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흘린 땀값은 어디로…콘텐츠 제작 환경은 ‘차갑게 꽁꽁’

2018.10.16 06:00 입력 2018.10.25 11:27 수정

[창간 기획-콘텐츠가 미래다]밤새 흘린 땀값은 어디로…콘텐츠 제작 환경은 ‘차갑게 꽁꽁’

ㄱ씨(29)는 이달 들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가을철 지방 행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ㄱ씨는 한 4인조 댄스그룹의 리더다. 이들은 소속사가 없다. 맏언니인 ㄱ씨가 직접 섭외요청을 받고, 계약이 성사되면 운전해 행사장까지 간다. 몇 시간씩 운전해야 하지만 지방 행사는 즐겁다. 서울·경기에 비해 행사비를 비교적 후하게 쳐주기 때문이다. 이들도 몇 해 전에는 연예기획사 소속이었다. 소속사는 자신들을 행사용 커버댄스팀으로만 보는 것 같았다. 커버댄스팀이란 유명 가수나 팀의 노래와 댄스를 따라하는 팀이다. 자신들의 음반을 발표해야 클 수 있는데 소속사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소속사는 자신들을 비즈니스 대상으로만 봤다. 행사비도 적었다. 군부대 행사는 1인당 4만원, 지방 행사도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주최 측으로부터 공연비를 더 받는 것 같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활동제약은 많았다. 소속사가 정해준 행사를 뛰기 위해서는 항상 대기해야 했다. 사생활이 없었다.

ㄱ씨 나이는 20대 후반. 댄스가수의 전성기는 20대 초중반이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ㄱ씨는 계약기간이 만료되자 미련 없이 소속사를 떠났다. 자신이 별도로 댄스팀을 만들었다. 직접 홍보물을 제작해 공연기획사에 돌렸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열었고, 유튜브 방송도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홍보는 만만치 않았다. 2000여명의 팔로어가 생겼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억대 뷰가 아닌 이상 큰 홍보효과를 얻기 힘들었다.

ㄱ씨는 고등학교 동아리 행사 때 처음 무대에 올랐다. 흥분되고 짜릿한 그 감정은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일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화려함만을 좇은 것은 아니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아서 택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좋아하는 것과 직업은 명백히 달랐다. 후회하지 않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하면 선뜻 선택할 수 있을지 그도 모른다. 그는 “한번 무대에 오르고 나면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이 직업의 특징”이라며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수·웹툰작가·게이머…
한류 알리는 직업이지만
소득 양극화·경쟁 극심
갑을 간 부당 계약도 난무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초등학생 희망직업 중 가수가 6위, 프로게이머가 7위였다. 과학자(10위)를 앞섰다. 2016년에는 가수가 8위, 프로게이머가 10위였다. 가수는 한 계단, 프로게이머는 세 계단 상승했다. K팝과 K드라마가 초강세를 보이고 웹툰작가와 게이머 등이 각광받으면서 한류 문화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문화 콘텐츠는 겉면이 화려한 만큼 속에 드리워진 어둠도 짙다. 극단적인 소득양극화, 열악한 노동환경, 극한 경쟁은 한류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 갈수록 심해지는 부익부 빈익빈

[창간 기획-콘텐츠가 미래다]밤새 흘린 땀값은 어디로…콘텐츠 제작 환경은 ‘차갑게 꽁꽁’

웹툰은 핫한 한류 문화 콘텐츠 분야이다. 요즘 웬만큼 ‘떴다’ 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은 웹툰이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신과 함께>를 비롯해 <미생> <강철비> <창궐> <은밀하게 위대하게> <내부자들>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네이버웹툰은 자사에 작품을 게재하는 작가 300여명의 평균 수익이 2억2000만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웹툰작가 전체 ‘평균’으로 봐서는 안된다. 네이버웹툰에 작품을 게재하는 작가는 전체의 10%도 안된다. 지난 7월 MBC 라디오 <굿모닝 FM 김제동입니다>에 출연한 만화가 강풀은 “회사를 그만두고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청취자의 질문에 “웹툰작가, 만화가는 프리랜서다. 잘못하면 진짜 프리해질 수 있다. 반백수에 가까운 직업이다”며 “습작을 하고 궤도에 오를 때까지 안정적 수익이 있는 직장을 그만두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최근 발표한 ‘만화·웹툰 작가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총수입이 3000만원 미만인 웹툰작가가 3명 중 2명이었다. 4명 중 1명은 연수입이 1000만원에 못 미쳤다. 반면 도구·장비 구입, 자료 수집, 작업실 대여료 등 창작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은 연 1120만원이었다. 그러다보니 작품이 하나 끝나면 다음 작품을 시작할 때까지 당장 생계가 걱정이다. 실제 웹툰작가들은 창작의 어려움으로 ‘휴식시간 부족’과 함께 ‘차기작 준비기간 중 경제적 어려움’을 가장 많이 꼽고 있다.

