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질서정연한 생명의 흐름, 오랜 세월에 가시화된 자국…음악을 그려낸 칸딘스키, 이 그림 속 무질서의 의미는

2018.10.01 21:53 입력 2018.10.01 21:58 수정
김상욱·유지원

마르고 흰 모래로 물결을 표현한 일본의 정원 양식, 가레산스이(枯山水).

마르고 흰 모래로 물결을 표현한 일본의 정원 양식, 가레산스이(枯山水).

■ 겹겹이 생명의 흐름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에너지
엄청난 수의 원자가 모이면
평균적인 일정한 경향 나타나

살아 있는 유기체의 동적 평형
일정한 리듬이 있어 살아간다

건강한 생명들은 결이 고르다. 살결도 머릿결도 숨결도. 건강한 정신도 결이 고르다. 마음결도 말결도 글결도.

순우리말 ‘결’은 ‘겹’에서 온 것 같다. 우리 선조들은 우주의 생명현상 속에서 구성 성분들이 반복하는 패턴을 형성해 ‘겹’을 이룬다고 직관으로 통찰한 모양이다. 그 생명의 자국으로 남은 무늬가 ‘결’이다. 종이에도 결이 있다. 종이를 묶은 책은 세로 방향으로 넘기기에, 종잇결은 세로 방향이 순방향이다. 그 결을 거스르면 책이 성을 내고 억세게 몸을 뒤튼다. 독일어로 종이의 결을 ‘라우프 리히퉁(Lauf Richtung)’이라 한다. ‘달려가는 올바른 방향’을 뜻한다. 결이 순리에 맞아야 책이 곱고 건강하게 오래 보존된다.

순리(順理). 이치에, 결이 흐르는 방향에 맞을 때 우리는 그것을 순(順)하다고 한다. ‘이(理)’는 가로 세로 겹겹의 결을 이루는 그 모습 그대로 ‘가지런하다’는 뜻을 가졌다. ‘理’자가 생성된 근원으로 거슬러 가면 결국 ‘나뭇결’의 무늬에서 왔다고 한다. 구슬옥(玉)변 오른쪽이 가지런히 정돈된 이 한자는, 옥석을 무늬에 맞게 다듬어 그 결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理는 곧, 내적인 흐름이 겉으로 드러난 무늬이고 결이다.

흐름을 일으키려면 에너지인 ‘기(氣)’가 필요하다. 氣는 생김새부터 기운생동하며 동적이다. 理는 氣를 운동하게 하는 법칙이자, 그 존재의 근거다. 氣가 理를 따라 움직이면 결이 순하고 고운 건강한 생명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결이란 생명현상에 새겨진 물리현상으로, ‘동적인 흐름’과 ‘주기적인 질서’의 흔적이다. 그런데 에너지는 무슨 조화로 ‘질서’를 만들까? 우주에서 에너지의 양은 보존되지만 그 질은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흐르며 떨어지는데 말이다. 전자를 에너지 보존 법칙, 후자를 열역학 제2법칙이라 한다. 그리고 질서의 반대편에 있는 무질서의 정도를 엔트로피라 한다.

