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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미투 상징’ 서지현·이토 시오리의 특별한 동행···“우린 진실을 말했고, 국가와 사회는 답해야”

2018.12.13 06:00 입력 2018.12.13 17:53 수정
장은교 기자

|한·일 ‘미투’상징서 ‘2차 가해’ 눈물까지…서지현·이토 시오리의 특별한 동행

서지현 검사(왼쪽)와 이토 시오리 기자가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났다. 이토 시오리 기자가 출국하는 길을 서 검사가 배웅했다. /김기남 기자kknphoto@kyunghyang.com

서지현 검사(왼쪽)와 이토 시오리 기자가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났다. 이토 시오리 기자가 출국하는 길을 서 검사가 배웅했다. /김기남 기자kknphoto@kyunghyang.com

이토 시오리(29)는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왔다. 키만큼 큰 카메라 삼각대, 두툼한 배낭을 어깨에 메고 터질 듯 불룩한 짐가방을 양손에 든 채. 이토를 본 서지현 검사(45)가 달려갔다. “뭐 좀 먹었어요?” “피곤하진 않아요?” 서 검사가 빼앗다시피 짐을 나눠들자, 이토가 미안한듯 “정말 괜찮은데…”라며 웃었다.

서지현과 이토 시오리. 한국과 일본의 ‘미투(me too)’를 상징하는 두 여성이 12월 한국에서 만났다. 이토는 전 TBS 워싱턴 지국장 야마구치 노리유키에게 성폭행 당한 사실을 2017년 5월 폭로했다. 그 뒤 살해협박에 시달리다 영국으로 이주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살고 있다. 이토는 3박 4일 일정으로 한국에 출장을 왔다가 어렵게 서 검사를 만났다. 이토가 돌아가는 날, 서 검사가 공항에 나와 배웅했다. 경향신문은 두 사람의 동의를 얻어 배웅하는 길을 동행했다. 이토가 비행기에 타기 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토는 사건 폭로 후 끊임없는 살해협박에 시달리고 있어, 정확한 입출국일시는 밝히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이토 시오리(이하 이토) = 제가 피해사실을 밝히고 후에 보도를 통해 서 검사님의 이야기를 보았어요. 힘든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고,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10월 한국에 왔을 때 연락처를 알아보려했지만 알지 못하고 런던으로 돌아갔는데, 서 검사님에게 e메일을 받고 너무 기쁘고 놀랐습니다.

서지현(이하 서) = 이토가 제 연락처를 물어봤다는 이야길 듣고 제가 e메일을 보냈어요. 메일로만 가끔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번에 취재 때문에 한국에 온다고 해서 만나게 됐어요.

이토는 스웨덴 저널리스트 한나 아크빌린과 함께 ‘하나시필름(hanashifilms)’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사를 설립해 ‘이코노미스트’ ‘알자지라’ ‘로이터’ 등에 취재영상을 보내고 있다. 일본의 고독사를 다룬 ‘고독한 죽음(Lonely Death)’은 2018년 뉴욕페스티벌 TV & Film 어워즈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이토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일정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날 급히 서 검사에게 연락했다.

- 직접 만나니 어땠습니까.

이토 = 처음 만난 느낌이 아니었어요. 집에 초대를 해 주셨는데, 특별한 손님이 온다고 아이와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었다면서 보여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서 = 굉장히 밝고 맑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보다 16살이나 어리다는 것에도 깜짝 놀랐죠. 제가 시오리의 나이였다면…성폭력에 경중을 논하긴 어렵지만 제가 시오리처럼 심각한 성폭력을 겪었다면 과연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었을까…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시오리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이 제가 JTBC 인터뷰를 한 지 딱 1주일 되는 날이었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참 많이 울었어요. 가해자가 무혐의 처분이 난 이후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토는 2015년 술에 취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피해사실을 신고했지만 검찰이 “밀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수사를 하지 않자,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사실을 밝혔다. 택시기사와 호텔종업원 등이 어렵게 이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줬고 가해자의 DNA 증거도 확보됐다. 그러나 검찰이 귀국하는 야마구치를 공항에서 체포하려던 계획은 체포 직전 제동이 걸려 취소됐다. 담당수사관은 이토에게 “경시청 톱에서 제동을 걸었다”고 알려줬다. 야마구치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재팬타임스는 이 사건을 다루며 “야마구치는 아베 신조 총리와 두터운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아베의 개인 연락처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언론인”이라고 보도했다. 야마구치는 TBS를 퇴사한 뒤 아베 총리 내각에 대한 이야기를 쓴 <총리>라는 책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토 시오리 “어떻게 하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서지현 “우리가 서로에게 서로의 용기가 되어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한국과 일본 미투의 상징인 두 분의 만남이 개인적으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연대하실 계획이 있나요.

