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한 생활

2018.08.27 20:30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읽던 책을 지하철에 두고 내린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책을 읽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내려야 할 역이었다. 얼른 가방을 챙기고 문이 닫히기 전에 지하철 밖으로 나왔다. 간발의 차로 해냈다며 쾌재를 불렀다. 때마침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나 자신이 조금 대견하기도 했다.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방을 챙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읽던 책을 앉아 있던 곳에 그대로 놔둔 것이다.

[직설]천천한 생활

친구에게 전해줄 선물은 카페에 두고 나왔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부랴부랴 자리를 뜨다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돌아간 카페에서는 분실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아끼던 볼펜을 분명 테이블 위에 두었는데, 그 테이블이 어떤 테이블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은 일이 많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날이었다. 테이블이 있던 장소를 헤아리다 이내 포기했다. 잃어버린 날이 그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산과 칫솔과 신용카드를, 자주 메고 다니는 에코백을, 에코백 안에 들어 있던 자잘한 물건들을 죄다 잃어버린 날도 있었다. 저것들을 다 다른 장소에서 분실했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넋이 빠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사소한 것들이라 다행이네”라고 친구가 위로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소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손때가 많이 묻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주말에는 약속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약속 날짜를 달력에 표기할 때 실수를 했던 것이다. 다음 주를 다음 달로 알아들은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실 주간’이라고 웃으며 넘기려 애썼지만, 뒷맛은 내내 씁쓸하기만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는데,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때마침 코피가 터졌다. 이번 주에만 세 번째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들을 되찾거나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 국면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속도와 완결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껏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그것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해주었을 테지만, 저지른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태도를 심어주기도 했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긍정은 일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여러 개의 일들을 수행해가면서 몸은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 잘했다는 칭찬과 잘하고 있다는 믿음이 심신의 건강까지 책임지지는 못한다.

“잘했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맡은 일을 더 잘하고 싶었다.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더 잘하기 위해 몸을 혹사시켰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매번 실수가 발견되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나 “이건 실수도 아니야”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쉬 내려가지 않았다.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에 대해 자책하는 시간은 길고도 짙었다. 언제인가부터 밤은 늘 후회하는 시간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했다. 외출을 하려고 짐을 챙기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말했다. “천천히 해.” 그 말을 듣는데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어깨에 놓인 보이지 않는 짐들이, 머릿속의 복잡한 상념들이, 나를 혹사시키곤 하던 쓸데없는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신속 정확한 게 중요하다고 믿었던 그동안의 내 모습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거기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잘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천천히 해”라고 말한다. “잘할 수 있어”라는 말 대신 “천천히 하면 될 거야”라고 말한다. 천천한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시야가 넓어졌다. 주위를 둘러볼 시간과 돌볼 여유가 생긴 느낌도 들었다. 농담을 던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다. 거짓말처럼 코피도 멎었다.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걷게 되니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속도와 완결성의 끝을 생각한다. 속도의 끝에는 머무름이 있을 것이다. 완벽함의 끝에는 여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무르고 비우는 일은, 다름 아닌 천천함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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