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특별대담

“우리 사회가 이제야 페미니스트란 다섯 글자 정도 알게 됐죠”

2018.10.06 06:00 입력 2018.10.06 06:04 수정

#페미니즘 2018

활동가 심미섭·신지예·이민경 3인이 말하는 성과와 의미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의 저자인 이민경씨(왼쪽부터)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의 저자인 이민경씨(왼쪽부터)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미투(#MeToo) 운동부터‘불법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에 낙태죄 폐지 운동까지 올해에도 페미니즘 이슈는 가장 뜨거운 쟁점이고 화두다. 2018년은 2015년부터 시작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선언과 ‘#○○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등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분출한 여성의 목소리가 일상공간은 물론 거리에서 집단적 목소리로 표출된 해이기도 하다.‘미투’ 운동은 온라인 공간과 매스컴을 넘어 재판정에까지 이어졌고, 이른바 ‘몰래카메라’ 등 불법촬영에 대한 수사기관의 대처에 분노한 여성 시위는 연일 규모를 키워갔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판결을 앞두고는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125명의 여성들이 거리에서 임신중단 약물인 ‘미프진(미페프리스톤)’을 삼키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한쪽에서는 ‘가장 전투적인 페미니스트 집단’, 다른 쪽에서는 ‘여자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은 인터넷 사이트 ‘워마드’도 상반기 내내 논란을 일으켰다. 올 한 해 페미니즘 이슈의 최전선에 선 20대 페미니스트 활동가 3명을 만나 올해 페미니즘 운동의 성과와 의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좌담회에는 6·13 지방선거에서‘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슬로건으로 내걸며 화제를 일으킨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28)과 2016년 한국의 첫 ‘검은 시위’부터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이는 페미니스트 그룹 ‘페미당당’의 심미섭 활동가(27), 페미니즘 출판그룹 ‘봄알람’의 기획자이자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등 다수의 페미니즘 관련 책을 낸 이민경 작가(26)가 참여했다.

- 페미니즘 관련 활동에 뛰어든 계기가 있다면.

이민경(이하 이) = ‘액티비즘’으로서의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다. 동시대 여성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 그게 나의 고통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깨닫게 한 계기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페미니즘과 관련한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을 설립해 2016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신지예(이하 신) = 대안학교 출신인데 10대 때부터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다. 당시 같이 페미니즘 관련 공부를 한 또래 여자아이들 중 성폭력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성희롱이든 성추행이든 대부분 비슷한 트라우마를 떠안고 살았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이 좀 나빴던 것이라고, 이겨내야 할 고통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사회에 같이 살아가는 많은 여성이 그런 고통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했던 것 같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같은 사건을 놓고 정신병력을 가진 사람의 범죄라는 식의 해석을 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그때부터 페미니즘 정치를 누군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지방선거 때 그 다짐을 좀 실천했던 것 같다.

심미섭(이하 심) = 페미당당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거울 행동’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거울에 근조 리본을 달아 서로를, 또 행인을 비추는 행동이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의미를 담았다. 당시 언론이나 학자들조차 여성혐오 살인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여성들의 분노와 사회 분위기의 간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계속 고민하게 됐던 것 같다.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

안희정 판결, 무력감 옛말
남성중심 법 체계 바뀔 것
이전 세대는 호주제 폐지
우리의 몫은 ‘낙태죄 폐지’

- 2018년 가장 뜨거웠던 페미니즘 이슈를 꼽는다면 ‘미투’ 운동일 것 같다.

심 = 어느 시사평론가가 한국의 미투 운동은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2016년 말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계 성폭력’이라는 고발이 계속 이어졌다. 법정에서 방청 연대를 하거나 소송비용을 모금하는 식의 여성 연대가 계속 이뤄졌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은 서지현 검사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 앞의 성폭력 고발과 연대가 올해 미투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 =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파급 효과가 컸던 것은, 대한민국 최고 권력층에 속하는 검사 집단에서조차 여성은 성적 대상화되고 성폭력 피해자로 생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엘리트 검사 집단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미투 운동에서 인상 깊은 것은 피해자들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간 성폭력 사건에서 한 여성이 목소리를 내면 ‘신뢰성이 부족하다’ ‘꽃뱀이다’ 하는 식으로 치부하고 사건이 묻혀버리는 일이 잦았는데, 이윤택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서로 연대하며 목소리를 내자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진실된 언어가 됐다. 많은 여성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성폭력 피해는 여성이라면 누구든 겪을 수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 안희정, 이윤택 판결 등 올해 초 ‘미투 운동’ 관련 사법부의 판단이 속속 나오고 있다.