이토 =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어요. 처음에는 그냥 먼저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었어요. 그러다 같은 동양인으로 태어나 여성의 문제, 매우 고통스러웠을 여성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할까 이야기를 하게 됐어요. 지금부터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는 기회였죠.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나와서 말하는 것도,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참 힘든 일이죠. 그렇다 하더라도 앞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힘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보단, 어떻게 하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서로 밝은 모습으로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서 = 저는 (폭로 이후) 사실 더 이상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시오리와의 만남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참혹한 현실이 알려졌으니 이제 나는 가만히 있어도 많이 달라지겠지 하는 일종의 안도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1년이 되어가도록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검찰에서 저를 더 이상 욕할 수 없을만큼 욕하고 있으니 제발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를 들었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방법이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게 있다면 다시 용기를 내볼까 하던 중에 시오리가 10월에 한국에서 인터뷰 한 것을 보았어요. 우리가 서로에게 서로의 용기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함께 힘을 합쳐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일본 미투’의 상징이 된 이토 시오리  기자. 이토는 “숨죽이고 있을 많은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무너지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일본 미투’의 상징이 된 이토 시오리 기자. 이토는 “숨죽이고 있을 많은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무너지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한국에선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인권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이토 = 사건 자체도 매우 비극적이고 충격이었지만 저는 한국여성들이 여러 사건 이후에 (밖으로) 나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고, 어떻게 하면 일본에서도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한국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일본에선 110년동안 성폭력 관련법이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이토의 폭로 이후 2017년 일부만 개정됐다.) 그냥 기다리고만 있어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변하지 않죠. 제가 겪은 피해를 가족에게 말하고 밝히겠다고 했을 때 제 동생이 “왜 언니냐”고 반대했어요. 저는 누군가는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내 권리에 대해 내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똑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일본에선 한국과 미국만큼 미투가 활발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미투는 실패했다’는 평가에 동의하시나요.

이토 = 이전까지 (일본)미디어에서 대부분 이것(성폭력)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일본에서 저(의 피해)에 대해 안다는 것 자체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제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말하고 난 뒤 엄청난 2차 가해가 있었어요. 일본에선 왜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말할 수 없을까요. 2차 가해가 가장 무섭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을 당한 뒤 보호받고 도움을 받는 시스템이 전혀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 미투 운동이 촉발된 이후 한국사회가 이전보단 조금 나아졌다고 보십니까.

서 = 글쎄요. 많은 여성들이 이야기해요. 고맙다고. 이제는 그들이 조금 조심한다고. 그치만 그것만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백래쉬(역풍)가 거세지고 입을 연 여성들이 온갖 음해와 역고소에 시달리고…여혐과 남혐으로 갈려서 혐오와 갈등이 커지고 있죠.

- 한국에서도 피해를 말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서 검사의 미투 등을 통해 이슈가 촉발되기도 하는데요.

이토 = 저도 한국에서 미투가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왜 일본은 한국처럼 할 수 없을까 생각해봤어요. 한국은 국민이 불의에 저항하고 목소리를 내서 성공한 역사를 갖고 있잖아요. 일본은 그런 역사가 없기 때문에, (불의에 저항해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큰 차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야기한 뒤로 일본 사회는 모든 면에서 제가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나 여기서 제가 무너지면 ‘역시 (피해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맞구나’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기 싫다는 마음 때문에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거에요. 성폭력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기 위해 말한 것인데 제가 무너지면…성폭력 피해를 말하고 무너지는 예로 남아버리니까요. 어떻게 하면 밝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 이토의 사건을 통해 일본 미투운동을 지켜보셨는데, 서 검사는 어떻게 느꼈습니까.

