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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불법촬영 규탄' 시위 최대 인원 운집

2018.08.04 19:42 입력 2018.08.05 02:07 수정

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렸다. 선명수 기자

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렸다. 선명수 기자

“우리의 고통과 절망은 남성을 위한 포르노가 아니다.”

한낮 최고기온이 34.9도까지 오른 4일 서울 도심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열렸다. 지난달 7일 3차 시위 이후 약 한 달여 만에 열린 이번 시위는 처음으로 서울 혜화역이 아니라 광화문광장에서 진행됐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아스팔트에 햇볕마저 강하게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광장은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을 촉구하는 여성들로 ‘빨간 물결’을 이뤘다.

여성 커뮤니티인 다음 카페 ‘불편한 용기’는 이날 오후 4시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를 열었다. 주최 측은 이날 오후 5시30분쯤 시위 참가자가 4만5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집계한 데 이어 최종적으로 7만여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여성만 참가한 시위이자 여성 의제로 열린 시위로 사상 최대 인원이 운집했다. 경찰은 이날 집회의 안전 관리만 하고 인원 추산은 별도로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제까지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는 주최 측 추산으로 1차 시위 1만5000여명(5월19일), 2차 시위 4만5000여명(6월9일), 3차 시위 6만여명(7월7일)에 이어 현재까지 연인원 19만여명이 참여했다. 광화문역 9번 출구부터 집회 장소로 입장하기 위한 긴 줄이 이어졌고, 부산·대전·광주·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대절 버스를 타고 상경한 참가자들이 광장에 속속 모여 들었다.

참가자들은 붉은 옷을 입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각자 준비한 손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석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한국 여잔 죽어 몰카를 남긴다’ ’당신들의 일상을 왜 우린 싸워서 얻어야 해?’ ‘노예가 될 바에는 차라리 반역자가 되겠다’ ‘찍지마 올리지마 보지마’ 등이 쓰인 손팻말부터 ‘My life is not your porn(나의 삶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등 불법촬영 문제를 외신에 알리기 위한 영어 팻말도 여럿 등장했다.

이날 시위에서도 지난 2, 3차 시위와 마찬가지로 삭발식이 진행됐다. 5명의 여성이 단상에 올라 차례로 머리카락을 잘랐고, 그때마다 참가자들은 ‘상여자’라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 선명수 기자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삭발식을 진행하고 있다. 선명수 기자

삭발식에 참여한 한 참가자는 “불법촬영은 나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일상이었고 마시는 물처럼 익숙한 존재였다”면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신고도 해보고 청원도 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외국 서버라 수사가 힘들다’는 것이었고, 그러는 사이 사회가 외면한 피해자들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구나 체념하고 있을 때 홍대 몰카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가겠지 생각했지만 수사는 신속하게 이뤄졌고 경찰은 유포자를 검거했다”며 “대한민국 경찰에게 묻고 싶다. 그동안 여성 피해자들이 구속수사 해 달라, 압수수색 해 달라 애원하고 외쳤던 것들이 왜 남성 피해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왜 할 수 있었으면서 못 한다고 했나. 왜 같은 사람이면서 인간 취급해주지 않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참가자는 “우리의 저항은 남성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창 끝이 아니다. 그저 모든 남성들이 이제껏 당연히 누려왔던 것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런 요구를 계속해서 묵살한다면 화장실 (몰래카메라) 구멍을 향한 여성들의 송곳은 곧 당신들을 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발언이 끝나자 참가자들의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삭발식에 참가한 또 다른 여성은 “불법촬영물 헤비 업로더에게 벌금 5만원을 물리는 나라가 ‘몰카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국 여성의 생존권은 5만원 이하란 얘기냐”면서 “한국이 ‘몰카국’이라고 (여성들이) 퍼뜨리는 것이 나라 망신이 아니라, 한국이 몰카국인 사실 자체가 나라 망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초소형 카메라를 규제해 여성들이 (몰래카메라를 찾기 위해) 안 써도 되는 돈을 쓰게 하지 말라”면서 “여자 죽여서 살린 경제는 반드시 여자 손으로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선명수 기자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선명수 기자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선명수 기자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선명수 기자

이날 참가자들은 ‘불편한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성차별 사법 불평등 중단하라’ ‘불법촬영, 찍는 놈도 올린 놈도 파는 놈도 보는 놈도 구속수사 엄중처벌 촉구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자칭 페미 문재인은 응답하라’ ‘페미 공약 걸어놓고 나몰라라’ ‘촛불시위 혁명이고 여성시위 원한이냐’ 등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구호도 나왔다.

다만 지난 집회에서 나왔던 ‘문재인 재기해’ 등의 구호는 이날 나오지 않았다. ‘재기하다’는 2013년 마포대교에서 투신 퍼포먼스를 벌이다 숨진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를 빗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의미의 온라인상의 비속어다. 시위 주최 측도 지난 2일 카페를 통해 “원색적인 조롱, 인격모독, 이미지를 통해 특정인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는 피켓”은 제지하거나 압수할 수 있다고 공지했다. 이후에도 “불법촬영 편파 수사와 관련한 정부 비판은 전혀 문제되지 않으나, 비난과 조롱은 삼가자”라고 알렸다.

주최 측은 이날 4차 성명서를 통해 “‘페미니스트 남대통령’ 문재인은 (편파 수사가 없었다는) 경솔한 발언을 아직도 사과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한민국 모든 여성시민에게 정중히 사과하라”면서 “노력하겠다는 말은 권력을 이양받은 정부가 사용해야 할 언어가 아니며 지금은 노력할 때가 아니라 마땅히 일을 해야 할 때다. 시민다운 남성 시민을 길러내길 실패한 정부와 사회는 책임을 통감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날 시위 주최 측은 참가자들에게 냉수를 나눠주고 응급 처치 부스를 차리는 등 폭염에 따른 응급 상황에 대비했다.

지난 3일 취임 이후 첫 외부 일정으로 혜화역을 찾아 불법촬영 근절 캠페인을 벌였던 민갑룡 경찰청장은 이날 비공식 일정으로 광화문광장을 찾아 집회를 지켜봤다. 주최 측이 집회 참가를 여성으로 제한함에 따라 민 청장은 광화문광장 건너편 인도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경찰은 광장 주변에 경력을 배치하고 펜스를 쳐 남성의 입장이나 촬영 시도를 막는 등 충돌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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