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간다” 알려도 늑장…현재 ‘민원 시스템’으론 사고 되풀이

2018.09.10 20:52 입력 2018.09.10 20:53 수정

‘흙막이 붕괴’ 피해 입은 유치원·아파트, 위험 미리 전했지만

관할 구 공무원, 문제 생기면 책임지는 구조에 소극적 대응

“주민 안전 부문, 전문 점검 조직 꾸리고 현장 체제로 바꿔야”

<b>유치원 파손 부분 철거 마무리</b> 인근 공사장의 흙막이가 붕괴되면서 건물이 기울어진 서울 동작구 상도유치원에서 사고 닷새째인 10일 파손된 부분의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유치원 파손 부분 철거 마무리 인근 공사장의 흙막이가 붕괴되면서 건물이 기울어진 서울 동작구 상도유치원에서 사고 닷새째인 10일 파손된 부분의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최근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와 동작구의 유치원에서 잇달아 일어난 흙막이 붕괴 사고는 ‘예고된 인재’였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공사장 주변 주민들과 시설 관계자들은 사고 전 징후를 눈치채고 위험성을 관할 구청에 알렸다. 하지만 적절한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민원 처리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반복될 사고”라고 지적한다.

지난 6일 밤 인근 공사장 옹벽이 무너지면서 주저앉은 상도유치원 붕괴 사고는 5개월 전부터 위험이 감지됐다. 옹벽 위 세워진 유치원 바로 아래 46가구 규모 빌라 공사가 결정되자 유치원 측은 3월 자체 조사를 의뢰했다. “위험한 공사”라는 결론이 나왔다. “옹벽 위 세워진 건물 하중을 고려해 안전한 공법으로 시행돼야 한다”는 진단도 나왔다.

유치원 측 전달을 받은 동작구는 “공법 변경은 시공사가 할 일”이라며 정밀 점검은 하지 않았다. 이후 공사가 시작되고 유치원 외벽 등에 균열이 생겼지만 역시 구청에서는 점검에 나서지 않았다. 사고 발생 전날 5일 유치원 측은 “유치원 옹벽 아래 터파기 공사 중 유치원 구조물에 이상이 생겨 안전진단을 의뢰했다”며 “그 결과 정밀 안전진단이 시급하고 보완대책 마련 전까지 공사 진행은 위급하다”는 내용의 긴급 공문을 보냈지만, 현장에 나선 구청 직원은 없었다. 공문이 전달된 날에도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등·하원했고, 몇 시간 뒤 옹벽이 무너졌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한 아파트의 지상주차장이 무너져 내린 것도 인근 오피스텔 공사장 흙막이 붕괴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문제는 사고 발생 전인 지난달 22일부터 주차장 지반이 갈라지고 침하 우려가 있다며 ‘위험요소 파악 및 공사 중단 요청’ 민원을 관할 구청에 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청은 적절한 대응을 않고 일을 미뤘다.

흙막이와 옹벽은 건물을 높이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터파기’ 공사 중 주변 흙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임시 구조물이다. 흙막이가 무너지면 인근 건축물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터파기 공사로 불안감을 느낀 시민들이 관할 구청에 민원을 넣어 공사 중단이나 점검을 요청하지만 “담당이 아니다”라거나 “시공사에 전달하겠다”는 소극적인 답변만 듣게 된다.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전수조사’ 등 늑장 조치가 이어진다. 서울시교육청은 10일 학교 주변 공사장 전수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늑장 대처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상도유치원 측 의뢰를 받고 안전평가를 했던 이수곤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라며 “이번 두 차례의 사고는 현재 시스템에선 민원을 제기해도 아무것도 해결될 게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셀 수 없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성 없는 소수의 공무원들이 수십, 수백 건의 공사를 검토할 때 안전성을 최우선에 두고 인허가를 내주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지금은 서류만 내면 100% 허가가 나온다. 전수조사를 해도 변하는 건 없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민원이 들어와도 현장에 나가볼 시간도 없고, 나가도 뭐가 문제인지 알지 못한다”며 “또 인허가를 내주기 전에 문제를 파악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현장 점검을 나가면 책임을 져야 하니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현재 민원 체계는 근본적으로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라고 비판했다.

주민들의 민원에도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안전한국’을 외치던 정부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허울뿐인 민원 처리 시스템을 현실성 있게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류만 보고 외부 업체 등에 일을 미루는 행정 처리 대신, 주민 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설 등 부분에는 ‘출동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종국 경실련 시민안전감시위원장은 “흙막이는 임시 시설이라 본 건물이 올라가면 철거해야 하기 때문에 시공 업체에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며 “관할 기관에서 더 엄격하게 살펴야 하는데 지금은 서류를 내면 도장만 찍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집중호우 등 기후가 바뀌고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고 있어 관할 기관의 꼼꼼한 점검과 현장 검사가 필요하다”며 “우기·해빙기나 지하철 인근 등 위험 시기 또는 지역에 대해선 반드시 현장 실사, 현장을 점검할 수 있는 전문적인 점검 조직을 꾸려 대응을 해야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안전 관리에 대한 시스템이나 근본적인 대책은 잘 준비돼 있다”면서도 “일부 현장에서 작동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상징후가 발생했을 때나 인허가 과정에서 검토하고 승인할 공무원들이 기술을 다루는 전문가가 아니고 행정업무를 하는 사람들이라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다”며 “전문 인력이 부족한 측면을 보완할 수 있도록 기술협의회와 같은 전문조직을 포진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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