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와 ‘교우촌’이 한국 천주교의 자부심인 이유···직접 가보니

2018.11.04 11:41 입력 2018.11.04 11:42 수정

한국 천주교는 ‘공소(公所)’와 ‘교우촌(敎友村)’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유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다는 ‘평신도가 세운 교회’의 모체가 공소와 교우촌이다. 한국 천주교는 “국내로는 조선왕조 후기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열망, 국외로는 천주교회의 동양 선교 등의 영향을 받아 평신도 스스로의 힘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고 설명한다.

1791년 신해박해 전까지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큰 탄압을 받지 않았다. 세력이 미미하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라북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사르고 윤지충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유교식 장례 대신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상을 치르면서 국가적 문제가 됐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됐고 전라북도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됐다. 박해의 시작이었다.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은 쫓겨다녔다. 잡히면 신앙을 포기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자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산속으로 들어가 마을을 만들었다. 사제가 없어도 스스로 성당을 짓고 회장을 뽑아 미사를 드렸다. 그 마을이 ‘교우촌’이고, 그들이 만든 사제없는 성당이 바로 ‘공소’다.

지난달 30~31일 천주교 주교회의, 전주교구 사제 등과 함께 전북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를 돌아봤다. 지금이야 차가 들어갈 수 있을만큼 길이 닦였지만 100년전만해도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곳들이다. 천주교 신자라면, 목숨걸고 신앙을 지켰던 조상의 흔적을 보며 신심을 다시 북돋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신심이 없더라도 풍광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곳이 여럿이었다.

■여산 성지···숲정이, 배다리, 백지사터의 의미


천주교 신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숲정이에서는 참수됐고, 배다리에서는 교수형이 집행됐다. 동헌 앞 백지사터에서는 백지사형으로 숨이 끊어질때까지 고통 받았다. 사진은 여산성당 전경과  숲정이 성지, 백지사터, 여산성당 내부(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홍진수 기자soo43@kyunghyang.com

천주교 신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숲정이에서는 참수됐고, 배다리에서는 교수형이 집행됐다. 동헌 앞 백지사터에서는 백지사형으로 숨이 끊어질때까지 고통 받았다. 사진은 여산성당 전경과 숲정이 성지, 백지사터, 여산성당 내부(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홍진수 기자soo43@kyunghyang.com

전라북도 익산역에서 차로 40분 가량 달리면 도착하는 여산에서는 살벌했던 천주교 박해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여산과 그 속읍지였던 고산, 진산, 금산 등지에서 잡혀온 많은 신자들이 이 곳에서 처형됐다. 여산은 당시에도 작은 고을이었지만 왕비를 배출한 곳이라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다. 합법적으로 지역 내에서 사형집행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숲이 우거진 ‘숲정이’에서는 주로 참수형이 집행됐고, 배다리 근처에서는 교수형이 이뤄졌다. 동헌 앞마당에서는 백지사형이 실시됐다. 백지사형은 죄인의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 그 위에 백지를 여러겹 붙여 질식사시키는 사형법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주민들에게 보이기 위해 장날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날에 실시됐다고 한다. 1895년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간행한 <치명일기>에 기록된 여산 지역 순교자만 25명이다.

여산 인근의 교우촌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성채골’이다. 천호산 기슭 7개 교우촌 중 하나로 1886년 여산 지역 최초의 공소가 만들어진 곳이다. 현 전주교구장(제8대)인 김선태 주교를 비롯해 제3대 교구장 김현배 주교, 제7대 교구장 이병호 주교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김선태 주교는 “어린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숲정이에서 뛰어놀고, 배다리에서 수영하고, 백지사터 옆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했다.

■되재 공소···한강 이남 최초의 성당


현재는 공소로 쓰이고 있는 되재 성당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가운데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홍진수 기자soo43@kyunghyang.com

현재는 공소로 쓰이고 있는 되재 성당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가운데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홍진수 기자soo43@kyunghyang.com

되재 공소가 있는 전북 완주군 고산 교우촌은 조선후기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만들었다. 1890년까지 고산 지방 공소가 57개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산골 곳곳에 교우촌이 형성됐다.

되재 공소는 원래 성당이었다. 그것도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약현 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한강 이남에서는 첫번째 성당이었다. 최초의 한옥 성당이기도 했다. 되재 성당은 선교사로 조선에 온 프랑스 비에모 신부가 1895년 단층 5칸짜리로 만들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성당이 전소되면서 본당의 역할은 인근 고산 성당으로 옮겨갔다. 이후 주민들이 공소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2007년에 옛 성당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성당 뒤편에는 되재 성당 설립 전 고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과로와 열병 등으로 목숨을 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두 선교사 조스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의 묘도 있다.

