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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지공거사’ 존엄한 노후를 허하라

2019.01.10 06:00

지하철에 의지하는 노인들

지하철 일반석을 가득 채운 노인들이 지난달 23일 온양온천역에서 서울로 돌아가고 있다. 박용하 기자

지하철 일반석을 가득 채운 노인들이 지난달 23일 온양온천역에서 서울로 돌아가고 있다. 박용하 기자

공짜 지하철서 추위와 더위 피하고
저렴하게 시간 보낼 곳을 찾아다녀
고령사회에 대비 못한 사회의 책임
노인들 탓으로 돌리기엔 한계 있어

‘지공거사(地空居士).’ 한국의 노인들은 언젠가부터 이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지하철 공짜’의 줄임말인 ‘지공’에, 놀고 먹는 사람을 뜻하는 ‘거사’를 붙여 노인을 비꼰 말이다. 이들은 공짜 지하철에 몸을 실어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저렴하게 시간을 보낼 곳을 찾는다. 이들이 한낮의 지하철을 차지한 지는 오래됐다. 노인들이 일반석까지 점령한 모습은 고령화된 한국의 ‘먼저 온 미래’이기도 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른 한국의 고령화를 감안하면, 지하철을 탄 지공거사들은 향후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젊은 세대의 근심은 커졌다. 사람이 많아 ‘지옥철’로 불리는 수도권 지하철을 더 불편하게 했다는 원망이 늘어났고, 노인들의 무임승차가 늘어나며 전국 도시철도공사들의 영업손실은 커졌다. 일각에서는 노인들의 지하철 무료승차를 폐지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공거사 현상’엔 인구변화와 고령사회에 대비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녹아 있다. 고성장시대에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남성들은 은퇴한 뒤 가정이나 지역사회에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했고, 공적연금과 같은 노후보장 수단은 이들의 삶을 받쳐주지 못했다. 몸을 둘 곳도 없고 돈도 부족한 노인들은 결국 공짜로 움직이는 지하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은 한국에서 노인 문제, 세대 문제의 상징적 공간인 지하철을 중심으로 노인의 삶을 개선하고 세대 갈등을 줄이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지 모색해봤다.

■ 지하철로 추위 피하고 식사까지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만난 김춘광씨(88·가명)는 역사 안에 자전거를 끌고 와 안장에 앉은 채 TV를 보고 있었다. 종로3가에 자주 놀러 온다는 김씨는 겨울이 되면 지하철역으로 추위를 피하러 온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는 TV 맞은편 계단에 노인들이 걸터앉아 추위를 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앉을 곳이 없어졌다. 노인들이 많아진 게 문제였다. 술 마시는 사람부터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까지 등장하자 서울교통공사 측은 계단 앞에 가림막을 쳐 노인들이 앉는 걸 막았다.

같은 시각 종로3가역 환승 통로에서는 5명의 노인들이 역무원들 눈치를 보며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일행 중 80대 남성은 “탑골공원에 놀러 왔다 날씨가 추워 역으로 들어왔다”며 “주변의 다른 노인들도 덥거나 추울 때 지하철로 피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폭염이 왔을 때 냉방시설이 없는 집에서 살던 노인들은 인천공항 등 먼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더위를 피하곤 했다.