신 = 안희정 판결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가득 찼다. 위력을 축소 해석했고, 피해자의 자기결정권을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했다. 페미니즘 관점으로 보지 않더라도, 개인 권리 행사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누군가 내게서 물건을 빼앗아 갔을 때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내가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물건을 빼앗은 상대방의 행위가 정당화되나? 상급심에서 결론이 바뀔 것이라고 본다.

심 = 다른 페미니즘 운동과 달리 미투 운동의 경우 법원의 최종 판결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과거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을 때도, 가해자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는 반면 피해 여성들은 역고소 등에 시달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남성중심적인 법 체계 속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했다. 안희정 1심 무죄 판결은 예전 같았다면 무력감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판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법정 안팎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문제제기가 이어진다면 법원도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당 공동운영위원장

급진 흑인운동 말콤X처럼
워마드 역시 운동의 한쪽
페미를 성 대립 해석 곤란
‘모두의 사상’ 공유 숙제로

- ‘미투 이후’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를 꼽는다면.

이 = 미투 운동이 만들어낸 변화는 이제까지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많은 이들에게 그 역시 성폭력이었다는 인식과 언어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제까지 상층부에 있거나 권력을 쥔 이들의 폭력을 고발했다면, 이제 개인 삶의 친밀한 관계 속 미세 권력관계까지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단계가 된 것 같다.

신 = 백래시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 온라인 공간이다.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칭하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여성)혐오 발언인데도, 이런 말들이 댓글로 이어지면서 피해자 증언을 장악해 버리고 사건을 곡해시켜 버린다. 법 제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벨기에나 독일, 프랑스에서는 이미 혐오 발언을 제재하는 법들이 만들어졌다. 언론이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기사들을 양산하지 않도록 내부 자정 방법도 찾아야 한다.

- 과거 ‘금기’ 영역으로 여겨졌던 인공 임신 중단에 관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이 = 국가가 낙태 문제를 저출산과 연결시킬수록 낙태죄 폐지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고 본다. 국가가 재생산 도구로 여성의 몸을 통제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셈인데, 어떻게 보면 수가 낮은 것이다. 낙태죄 폐지에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이유도, 단순히 낙태가 필요한 이들이 합법적으로 시술받게 해달라는 차원이 아니다. 내 몸의 결정권과 통제권 차원이다.

심 = 정부의 출산지도 같은 것이 대표적인 시도다. 2016년부터 페미당당이 몇 차례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를 열었는데, 외국 활동가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왔다. 이제 한국의 낙태죄 폐지 문제는 한국의 여성들만 관심을 갖는 사안이 아니라 전 세계가 지켜보는 이슈다.

신 = 사실 낙태죄는 사문화된 법이다. 지켜진 적 없던 이 사문화된 조항을 저출산이 문제가 되니 다시 꺼내들어 여성들에게 책임을 묻고 칼날을 휘두르는 형국이다. 법무부도 그렇고 댓글만 봐도 ‘문란한 여성들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한데, 실제 임신 중단 결정을 하는 가장 많은 세대는 출산 경험이 있는 40대 기혼 여성들이다. 과학적 사실에서 임신 중단과 관련한 ‘생명권 대 선택권’ 프레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라고 생각한다. 인공수정을 하면 다태아 임신 가능성이 높다. 이때 한 아이를 잘 키우려고 나머지 아이를 두고 선택적 유산을 하는데, 여기에도 낙태죄를 물어야 하나.

이 = 이제 임신 중단이 필요가 아닌 권리 차원이라는 것을 많은 여성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까지 낙태라는 것은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때 눈을 딱 감고 내려야 하는 결정이었다면, 이제 그 결정을 ‘나쁜 결정’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가를 묻는 단계가 됐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여성 개인에게 책임이 부여된 딜레마를 사회적 문제로 이야기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신 = 너무 늦게 논의가 시작됐다. 임신 중단 시술을 국가가 무료로 해줘야 한다는 논의를 하는 나라도 많다.

