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끈다” 지식소매상 설민석에 마이크…‘품질’은 누가 책임지나

2019.03.08 17:13 입력 2019.03.08 17:34 수정
위근우 칼럼니스트

케이블·지상파 구분 없이 게으른 방송사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최대 수혜자는 역사 강사 설민석처럼 보인다. 지난 3월1일을 전후해 그는 tvN <어쩌다 어른>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KBS <배틀 트립> 등에 출연해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사 강의를 했다. 올해 2월 새 시즌을 시작한 MBC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에 고정 출연하며 나머지 출연자의 선생 역할을 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공신력 있는 채널의 절대다수가 역사에 대한 이야기 전반을 설민석에게 맡기고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이 어떤 분야의 대중적인 담론을 독점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도 과하다. 한국사를 전공한 강단 학자들이나 설민석처럼 수험생 강의에 특화된 강사들이 설민석 외에도 존재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손님 끈다” 지식소매상 설민석에 마이크…‘품질’은 누가 책임지나

<어쩌다 어른>에 출연한 그는 어린이들의 역사의식 함양을 위한 여러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도 했지만, 이미 현재 대중매체들은 설민석의 민족주의적 해석과 서술에 잠식당한 수준이다. 에드워드 카의 말대로 역사가 고정된 것이 아닌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그 대화는 여러 주체가 각각의 목소리를 내며 논쟁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대화하는 현재의 주체는, 아니 어쩌면 독백의 주체는 설민석 한 명뿐이다.

팩트 맞고 쏙쏙 이해 쉽지만
지나치게 단선적 해석 그쳐

문제는 방송사들
설민석만 섭외하는 게으름에
지성과 교양을 ‘외주화’하기까지
직접 지식을 씹어 내놓기보다
지적 권위 갖춘 이에 의존한다

<어쩌다 어른>에서 설민석은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한국 축구를 응원(3·1운동으로 촉발된 대중적 독립운동)해야 하는데 붉은 악마(정부를 통한 조직적 힘)가 없는 식”이라고 설명한다. 역시 쏙쏙 이해되는 설명이다. 팩트 자체도 맞다. 다만 그의 역사 강의에선 3·1운동이 지배층이 지켜내지 못한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기 위해 역사의 전면에 나서며 구시대적 질서를 전복시킨 문자 그대로의 ‘혁명’이며, 3·1운동을 통해 발현된 민권의식 위에서야 비로소 근대적 민주주의 시스템의 정부가 들어설 유물론적인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누락됐다. 또한 비폭력 운동이자 대중운동으로서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극찬하면서도, 농민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은 체제를 향한 상당한 물질적 폭력이 동반됐고 일제가 실제로 강한 부담을 느낀 것은 이들 농민 지도자였다는 사실은 다루지 않는다.

다루지 않은 게 거짓은 아니다. 단지 설민석 특유의 매끈하게 다듬은 우리 민족의 단일 서사에선 민족운동 안에 국민주권론과 복벽주의가, 지배계층과 민중이, 실력양성론과 독립투쟁론이, 독립협회와 의병세력이 종횡으로 벌인 치열한 담론 투쟁과 역동성이 제거되어 있을 뿐이다. 근대사의 피해자로서의 한민족이란 단일 주체가 역사의 고난에 맞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재밌고 감동적이며 기억하기도 쉽지만,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는 논쟁적 요소와 질문은 빠진다. 심지어 현재 미디어는 설민석의 목소리에만 마이크를 대주는 중이다. 진정한 의미의 단일 서사다.