그러니까, 생명이란 우주만물의 이치인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슬러 질서를 생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 점을 궁금해했다. 원자 하나하나의 운동은 무작위적이다. 그런데 원자가 엄청난 수에 이르면 통계와 확률에 따라 그 움직임에는 평균적인 일정한 경향이 나타난다. 물이 가득 담긴 수조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트려보자. 색을 내는 잉크의 입자 하나하나의 운동은 불규칙해 예측할 수 없지만, 그 무작위한 움직임이 지속되면 결국 전체적으로는 잉크가 물에 골고루 퍼져 희석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열운동은 불규칙한데 생명현상은 예외인 이유에 대해, 슈뢰딩거는 이렇듯 통계물리학적인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원자는 그토록 작은데 우리 신체는 왜 이토록 커야만 할까?’ 신체가 충분히 커야 신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수가 충분히 확보되고, 그래야만 일정한 경향의 질서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지 않은 계에서는 여러 종류의 마찰이 있어 그 안의 운동은 결국 멈춘다. 그 계는 이렇게 영원에 도달한다. 이것을 ‘열역학적 평형 상태’ 또는 ‘열적 평형’이라고 부른다. 죽어있는 평형 상태가 ‘열적 평형’이라면, 살아있는 평형 상태는 ‘동적 평형’이다. 슈뢰딩거의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물학자 루돌프 쇤하이머는 ‘동적 평형’이라는 개념으로 생명이 질서를 창출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대사를 한다.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섭취하고 재료를 교환해 변화해간다. 생명체는 ‘동적’이라는 표현 그대로 다이내믹한 흐름 그 자체로 존재한다. 흡수한 에너지는 그대로 쌓여있는 듯 보이지만 생체의 조직 구석구석으로 확산돼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구성 성분을 교체해 간다. 이 동적인 흐름이 ‘살아있는’ 상태다. 생명체는 이렇듯 열역학 제2법칙을 뚫고 태어난다. 그리고 죽음을 뜻하는 ‘열적 평형’을 지연시키는 ‘동적 평형’ 상태로 생명을 ‘유지’한다. 생명의 복잡한 구성 성분들은 때로는 고체처럼 단단하게 때론 유체처럼 느슨하게 결합한다. 가령 단백질은 접촉했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이런 주기성이 일정한 리듬을 계속 만들어내며 진동을 한다. 이 질서정연한 생명의 흐름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가시화한 자국이 곧 ‘결’이 아닐까?

‘결’을 표현한 인간의 예술로는 무로마치시대 선승들이 완성한 일본의 정원 양식 가레산스이(枯山水)가 떠오른다. ‘마른 산과 물’의 정원, 우주의 축소판이다. 물이라면 ‘젖음’인데, 모래의 ‘마름’으로 물, 강을 표현한 상상력과 통찰이 신비롭다. 모래시계에서는 모래가 ‘흐른다’. 바위는 산, 모래는 강. 영겁 시간의 결을 따라 모래가 겹겹이 쌓여 굳어져 바위를 이루고 바위가 풍화돼 모래가 되듯이, 산도 강도 그저 변화하는 상태일 뿐이라는 뜻일까? 굵고 흰 모래 위에 등간격의 갈퀴 자국이 평행하게 동심원의 파동을 그리고 물결처럼 흐른다. 반짝반짝 고동치며 고요하게 흐르는 생명감. 집중하는 고른 마음결이 흐트러지면 그토록 정연한 질서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 고운 모랫결, 물결에서 흐트러짐 없이 순리적인 생명의 결을 느끼며 우리는 명상하고 안도한다.

유지원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6)질서정연한 생명의 흐름, 오랜 세월에 가시화된 자국…음악을 그려낸 칸딘스키, 이 그림 속 무질서의 의미는


유지원은 타이포그래퍼로 홍익대 겸임교수다. 서울대와 독일 라이프치히 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시각디자인·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전시, 북디자인, 저술과 번역을 하고 있다.


■ 결맞은 음악이 추상화로

음악을 회화로 구현하려 한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 Ⅴ’(1911년).

음악을 회화로 구현하려 한 바실리 칸딘스키의 ‘구성 Ⅴ’(1911년).

음악이란 ‘결맞은 파동’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
파동을 보면 결이 어긋난다
잘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음악은 추상이 됐다

결은 무늬다. 같은 결이라도 머릿결은 시각, 비단결은 촉각을 일깨운다. 물결같이 흐르는 역사 속에서 인간의 욕심은 한결같다. 마음이 비단결이라도 결이 다르다면 같이 일하기 쉽지 않다. 이처럼 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선이 하나 그어있을 때 ‘결’이라 부르지 않는다. 여러 개의 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을 때 ‘결’을 말할 수 있다. 결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이미 대상에 모종의 규칙이 있을 가능성을 내포하며, 실제 그런 규칙이 있을 때 결이 맞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옳다. 결은 대상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총체적 성질을 지칭하게 된다.