서 = 우리는 전혀 다른 나라에서 전혀 다른 나이의,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여성이었는데 우리 이야기는 너무 많이 닮아있어요. 가해자는 권력자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범죄를 은폐했고 지금 이순간도 범행을 부인하고 있죠. 시오리에게 저 역시 최악의 상황이 되면 내 나라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토는 기자회견 후 심각한 2차 가해에 시달렸다. 한 일본언론은 이토가 기자회견 때 ‘셔츠 단추를 풀고 나왔다’며 보도했고, 인터넷엔 ‘꽃뱀이다’ ‘북한공작원이다’ ‘SM클럽 종업원이다’ ‘정치적 목적이 있다’ ‘국가를 망신시킨 수치’ 등의 댓글이 도배됐다. 기자회견 후 이토는 일본에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일도 끊겼다. 영국 BBC는 지난 6월 이런 상황을 ‘일본의 감춰진 수치(Japan’s secret shame)’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했다.

이토는 생존을 위해 영국으로 이주했고 어렵게 일을 하고 있지만, 불안정한 상황이다. 이토는 “일본에서 사람들의 협박과 비난때문에 생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떠나게 됐지만, 외국 생활 역시 내 뜻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워 힘들다”고 말했다. 서 검사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 역시 2차 가해의 피해자다. ‘꽃뱀이다’ ‘정치적 목적이 있다’ ‘조직을 망신시켰다’는 음해를 당했다. 서 검사는 “사회적 공감 면에서는 시오리보다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검찰과 가해자 측의 갖은 음해와 괴롭힘은 견디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국적, 다른 직업으로 살아온 두 사람은 성폭력 피해사실을 당한 후 같은 프레임으로 공격당하고 있다.

- 폭로 이후에 두 분 다 협박과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서 = 처음에 저는 모든 음해를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15년을 검사를 했으니 제가 다 입증해서 밝혀내리라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어떤 음해를 해명하면 또 다른 음해를 만들어내는 것을 알았어요. 아…이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이구나. 몸부림칠수록 더 단단히 옭아매고 결국 목숨을 앗아가는. 이제 이 거미줄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렸어요. 거미줄과 싸울 것이 아니라 거미를 직시하고 마지막 순간에 잡아먹히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미투’의 상징이 된 서지현 검사. 서 검사는 “성폭력은 사회적 재난, 약자를 대상으로 한 정신적 홀로코스트”라고 말했다.<br />/김기남기자kknphoto@kyunghyang.com

‘한국 미투’의 상징이 된 서지현 검사. 서 검사는 “성폭력은 사회적 재난, 약자를 대상으로 한 정신적 홀로코스트”라고 말했다.
/김기남기자kknphoto@kyunghyang.com

성폭력 말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시스템의 문제

음해하고 의심하는 잔인한 공동체, 이젠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 거미줄을 친 거미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서 = 작게는 가해자와 검찰, 크게는 이 사회라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은 그동안 성폭력 피해로 인해 말할 수 없이 고통받았을까요. 아니면 성폭력을 방치하고 가해자를 두둔하고 오히려 피해자들을 비난해온 공동체로 인해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까요. 피해자들이 입을 열 수 없게 만든 건 그들의 나약함과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진실을 들여다보기보다는 그들을 꽃뱀, 창녀 등으로 부르며 의심하고 비난해 온 이 잔인한 공동체 때문이었을까요.

이토 = 저도 여러가지 협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가족에게 칼을 보낸다든지 일을 하는 도중 ‘몸조심해라’ 등등의 말을 들어야 했어요. 제일 힘든 점은 협박이 가족과 친구에게 행해지는 것이었어요. 폭로 이후로 가족과도 일정기간 만날 수 없었고…가족이 범죄의 표적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지금까지도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토는 가해자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판은 정식으로 열리지 않았다. 가해자는 무고를 주장하며 이토를 고소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다. 서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상 불이익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안태근 전 검사장은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돼 재판중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 1심 재판은 피해자가 사건 직후 ‘피해자 답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죄판결이 나왔습니다. 이토는 성폭행 사실을 알리는 기자회견 때 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우지 않고 나왔다는 이유로 “단추를 열어 가슴을 보여준 시오리”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지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 = 저는 성폭력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고 이제까지 성폭력 피해자를 괴롭혀온 것은 비단 가해자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이뤄진 행위였기 때문에…개인의 범죄라기 보다는 사회적 재난이라고 생각해요. 약자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정신적 홀로코스트라 같은 것이죠. 사회 전체 분위기로 저항하지 못하고 폭로하지 못하게 한 채 죽어가게 만들었으니까요. 이제는 이 잔인한 공동체가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토 = 맞아요. ‘사회적 시스템이 왜 이런가’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경찰서에 갔을 때 신고서를 접수하려고 해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는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선 피해자 중 단지 4%만 성폭력을 신고한다고 해요. 96%는 없었던 일로 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거나 기해자를 처벌할) 어떤 법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요.