‘미미광어’(신미양요-미국-광성보-어재연을 연결해 외우도록 설민석이 만든 조어)를 외우는 문제라면 상관없다. 역사관의 문제는 다르다. 그는 <어쩌다 어른>에서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의 기원을 안창호의 1920년 ‘독립신문’ 신년사에서 찾는다. 소위 관료라는 것이 국민의 “노복에 불과”하다는 안창호의 말에 시대를 가로지르는 국민주권의식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설민석이 직접 읊은 그 신년사엔 “여러분 중에 각 총장(장관)들이 총장인 체함을 시비하는 이도 있거니와, 총장이 총장인 체하는 것이 어찌 그르오?”라는 불만까진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높은 이로서의 행세를 하면 왜 안 되느냐는 반문이다. 이것이 안창호의 시대를 앞선 의식을 희석하는 건 아니다. 다만 선각자의 의식에 감탄하는 만큼, 왜 그 정도의 선각자조차 일상 영역의 권위주의를 벗어나진 못했는지 질문할 수 있어야 동시대 권력의 문제를 역사적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모두들 설민석의 강연에 고개만 끄덕이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무대에선 딱히 논의되기 어렵다.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에선 제주도까지 내려가 역사 공부를 했지만, 단일 민족 서사의 허구성을 가장 처절하게 까발리는 목호의 난 이야기를 설민석 입에서 들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종종 설민석의 강의에 붙는 ‘국뽕’이란 비판을 단순히 정서적 촌스러움의 문제만으로 볼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그는 <뇌섹시대-문제적 남자>에서 유관순이 “지금 태어났으면 ‘박경 오빠 좋아해요’라고 말할 평범한 여고생”이라며 그런 어린 학생이 열사가 된 건 만세운동 중 부모를 잃어서라고 말한다. 졸지에 유관순의 주체성은 가족주의로 환원된다. 고등교육을 받은 유관순이 젊지만 얼마든지 한 명의 주체로서 탄탄한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평범한 여고생이 얼마든지 정치의식과 신념을 갖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설민석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민족을 단일 주체로 설정하는 매끈한 ‘국뽕’ 서사에선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들이 3·1운동에서 보여준 주체적 행동과 역량이 임시정부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것, 즉 여성들은 항일투쟁을 하는 동시에 한국 남성들의 남존여비 관념과도 싸워 승리했다는 것이 제대로 논의될 수 없다.

이것을 설민석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물론 근현대사에 집중된 최근 강연에서 더더욱 민족적 공분을 자극하고 혼자 너무 비분강개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교수법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게으른 방송사들이다. 역사 강사로 설민석만을 섭외하는 것도 게으르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지성과 교양을 외주화하는 것이야말로 게으르다. 최근 몇 년 동안 유행한 교양 프로그램은 거의 강연 혹은 지식인끼리의 토크쇼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제작진이 직접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여러 경로로 입수하고 검증한 뒤 꼭꼭 씹어 내놓기보단, 어떤 지적 권위를 갖춘 이를 데려와 의존하는 것이다. 섭외 과정에서 최대한의 검증 및 필터링을 한다면 좀 낫겠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번 <어쩌다 어른> 오프닝에선 설민석의 강의 경력과 판매 부수 등을 강조하며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역사 선생님’이라 추켜세우지만, 사실 <어쩌다 어른>이야말로 최진기와 설민석 투톱 체제로 두 사람의 대중적 인지도를 확 끌어올려준 프로그램이다. 본인들이 한국 최고 강사로서의 권위를 부여한 뒤, 다시 그 최고 강사를 섭외해 프로그램에 지적 권위를 부여하는 tvN의 기괴한 순환논법. 물론 이조차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 공식 홈페이지에 설민석에 대해 ‘역사의 신’이라고 수식하며 지상파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도 버린 MBC보단 나아 보인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어떤 의미로든 설민석은 뛰어난 지식소매상이다. 문제는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도 한계는 있으며, 한계 이상의 권위를 얻고 행사할 땐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어쩌다 어른> 강연 마지막엔 김구의 유지를 말하며 민족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선을 넘는 녀석들-한반도 편>에서는 최종 미션으로 휴전선을 넘을 예정이다. 잘못된 조합이다. 현재 유튜브에서도 꾸준히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설민석의 3년 전 KBS1 <오늘 미래를 만나다>에서의 통일 강연은 총체적 난국이다.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자원을 더하면 자강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는 과거 ‘국민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내용 수준이며, 당장 EU 같은 연합 체제조차 쉽지 않고 흡수통일이나 1국가 2체제는 불가능한 모델이라는 것은 고민하지도 않는다.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언급하는 부분에선 천박함과 논리적 모순(통일되면 당연히 북측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까지 보인다. 인기 역사 강사지만 빈약한 통일관을 가진 설민석에게 민족의 미래와 통일 대한민국의 희망을 묻는 것은 이미 지성 외주화의 부작용이다. 지금 과연 그를 소비하느라 바쁜 채널들은 그런 부작용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까. 아니, 부작용이 있는 걸 알고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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