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훗날 만델라는 피셔를 두고 “위대한 변호사이자 위대한 애국자”라고 했다. 퍼스트런 제공

영화 <액트 오브 디파이언스>에서 브람 피셔 변호사가 리보니아 사건으로 기소된 넬슨 만델라를 찾아가 재판 전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훗날 만델라는 피셔를 두고 “위대한 변호사이자 위대한 애국자”라고 했다. 퍼스트런 제공

지하 게릴라인 동시에 변호사 보어인 브람 피셔 일대기 다뤄
1964년 리보니아 재판 변론 후 종신형 선고받고 1975년 ‘옥사’

남아공의 혁명가 넬슨 만델라가 1963년 리보니아 사건으로 법정에 선다. 요하네스버그 인근 리보니아의 한 농장에서 만델라가 주도하는 무장혁명단체 ‘국민의 창’ 조직원들이 체포되고, 조직 리더인 만델라도 기소된다.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I am prepared to die)”로 끝나는 3시간에 이르는 20세기 최고의 연설을 만델라가 남긴 자리도 리보니아 법정이다.

리보니아 재판의 변호사가 브람 피셔이고, 영화 <액트 오브 디파이언스> 주인공이다. 지난해 남아공에서 개봉한 제목은 <브람 피셔>다. 남아공에는 입법수도, 행정수도, 사법수도가 있는데, 사법수도 블룸폰테인의 공항이 브람 피셔 국제공항이다.

기소 이듬해인 1964년 만델라를 비롯한 조직원 8명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인 이 종신형을 영화는 성공적인 결과로 그리는데 이유는 사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역사적으로는 종신형이 선고된 이후 만델라의 옥중투쟁이 시작되지만 <액트 오브 디파이언스> 주인공은 브람 피셔이기 때문이다. 사실 피셔는 그 자신이 조직원이다. 활동이 금지된 지하 공산당원이고 리보니아 사건에도 관여돼 있다. 회유당한 증인을 가짜 증명서를 만들어 도피시키고 무장세력과도 접선한다. 결국에는 리보니아 재판이 끝나고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만델라는 1990년 석방돼 1994년 대통령이 되지만, 피셔는 1975년 이미 옥사한 뒤였다.

재판에서 넬슨 만델라는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퍼스트런 제공

재판에서 넬슨 만델라는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퍼스트런 제공

브람 피셔는 보어계 백인, 즉 네덜란드인의 후손이다. 네덜란드인이 케이프타운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이곳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1652년이다. 그러다 영국이 네덜란드를 해상에서 제압하면서 1814년 케이프타운도 영국령이 된다. 영국이 케이프타운의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노예해방에 반대하는 보어인들은 1836년 남아공 내륙으로 대이동을 시작한다. 보어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이고, 이들이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이유다. 이곳에서 보어인은 두 공화국을 세우고 아프리카 토착민을 노예처럼 부린다. 그러다 다이아몬드와 금광이 발견된다. 이에 영국은 두 공화국에 전쟁을 벌여 1902년 식민지로 만들고 1910년 영연방으로 독립시킨다. 그리고 보어계가 1948년 정권을 잡아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공식화한다. 백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영국계와 보어계가 다르지 않았다.

만델라 자신이 변호사이지만 리보니아 재판에서는 피셔와 입장이 다르다. 피셔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형만은 막으려 하지만, 만델라는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부각하려 한다. 만델라와 함께 기소된 조직원들은 재판을 앞두고 “당당하게 진실을 밝히고 싶다”고 피셔에게 말한다. 이들은 “불의와 비인간적인 정권을 타도할 계획이었다, 정권을 파괴하려 군사행동에 가담했다고 말하자”고 주장한다. 만델라는 “우리는 죄가 없다. 이건 재판이 아니라 정치적인 대결이다. 차라리 저항하자. 저항해서 무죄를 주장하자. 우리가 정부를 기소하자”고 한다. 결국 만델라에게든, 피셔에게든 남아공의 법률과 법정은 정의롭지 않으며 투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브람 피셔는 남아공 백인 중에서도 특별한 배경을 가졌다. 할아버지는 영국 식민지 시절 총리를 지냈고, 아버지는 법원장이었다. 피셔 자신도 로즈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로즈장학금은 미국 연방대법관 바이런 화이트와 데이비드 수터,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풀 브라이트 장학금의 설립자 윌리엄 풀브라이트 미국 상원의원도 받은 바 있다.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남아공으로 돌아간 피셔는 남아공공산당(SACP)에 가입한다.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가까운 단체다.

