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평화, 강자의 양보로 가능하다

2018.08.09 20:39 입력 2018.08.09 20:40 수정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벽에 부딪혔다. 올해 벽두부터 숨 가쁘게 달려왔던 변화가 교착상태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70년 고착된 분단의 갈등체제를 감안하면 난항은 당연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움까지 감추기는 힘들다. 2013년 이래 수년간 악화일로의 전쟁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전격성만큼 엄청난 기대를 주었고, 전쟁위기는 평화의 소중함을 배가시켰다. 북·미의 두 정상도 싱가포르 조우가 가진 역사의 무게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게임을 했다. 반세기 이상 묵은 불신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신뢰관계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한 이상 상호신뢰 없는 비핵화는 불가능하다. 핵무기 완성 이전에는 대북 불신 속에서도 핵사찰로 비핵화를 검증할 방법이 있었지만, 완성 이후에는 신뢰만이 비핵화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동칼럼]진정한 평화, 강자의 양보로 가능하다

돌아보면 ‘새판 짜기’에 대한 헤드라인만 제시됐을 뿐인데 양국은 너무 낙관적이었던 같다. 정상회담에서 구체적 실천사항 합의는 미군유해 송환 외엔 없었고, 고위급회담으로 미뤄졌었다. 하지만 김영철과 폼페이오의 만남에서도 상대의 양보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자국의 양보에 대한 과대평가로 말미암아 빈손으로 끝나버렸다.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 모라토리엄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단행했고, 유해 송환과 동창리 미사일실험장 폐쇄를 실행했으므로 미국이 양보할 차례라고 보지만, 미국은 한·미 군사훈련 취소는 물론이고, 세계최강의 패권국이 북한 정상을 만나준 것 자체가 엄청난 양보이며, 북한의 조치들은 미흡하며 전혀 등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교착이 성공을 위한 진통일 수도 있으나 오랜 불신구조의 관성으로 인해 실패의 수렁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 미국은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를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부재로 몰고, 북한은 미국의 종전선언 거부를 체제보장 약속에 대한 불신으로 몰면서 지난 사반세기의 실패 구도로 복원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구조상 김정은 체제는 미국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트럼프는 북한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다. 북한으로서는 트럼프의 결심으로 가능한 몇 안되는 조치인 종전선언마저 얻어낼 수 없다면 제재해제는 꿈도 꿀 수 없고, 용어만 사용하지 않았을 뿐 리비아모델과 다름없다고 여길 수 있다.

트럼프는 9개월 이상 북한의 도발 중단과 유해 송환을 업적으로 내세우는 동시에,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에 단호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내 비판을 피해가는 방식으로 중간선거까지 끌고 갈 심산인 것 같다. 중국도 미국의 군사공격 가능성이 없어지고, 북·중관계가 회복된 국면에서 서두를 이유가 없다. 급해진 것은 다시 남북이다. 판문점에서 종전선언의 연내 실현에 합의했을 뿐 아니라, 중간선거 이후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중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으며, 선거 후 미국의 국내정치에 따라 장기 교착 또는 파국을 배제할 수 없다.

미사용 카드가 남아있다. 북·미 고위급회담이 풀지 못한 것은 다시 정상의 결단으로 풀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순서는 북한의 요구대로, 비핵화조치의 규모는 미국의 요구대로 맞교환하는 방식, 즉 종전선언이 먼저 나오되, 거의 동시적으로 북한은 검증과 사찰 및 핵무기 일부 폐기를 포함한 과감한 선제조치를 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결심에 달렸다. 트럼프에 과도한 의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설득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미국의 벽을 넘어야 풀린다.

‘진정한 평화는 강자의 양보로만 가능하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통일이 평화로만 느껴지지 않았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지만 초등학교 교실의 환경미화로 항상 붙어있던 남북군사력비교표, 숫자상 압도적이었던 북한의 무기들을 보며 적화통일의 위협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보다 수십배의 국력을 갖게 된 후, 통일은 아마도 북한에 위협적이었을 거다. 보수정부는 대놓고 흡수통일을, 진보정부는 개방·개혁으로 포장했지만, 위협은 같다. 비핵화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북한에 위협이 되는 비핵화는 실패한다. 약자에 대한 일방적 항복요구는 북한이 핵개발에 집착했던 이유만 재생시킬 뿐이다. 김정은의 비핵화 결심을 실현하는 건 ‘진정성’이란 신기루에 매달리기보다는, 비핵화를 유도해 낼 교환에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강자의 항복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위협을 제거하는 교환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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