물결은 파동이다. 잔잔한 호수 위에 돌을 하나 떨어뜨리면 동심원이 물 위를 퍼져나간다. 이 동심원의 집단이 파동이다. 파동은 물질이 아니라 형상이다. 물이 아래위로 진동하는 그 행위의 산물이 파동이다. 무용수가 춤이 아니듯 물은 파동이 아니다. 물의 진동양태가 파동이다. 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파동도 실재하지 않는 걸까. 물리학자는 파동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재의 기준은 그것이 물질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관측 가능한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파동은 시간과 공간을 평등하게 사용한다. 물결의 파동을 사진으로 찍어보면 위치에 따라 주기적으로 물의 높낮이가 진동하는 사인함수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공간에서 본 파동의 형상이다. 물 위에 나뭇잎을 띄워 놓고 물결이 지나는 동안 나뭇잎의 움직임을 동영상에 담아보자. 시간에 따라 주기적으로 상하 진동하는 사인함수의 형태가 나타날 거다. 이는 시간에서 본 파동의 형상이다. 파동은 시공간 모두에서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소리는 파동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연주되고 있을 때 그 음악은 공기의 밀도 파동으로 자신을 시공간에 아로새긴다. 우리가 공기의 밀도 변화를 볼 수 있다면 바흐의 음악이 공간에 펼쳐진 그림처럼 보일 것이다. 공간에 드러나는 음악의 형상이다. 음악은 공간을 가로질러 귀에 도달한다. 귀의 고막은 물결 위의 나뭇잎처럼 좌우로 진동하며 음악을 시간의 파동으로 바꾼다. 시간으로 느껴지는 음악의 형상이다. 이렇게 시공간을 진행하던 음악은 귀에 부딪혀 시간의 예술이 된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하얀 줄’(1936년).

바실리 칸딘스키의 ‘하얀 줄’(1936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음악을 회화로 표현하려 한 화가다. ‘즉흥’이나 ‘구성’ 같은 제목은 음악을 염두에 둔 것이다. 칸딘스키는 그림의 색과 형태가 진동하며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 ‘구성 V’는 언뜻 봐서는 의미를 쉽게 알 수 없다. 자세히 보면 그의 전작에 나타나는 이미지가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그림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색채와 형상에 최대의 자유를 부여하고, 의미를 최대한 지워버린 극도의 추상에 이른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당대의 반응은 모르핀이나 대마초에 취한 사람이 그린 것이라는 비난이었다. ‘구성 V’는 작품 크기가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시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칸딘스키는 누구보다 현대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다. 원자가 방사능을 가지고 붕괴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는 원자가 변치 않는 최소의 단위라는 ‘고대 원자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가장 견고한 벽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모호해졌다. 이제 내 눈앞에서 돌이 공기로 변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칸딘스키는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회화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렸다. 말년에는 미생물학이나 발생학에서 영감을 얻은 이미지들이 그림에 등장하기도 한다.

칸딘스키를 추상으로 이끈 현대원자론, 즉 양자역학에서는 결맞음이 중심 개념이다. 양자역학에서는 ‘본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원자는 우리의 직관,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원자는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우리의 경험에 근거해 이해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막상 원자가 어디에 있는지 ‘보면’, 원자는 분명 한 장소에만 존재한다. 본다는 행위가 원자의 상태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원자를 결맞은 상태, 보아서 한 장소에 있게 된 상태를 결어긋난 상태라 부른다.

본다는 행위를 설명하는 데 난데없이 ‘결’이 튀어나오는 것은 원자의 기이한 행동이 파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원자는 단단한 입자이면서 동시에 소리와 같은 파동이기도 하다. 결이 맞은 파동이 시공간을 조화롭게 진행하듯 원자도 소리와 같이 시공간에 펼쳐져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본다는 행위는 파동의 결을 흐트러뜨려 한 장소에 고정시켜 버린다. 마치 결이 어긋난 음악이 불협화음이 돼 귀에 걸려 넘어지듯이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안되면 정상이다. 양자역학은 원래 이상하다.

칸딘스키는 음악을 보여주려 했다. 음악은 결맞은 파동이다. 결맞은 파동은 양자역학이 가지는 기이함의 근원이다. 양자역학에서는 파동을 보면 결이 어긋난다. 이렇게 음악은 추상이 됐다. 칸딘스키가 보여준 음악은 결이 어긋나며 의미조차 상실해버린 걸까.

김상욱



[김상욱·유지원의 뉴턴의 아틀리에](6)질서정연한 생명의 흐름, 오랜 세월에 가시화된 자국…음악을 그려낸 칸딘스키, 이 그림 속 무질서의 의미는


김상욱은 물리학자로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다. KAIST를 졸업하고 독일 막스플랑크 복잡계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김상욱의 양자공부> <김상욱의 과학공부>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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