그런 피셔이지만 만델라를 변론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피셔는 리보니아 모임의 멤버였다. 이 때문에 피셔는 검찰이 데려온 증인의 거짓말을 몰아붙이지 못하고 결정적인 대목에서 멈춘다. 이들이 리보니아에 드나들던 피셔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도 밤에는 조직 활동을, 낮에는 변론을 이어가다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브람 피셔와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혁명가들이 갇혀 있던 요하네스버그 형무소 자리에 현재 남아공 헌법재판소가 들어서 있다. 1995년 개소한 남아공 헌재는 새로운 청사를 지으면서 과거 형무소 건물의 벽돌을 이용했다. 민주화 10주년인 2004년에 완성된 헌법의 언덕(Constitution Hill)에는 재판소와 형무소 터, 박물관 등이 모여 있다. 남아공 헌재는 부당한 법률을 거부하고 맞서 싸워온 투쟁의 역사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남아공 헌법재판소 청사보다 아름다운 것이 1997년 탄생한 남아공 헌법이다. 세계 헌정사에 유례가 없는 진보적이고 완결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으며, 제정 과정에 유럽의 베니스위원회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다.

1997년 탄생한 남아공 헌법 차별금지 조항만 16가지 예시
세계 헌정사에 유례없는 진보적 헌재 재판관들도 적극적 판단

차별금지 조항을 보면 16가지를 예시로 규정해 ‘인종, 사회적 성(gender), 생물학적 성(sex), 임신, 혼인 여부, 인종적·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취향, 나이, 장애, 종교, 양심, 믿음, 문화, 언어, 태생’을 밝혀놓았다. 이에 비해 한국 헌법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3가지만 규정해 놓았다. 물론 최종적으로 어떤 차별을 금지할지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렇게 세분화한 차별금지 조항은 헌재가 적극적으로 평등권을 해석하게 만든다. 실제로 남아공은 차별금지 조항을 바탕으로 남성 간의 합의된 성관계를 처벌하는 법률에 위헌을 결정하고, 동성 간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위헌으로 판단했다. 반면 표현의 자유 조항에서는 예외를 명시했다. 인종·성별·종교에 기반해 위해를 가하려는 혐오적인 표현, 전쟁선동, 즉각적인 폭력 자극 등이다.

과거 남아공의 인종차별은 법률에 근거했다. 한국의 군사독재도, 나치독일의 폭압정치도 모두 법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런 정의롭지 못한 법률들에 저항하던 브람 피셔와 같은 이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이 나라들은 모두 새롭게 헌재를 만들었다. 기존 법원은 헌법에 따라 위헌이 선언되어야 할 법률로 시민을 탄압하면서 독재에 부역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헌법이 있어도 헌재가 작동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남아공 헌법이 평가받는 것은 남아공 헌재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한국의 낡은 헌법이 버티는 것도 헌재의 역할에 힘입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헌재의 힘은 누가 재판관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남아공이 일찍부터 민주화됐다면 브람 피셔는 헌법재판관에 취임했을 것이다. 실제로 1995년 넬슨 만델라가 임명한 재판관 상당수가 부당한 법률에 저항해온 법률가들이다. 알비 삭스는 반정부 활동을 이유로 두 차례의 감금을 거쳐 해외로 추방됐다. 외국으로 나가서도 남아공의 차별에 반대 활동을 했고, 남아공 정부는 그의 차에 폭탄을 설치해 한쪽 팔과 눈을 빼앗았다. 판사 출신인 리처드 골드스톤도 인종차별 근거법률을 사실상 폐지하는 판결을 해왔다. 백인만 거주와 영업이 가능한 지역에 백인이 아닌 사람이 자리 잡아도 곧바로 처벌되는 것은 아니라는 1982년 판결이 유명하다. 이 결정으로 인종별 거주지구를 규정한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은 사실상 효력을 잃는다.

10년간 보수 눈치 본 한국 헌재 정권 바뀌니 진보적 결정 내놔
관료법관의 무덤으로 변해가

남아공 헌재는 개소 직후인 1995년 사형제도가 위헌이라고 판단한다. 만델라의 사형을 막으려 피셔가 사력을 다한 리보니아 사건 이후 30여년 만이다. “우분투(아프리카 전통의 도덕적 가치로 인간다움이라고도 번역)에 걸맞은 사회가 되려면 단순히 보복을 위해 범죄자들을 살해하는 사회가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우리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생각해본다. 최근 10여년 헌재는 침체 상태다. 어설픈 논리로 보수적인 정권을 추종하니 변호사들도 사건을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자 헌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진보적인 결정을 내놓고 있다. 헌법재판은 다수결의 성마름을 넘어서 불변의 올바름을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 헌재는 다수결로 선출된 정권을 추종하는 관료법관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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