무료 급식소 향하는 교통 수단 활용
지하철 택배로 돈벌이에 나서기도
춘천·온양온천 등으로 ‘지하철 여행’
풍족하진 않아도 나름의 여가생활

지하철은 노인들에게 끼니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종로3가역에서 만난 박영배씨(78·가명)는 “오직 밥을 먹기 위해 화곡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며 역사 바깥의 원각사 무료급식소로 향했다. 영하의 추위에도 이곳에는 60여명의 노인들이 줄을 서 있었고, 어떤 이들은 1시간 이상 기다려 밥을 먹고 가기도 했다. 급식소를 운영하는 ‘사회복지원각’의 고영배 사무국장은 “2년 전쯤에는 170명가량이 점심식사를 하러 오셨다면, 지금은 200명도 훨씬 넘는 분이 오고 있다”며 “형편이 안 좋고 혼자 사는 노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급식소에는 빈곤 노인뿐 아니라 용돈을 아끼고 싶은 중산층 노인들도 온다. 박씨도 젊은 시절 전기회사에 다니며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으나, 아들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하루 1만원의 용돈을 받는다고 했다. 용돈을 아껴쓰려다 보니 밥을 무료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경기 파주에서 온 86세 남성은 “자식들한테 용돈을 받긴 하지만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라며 “이 근처에는 급식소뿐 아니라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영화관이나 노래방도 있어 좋다”고 말했다.

이날 종로3가 지하철역과 탑골공원 인근에서 만난 대부분의 노인은 남성이었다. 최인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 노인들은 동네 경로당이나 복지관을 찾는 경향이 많다”며 “여성들은 본인이 연금을 받는 경우가 적어 남성 노인보다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시 쓰는 인구론]표류하는 ‘지공거사’  존엄한 노후를 허하라

■ 노후소득 부족, 지하철 택배로

지하철은 노인들의 용돈벌이를 돕기도 한다. 노인들이 아르바이트로 많이 하는 ‘지하철 택배’는 무료 지하철 탑승의 이점을 활용한 사업이다. 업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참여 노인들은 1건당 지하철 2시간가량을 왕복해 5000원 안팎을 벌며, 정부 지원금이 나오는 업체에 속해 있다면 하루 2만~2만5000원을 번다.

지하철 택배의 ‘메카’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를 찾았다. 택배업자들이 야외에 허름한 책상을 갖다놓고 공책을 펴놓으면, 그 앞에 노인들이 줄을 서 일감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줄을 서 있던 하상수씨(75·가명)는 오전 8시에 일어나 지하철 택배로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고 했다. 하씨는 “이렇게 짐을 들고 오가면 운동도 잘되고 건강해질 수 있다”며 주변 노인들에게 일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택배 일이 늘 적당한 것만은 아니다. 일부 노인들은 자신의 허리춤까지 오는 크기의 원단봉을 여러 개 옮겨야 했는데, 낮 시간 지하철은 노인들로 가득 차 있어 수십 정거장을 서서 오가야 했다. 올해 80세가 됐다는 한 택배 노인은 “연금을 받는다 해도 30만원가량인데 노후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며 “정부에서 괜찮은 노인 일자리를 만들었다지만 내가 찾기는 힘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연금만으로는 노후생활이 힘들어 은퇴 뒤 별도의 일자리를 알아보는 게 노인 대다수의 상황이다. 2017년 기준으로 40만원 미만의 연금을 받는 이들은 108만명으로 전체 수령자 220만명 중 절반에 달했다. 여성 노인의 경우 돌봄 일자리를 많이 찾고, 남성들은 환경미화 등 공공일자리를 주로 알아본다.

노후 대비가 안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노인들의 일자리 상황은 더 팍팍해지고 있다. 지하철 택배가 처음 시작할 땐 한 달 100만원까지도 벌 수 있어 생계 유지가 가능했지만, 경쟁이 심해지며 이제는 한 달 수입이 50만원 안팎으로 떨어졌다. 한 지하철 택배업체 관계자는 “요즘에는 경제가 안 좋아 동대문 일대의 의류업체도 많이 폐업하고 있다”며 “일감도 줄고 받는 돈도 줄어드니 일하는 노인들도 점점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휴일이던 지난달 23일 지하철을 타고 온양온천을 찾은 노인들이 지하철역 앞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휴일이던 지난달 23일 지하철을 타고 온양온천을 찾은 노인들이 지하철역 앞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 지하철은 가성비 좋은 여행수단 되기도