공소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신자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미사도 한달에 한번만 열린다. 되재 공소 송인환 회장(72)은 “일요일에는 본당에서 차로 신자들을 실어가고 공소에서는 한달에 한번만 미사를 드린다”며 “현재 신자가 30여명에 불과해 공소가 없어질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천호 성지···“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천호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 순례 코스로 꼽힌다. 준본당으로 승격된 천호 공소가 있고, 103 계단을 올라가면 순교 성인들을 모신 묘역이 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천호 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 순례 코스로 꼽힌다. 준본당으로 승격된 천호 공소가 있고, 103 계단을 올라가면 순교 성인들을 모신 묘역이 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 주로 충청도 일대의 신자들이 전북 완주군 천호산 일대로 모여 들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묘사한 첩첩산중에도 교우촌이 들어섰다. 이곳은 원래 고흥 유씨 가문의 땅이었다.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은 땅주인들의 묵인 속에 땅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호미로 한번만 파고 들어가도 돌이 나올만큼 척박한 땅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1913년 기와로 된 공소 건물이 처음 생겼고, 1953년과 2006년, 두차례 걸쳐 공소 건물을 다시 지었다. 사실 ‘담당 신부가 있어야 한다’는 기준으로 보면 천호산에는 오래전부터 ‘본당’이 있었다. 1877년 프랑스 선교사 블랑 신부가 어름골에 5년 정도 거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주교구는 이를 존중해 2011년 천호 공소를 고산 본당에서 독립해 ‘준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천호 성지는 대표적인 천주교 순례 코스다. 되재본당과 천호공소 회장 등 12명은 1909년 고흥 유씨 가문으로부터 땅을 사들여 순교자들의 성지로 보존했다. 현재는 30만평에 이르는 부지에 성인 묘역과 성당, 박물관, 봉안경당(납골당) 등이 들어서있다. 순례자들이 숙박을 할 수 있는 토마스 쉼터, 피정의 집 등도 있다.

■동혜원 공소···한센인 마을과 강칼라 수녀


강칼라 수녀가 전북 고창군 동혜원 교우촌에서 활짝 웃으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진수 기자soo43@kyunghyang.com

강칼라 수녀가 전북 고창군 동혜원 교우촌에서 활짝 웃으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진수 기자soo43@kyunghyang.com

강칼라 수녀와 삐에라 수녀가 살고 있는 집. 강 칼라 수녀는 1968년 한국에 온 뒤 50년간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강칼라 수녀와 삐에라 수녀가 살고 있는 집. 강 칼라 수녀는 1968년 한국에 온 뒤 50년간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전북 고창에 있는 동혜원 공소는 1952년에 만들어졌다. 앞에 나온 교우촌과 공소가 19세기말~20세기 초에 생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 밖에 없다. 1952년에 천주교가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동혜원 공소가 있는 마을은 한센인들이 만든 교우촌이다. 1947년 고창읍 죽림리 동혜원에 한센인 수용소가 세워졌고 자연스럽게 공소도 만들어졌다. 현재는 한센인 후손들과 이주한 주민 등 60여명이 마을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있다. 대부분은 70대 노인이나 기초생활수급자다. 동혜원 인근에 있는 운곡습지가 생태 여행지로 개발되면서 공소와 교우촌도 함께 활기를 띄고 있다. 생태 탐방과 성지 순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코스는 흔치 않다. 다만 전주교구는 동혜원 공소가 너무 세속화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전주교구 사회사목국장 김봉술 신부는 “개발도 좋지만 역사적 의미도 큰 곳인만큼 이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혜원 공소와 한센인 마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강칼라 수녀(75)다. 이탈리아 출신인 강칼라 수녀는 1968년 한국에 온 뒤 50년간 한센인 마을에 머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왔다. 50년전이나 지금이나 사는 집도 똑같다. 딱 한사람이 몸을 뉘울 수 있는 방에 머물며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강칼라 수녀는 201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신성 공소···박해를 피해 더 깊은 곳으로


신성 공소까지  가려면 여전히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한다. 박해가 거세질 수록 신자들은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야 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신성 공소까지 가려면 여전히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야 한다. 박해가 거세질 수록 신자들은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야 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교우촌은 주로 접경지역에 있는 산골에 만들어졌다. 박해가 발생하면 다른 고을로 피해 체포를 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의 의도와 달리 교우촌은 갈수록 확산됐다. 박해가 거듭되면 천주교 신자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결과적으로는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가게 됐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파리외방전교회 샤를 달레 신부는 이를 두고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렸다”고 표현했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자 가족 등은 전북 정읍과 장성 등 깊은 산골에 다시 교우촌을 이뤘다. 신성 공소도 이때 만들어졌다. 공소는 1893년에 설정되었고, 본당은 1903년 설립됐다. 내장산 인근에 교우촌이 많았기 때문에 이곳에 본당이 설립됐다. 현재 공소로 쓰이는 건물은 본디 1903년 부임한 미알롱 신부가 1909년 성당과 함께 지은 사제관이었다. 성당 부근에 기와 굽는 공장을 설치해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건축했다고 한다. 관군의 기습에 대비해 주변에는 석성과 같은 견고한 담장도 쌓았다. 1936년 본당을 정읍 읍내로 옮기면서 신성리에는 공소만이 남았다. 원래 한옥성당 건물은 매각해서 없어졌다. 현재 신성 공소 부근 교우촌에는 5가구 10명 정도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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