웹툰작가의 주당 순수 창작시간은 61.6시간이다. 그런데도 건강보험 등 4대 보험에 단 한 개도 가입하지 않은 비율이 61.9%에 이른다. 한 웹툰작가는 “창작과 마감의 고통이 크다보니 만화가 중에는 공황장애 등 질병을 앓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한류 문화 콘텐츠 분야 어디서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갑을’ 관행도 심하다. ‘을’일 수밖에 없는 신인이나 무명 아티스트들은 종종 출연료 깎기와 불공정계약의 희생양이 된다. 출연을 미끼로 은근히 뒷돈을 요구하거나 지급한 공연비의 일정액을 다시 요구하는 ‘백마진’ 관행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업체에서 구두로 출연이나 작품 게재를 요청한 뒤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한 ㄴ씨는 3년간의 활동을 접고 가수생활을 그만둘까 생각 중이다. 소속사 없이, 돈 없이 연예활동을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출연료를 제대로 쳐주면 그래도 버틸 만한데 출연료를 과도하게 후려치거나 아예 무료로 해달라는 요청이 적지 않다”며 “특히 서울·경기 지자체에서 ‘공연을 하면 되레 홍보가 되지 않느냐’ 하는데 공연비를 다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여전히 척박한 제작환경

[창간 기획-콘텐츠가 미래다]밤새 흘린 땀값은 어디로…콘텐츠 제작 환경은 ‘차갑게 꽁꽁’

교통방송(tbs)이 최근 방송작가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신입작가 6명이 1년 단기계약을 맺고 계약직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1년 단기계약에도 방송작가들이 흥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방송사가 작가들과 근로계약을 맺은 것은 한국 방송계 사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방송작가들은 담당 PD와의 구두계약으로 채용이 결정되고, PD가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 퇴사해야 했다. 낮이고 밤이고 근무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주 52시간 근무는 언감생심.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는 “이런 꿈 같은 이야기가…현실이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tbs와 계약한 작가들은 서울형 생활임금이 적용돼 현행 월 150만원이던 임금이 월 192만원으로 오른다.

영상·드라마·방송의 현장 제작여건은 열악하다. 2016년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를 보면 영화 스태프 중 정규직은 18.4%에 불과하다. 연간 총수입은 1970만원, 하루 평균 근로시간은 12.8시간에 이른다. 방송은 더하다. 제작기간 석 달 동안 2시간짜리 작품을 만드는 영화와 달리 방송은 일주일에 2시간짜리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방송 스태프는 거의 뜬눈 상태로 일주일을 보내기 일쑤다. 초과수당도 없다.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방송제작 지원인력은 대개 제작사 등과 개별계약을 맺는다. 이 때문에 그간 자영업자(프리랜서)로 분류돼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열악한 제작환경에 놓여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조를 만들기도 어렵거니와 만들어도 단체교섭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열악한 제작환경이 이슈가 되면서 법원의 판단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상황이 비슷했던 방송연기자들은 노동자 자격을 인정받았다. 대법원은 지난 12일 “연기 과정에서 일정한 재량이 인정되지만 연출감독, 현장집행자의 개별적·직접적 지시를 받아 연기한다”며 방송연기자들도 노동자라고 최종 판결했다. 탤런트와 성우, 코미디언, 무술연기자 등이 속한 한국방송연기자노조가 법정 소송을 건 지 7년 만의 승리였다.

“콘텐츠는 노동력의 산물”
땀의 대가 제대로 지급돼야
한류의 불 꺼지지 않을 것

이병민 건국대 교수는 “문화 콘텐츠는 노동력을 팔아먹는 산업으로 밤새 찍고 쓰고 녹음해서 만드는 것인데 사람들이 죽어나가면 능력 있고 좋은 사람들이 현장을 떠나게 된다”며 “한류 열풍이 계속되려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 들어왔을 때 밥 먹고 살도록 해주면서 자기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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