이토가 처음 경찰서는 찾았을 때 경찰은 “자주있는 일이라 수사하기 어렵다”고 했고, 검찰은 “밀실(블랙박스)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블랙박스’”라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토는 2017년 10월 자신이 겪은 성폭행 사건과 수사과정, 2차 가해, 성폭력범죄에 관한 사법시스템의 문제 등을 담은 책 <블랙박스>를 펴냈다. 이 책은 일본자유언론협회의 베스트저널리즘 상을 수상했다. 한국에도 지난 5월 출간됐고. 곧 프랑스판도 출간될 예정이다.

서지현 검사(왼쪽)와 이토 시오리 기자가 12월 한국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고통받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했다.  김기남기자/kknphoto@kyunghyang.com

서지현 검사(왼쪽)와 이토 시오리 기자가 12월 한국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고통받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했다. 김기남기자/kknphoto@kyunghyang.com

위안부 할머니와의 만남 “저는 언제쯤 눈물이 멈출까요?”


- 이토씨는 10월에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님들을 만났죠. 어땠습니까.

이토 = (이토는 이 질문을 받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다 말해야 할까요.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성폭력의 문제는 장소, 시대와 관계없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전쟁 중 성폭력을 당한 후 이를 폭로한 사람들이 받았는데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2018년 노벨평화상은 전쟁 중 성폭력범죄의 실상을 알린 이라크 소수민족 야지디족의 여성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피해자 치료에 앞장 선 콩고민주공화국 의사 드니 무퀘게가 수상했다.) 그때 만났던 위안부 할머니에게 ‘저는 언제쯤 눈물이 멈출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어요.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도 없고 눈물이 마를 일도 없다’고 했어요. (이토는 이 대답을 힘들게 했다. 눈물을 삼키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옆에서 이토의 답변을 듣던 서 검사가 대신 더 많이 울었고 이토를 안아주었다.)

그런 일을 겪은 후에 저 역시 살아가고 있는 제 자신에게 매일 위화감을 느끼며, 그 일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나 자신은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내 몸은 살아있는가…(사건) 바로 직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가 자동차라면 누군가 제 핸들을 빼앗아가서 이제부턴 어떻게 컨트롤할지 누군가에게 컨트롤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에요. 지금까지는 제 자신이 완전히 바뀌어버렸고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컸지만 지금은 조금씩 제 안에서 그것(성폭력 피해 사실)과 같이 살아가며 조금씩 방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 피해 사실을 말한 것을 후회하진 않습니까. 여러 억울한 상황을 겪었는데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결정을 할 건가요.

이토 = 같은 행동을 할 거에요.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제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서 =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정말 견디기 힘든 날에는 평행 이론을 생각하면서 ‘또 다른 우주의 또 다른 나는 평온하고 고요한 삶을 잘 살고 있을 거야…이게 진짜 꿈일 수도 있으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고 제 자신을 다독여요. 그렇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저도 똑같은 결정을 할 것 같아요. 저는 용감해서 입을 연 것이 아니라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거에요. 저도 시오리처럼 성폭력과 인사보복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그대로 있으면 실제로 죽을 것 같았어요. 사회적인 자살행위를 하는 심정으로 (검찰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인터뷰를 했던 거에요. 저는 대한민국 검사잖아요. 검사가 정의를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범죄를 처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피해자들에게

“최대한의 용기로 살고 있을 당신…자신의 진실을 믿으세요”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숨죽이며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이 기사를 읽어볼텐데요. 그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이토 =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진실을 믿으라’는 거에요. 자기가 겪은 일은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때문에 주변의 질책이나 어떤 말을 들어도 자신의 진실을 믿어야 합니다. 저도 제 탓을 많이 했지만…‘나는 그때 할 수 있는 있는 일은 다 했고, 그때 하지 않은 일은 내가 할 수 없던 일’이라는 것을 꼭 전하고 싶어요.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아서 힘을 비축해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땐 (그대로 있어도) 괜찮아요. 10월에 한국성폭력상담센터를 방문했을 때 어떤 분이 ‘당신이 한 행동이 최고였다’라고 말해줬어요. (사건 이후에) 그때서야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기뻤습니다. 저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서 = 제가 왜 피해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까요. 이젠 국가와 사회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내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로 생존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굳이 한마디를 해야 한다면 ‘스스로를 사랑하자’는 거에요. ‘당신은 가해자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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