노인들의 여가생활에도 공짜 지하철이 큰 역할을 한다. 수도권 노인들의 경우 무료 지하철로 강원 춘천과 경기 양평, 충남 온양까지 갈 수 있다. 돈이 부족한 이들은 가는 길에 차창 밖에 펼쳐진 풍경만 구경하고, 돈이 좀 더 있는 이들은 현지에서 식사나 목욕을 하기도 한다. 경로우대가 되는 ‘시티투어버스’를 이용해 지역의 명소를 둘러보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와 단절, 소득도 없는 이들
지하철 사용 제재로 발만 묶는다면
사회적 고립 심화, 건강에도 악영향
다른 세대의 부담 줄이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삶 영위할 여건 마련해야

휴일인 지난달 23일 노량진역에서 충남 온양온천으로 향하는 지하철 1호선 열차에 올랐다. 차량 안에는 노인들이 가득했다. 친구 2명과 함께 온 박명국씨(75·가명)는 평소에도 소요산과 북한산 등 지하철로 갈 수 있는 곳을 즐겨 찾는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한창 일하던 시절엔 주 5일도 없었고, 거의 365일 일하느라 여행은 꿈도 못 꿨다”며 “그나마 은퇴한 뒤에야 여행에 재미를 붙였는데, 국내여행도 워낙 돈이 드니 부담 없는 지하철 여행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열차가 온양온천역에 도착하자 노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인들과 여행 온 이들도 있었지만, 혼자 시간을 때우러 온 이들도 많았다. 포장마차에서 혼자 어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있던 88세 남성은 “경상도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자녀들이 다 외국에 있어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오직 목욕을 하러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곳에 온다고 했다. 외로움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경기 일산에서 혼자 온 78세 남성도 칼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 왕복 6시간의 지하철 여행을 한다고 했다. “식사만 하고 가도 하루가 뚝딱 걸리니 시간을 금방 보낼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그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도 더 아프고 식구들이랑 갈등만 생기는 것 같다”며 “집 근처 경로당이나 복지관도 가봤지만 노인들이 모이면 화투나 치고 싸움만 난다. 혼자 조용히 다니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 노인들이 건강해야 다른 세대도 이득

지난해는 베이비붐 세대인 ‘58년 개띠’들이 정년을 맞는 해였다. 1958년 국내에서 태어난 아이는 99만3628명이었다.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한국 사회가 고령화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58년 개띠’들의 노후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빈곤으로 떨어진다면 지공거사는 더 늘어나고 세대 갈등도 심화될 것이다.

지공거사의 증가에 대비해 노인들의 혜택을 줄이는 게 세대 갈등의 해결책일까. 전문가들은 노인들의 과도한 지하철 사용을 제재하기에 앞서 무료 지하철에 삶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문제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노인들의 지하철 생활은 노후 대비가 부족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들은 가정에서 단절돼 있었으며, 여가를 보내기엔 연금을 비롯한 노후소득이 변변치 않았다. 경로당·복지관 위주로 이뤄진 지역의 노인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해 떠도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노후 대비가 안된 상황에서 노인들의 발만 묶는다면 사회적 고립이 심화되고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 지난해 김수영 경성대 교수팀 연구에서는 노인의 사회·경제적 박탈 경험이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건 한 세대의 삶이 건강해야 다른 세대들의 부담도 줄어들 수 있다는 인식이다. 건강보험 재정 문제가 대표적이다. 향후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들의 건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면 전 세대가 져야 하는 보험료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노인들이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고 적절한 여가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면 노인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기간이 늘어나 다른 세대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세대 간의 연대로 갈등을 예방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청년들 사이에선 노인들을 ‘틀딱충’ 등으로 부르며 혐오하는 모습이 보여 문제가 됐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총장은 “노인들도 가치관이 각자 다른데, 고집이 심하거나 의존적이고 혜택을 받으려고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겨가는 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노인 스스로도 다른 세대를 위해 좀 더 기여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며 “최근에는 주거 문제로 어려운 청년들을 위해 노인들이 출자한 사례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이 이어진다면 혐오가 존중으로 바뀌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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