이 = 프랑스에서는 대선 공약이었다. 프랑스는 낙태를 하지 말자는 광고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임신 중단 정보를 제한하는 것은 처벌받는다. 외국에선 이미 ‘Free Legal Abortion Service(합법적이고 무료로 제공되는 임신 중단 서비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단계다.

이민경‘봄알람’ 기획자 겸 작가

이민경‘봄알람’ 기획자 겸 작가

미투로 성폭력 인식 확산
‘극단 페미’로 입막음 말길
무엇을 하는지가 아닌
무얼 무너뜨리는지 봐야

- 이른바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성별 갈등은 더 첨예해진 양상이다. 그 논란 중심에 워마드가 있는데.

신 = 페미니즘 전반에 대한 백래시는 언론에서 워마드를 중심으로 생산한 측면이 크다고 본다. 워마드의 성체훼손 등이 한창 논란이었지만, 당시 워마드 홈페이지에서 게시물당 조회수는 대부분 500도 채 되지 않았다.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보다 적은 조회수다. 공론장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언론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워마드에 오른 자극적 게시물을 가져다 기사를 쓰면서 많은 사람들이 워마드를 마치 페미니스트들의 공론장으로 인식하게 됐다. 반인류애적이고 과격하며 비이성적인 집단으로서의 페미니스트 이미지가 형성됐다. 클릭을 유도하는 선정적인 기사를 써내는 자본주의적인 논리와 대중이 원하는 대결구도 양상이 합쳐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심 = 언론이 계속 관심을 갖는 게 ‘위험하고 폭력적인’ 워마드라면, 그 위험성과 폭력성이 과연 워마드에 있는 것인지, 그걸 전달하는 미디어에 있는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 = 저는 워마드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들 운신의 폭을 넓혔다. 워마드 이전에는 그 자리에 메갈리아가 있었고, 메갈리아 이전에는 그 어떤 ‘극단적인 페미니즘’이 있었다. 늘 되풀이되는 시험이었다. 여성들에게 ‘워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워마드가 이런데도 페미니즘이 옳아?’라고 던지는 질문들이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여성들이 존재하는 것과 지금 내가 나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도, 그런 식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입을 막았다. 워마드가 무엇을 하는지가 문제가 아니고, 워마드가 무엇을 무너뜨리는지가 관심이다.

신 = 불법촬영 편파수사 관련 집회에서도 구호나 퍼포먼스가 논란이 됐다. 구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걸 문제로 만드는 이들이 문제라고 본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개인 일상 속의 재미난 운동이 아니다. 수천년간 이어져온 여성혐오라는 구조를 전복시키자는 급진적인 운동이다. 그걸 하는 와중에 시위 현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문’을 뒤집어 ‘곰’이라는 글자 하나 만들었다고 폭력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굉장히 다양한 실천이자 철학이라고 본다면, 워마드를 페미니즘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연결시키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본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시기 평화를 강조한 마틴 루서 킹 같은 사람도, 폭력적·급진적인 노선을 걸었던 말콤X도 있었다. 말콤X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마틴 루서 킹 같은 사람도 자신의 방식으로 흑인 인권을 이야기하는 게 가능했다. 모든 운동엔 그런 면이 있다. 그들(워마드) 존재 역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향후 계획이 있다면.

심 = 낙태죄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 활동할 것이다. 이전 페미니스트들이 호주제 폐지라는 성과를 냈다면, 우리 세대에는 낙태죄 폐지라는 하나의 큰 성과와 운동의 동력이 필요하다.

이 = 제게 페미니즘은 약자들의 연대였고, 여성들의 해방이다. 그런 관점에서 비혼 문제 등 여성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방식들에 집중하고 있다.

신 = 한국 페미니즘이 지난 몇 년간 굉장히 큰 성과를 이뤄냈다. 여성의 주요 의제를 확실히 대중적으로 전파시켰다. 지난 지방선거 유세 첫날, 선거 포스터가 하도 희한해서 그랬는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올랐다(웃음). 그때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도 같이 검색어에 올라 왔다. 무슨 뜻인지 몰랐던 사람들이 검색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최근 몇 년을 거치며 이제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라는 다섯 글자가 무엇인지 알게 됐지만, 여전히 페미니즘을 성 대립으로 이해하거나 여성 권리 신장으로 해석하는 데 그치는 사람도 많다고 본다. 세상을 바꾸려면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 사상·철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고령층 등 다른 층위의 사람들에게도 전할지가 중요한 다음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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