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직 노동자의 위상

2019.03.17 20:38 입력 2019.03.17 20:40 수정

조선산업 빅딜, 수소경제, 삼성르노자동차 파업. 최근 경제 현안에서 제조업 이야기를 빼놓긴 어렵다. 중요한데 늘 빠져 있는 것은 내부에서 일하는, 특히 기술과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좋은 일자리라는 평판을 좌우하는 것 중 큰 건 임금이다. 노동사회학 연구들을 살펴보면 임금은 크게 두 가지의 구조적 영향을 받는다. 먼저는 직장의 크기이다. 계약직, 촉탁직 등 비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회사가 크면 임금이 더 크다. 그래서 부모들과 선배들은 대기업에 가라고 한다. 두번째는 노동조합의 유무다. 노조원이면 임금단체협상을 통해서 노조가 없는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임금 차원에서 손해를 덜 볼 수 있다. 고용 보장을 위해서도 노조가 있는 게 낫다. 시간이 누적될수록 노조가 있는 회사를 다니는 것이 편차를 만들 수 있다.

[양승훈의 공론공작소]생산직 노동자의 위상

최근에는 그 전제가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 회사가 도산할 수 있고 경영상의 이유로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다. 멀쩡한 대기업의 상시적 구조조정도 낯설지 않다. 앞으로의 기대수익이 떨어지는 사업부문은 과감히 정리하려고 한다. 정리되는 부문의 일자리가 정리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개별 사업장 노조의 힘은 줄어든다. 공적자금 투입 정도의 상황이 되면 손을 쓸 수 없다. 두 가지 구조적 변수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다.

좀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내생 변수, 즉 사람의 가치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특히 생산직 숙련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생산방식을 ‘기민한 생산방식’이라고 한다. 한편에선 고객들이 원하는 다양한 니즈에 최소 비용으로 빠르게 대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생산직들의 숙련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예전엔 차 한 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자 한 명이 몇 달이고 선배 노동자의 작업을 보고 일머리를 익혔다면, 지금은 며칠이면 누구나 작업할 수 있게 현장이 재편되어 있다. 작업대 위에 걸린 화면의 설명을 보고 단순한 조립만 하면 되게 바뀌었다. 세계 최고의 생산성은 엔지니어들의 고민과 엄청난 설비투자에서 나오게 됐다.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대졸 엔지니어가 정비와 개선을 맡는다. 생산직들의 자율성도 함께 줄었다.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나 폭스바겐은 여전히 생산직 노동자들의 숙련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으나, 한국의 대기업들은 1990년대 이후 전면적인 설비투자로 다른 길로 향했다. 용접부터 시작해 가장 많은 부분이 생산직들의 숙련에 의지한다는 조선업 역시 생산기술 투자가 많이 전개됐다. 중소 조선소가 빅3의 생산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숙련도 차이가 아니라 생산효율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생산의 다수를 차지하는 ‘물량팀’ 노동자들은 임금을 잘 주고 처우를 잘해주면 빅3와 중소 조선소 어디로도 이직하기에 노동자들의 숙련도 차이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회사들은 가능하면 연공서열제를 가지며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정규직 생산직을 뽑지 않으려고 한다. 50대 생산직들의 퇴직 날짜만 기다리는 경우도 적지 않아 보인다. 10명이 정년퇴직 하면 2명만 뽑고, 급한 생산라인은 사내하청에 넘긴다. 생산량에 따라 쉽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고 이제는 숙련의 부재가 두렵지 않다. 전환배치가 노사 간의 첨예한 쟁점이 되는 이유다. 새로 공장에 갈 고졸 생산직의 미래는 선배들이 받아온 ‘노동계급 중산층’이라는 시샘만큼 밝지 않다.

대졸 엔지니어의 일자리와 숙련 문제는 어떨까. 기업들은 생산직보다 엔지니어를 뽑는 것을 선호한다. 생산보다 개발과 설계 단계에서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쪽으로 제조업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제품 생산에 필요한 생산직만 정규직으로 운영하려는 것은 제조 대기업이 꿈꾸는 미래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립스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는 오롯이 시제품 생산만 한다. 대규모 투자가 어려운 중소기업들만 로봇이 할 일을 저임금 노동자들이 맡는다. 단가 후려치기 외에도 생산성 향상이 실제 문제가 된다. 정부가 스마트팩토리를 괜히 도입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산업 고도화가 생산직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과 생성되는 엔지니어들의 일자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이 든다.

산업 고도화로 노동의 양상과 직무와 직군별 위상이 바뀌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앞으로도 한국의 제조업 공장에 불이 꺼지진 않을 것 같지만, 공장을 채우는 인력의 구성이 바뀌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생산에 있어서 자율적인 생산직들의 숙련보다 엔지니어들의 치밀한 공정설계가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1990년대까지 국가가 ‘인력 충원계획’을 세우면서까지 일자리를 보장하려 했던 고졸 생산직의 지위를 대졸 엔지니어가 대체한 거 아닌가 싶다.

물론 생산직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놓을 수 없다. 한국 산업화 50년의 역사이며, 여전히 지역경제와 제조업을 움직이는 주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산업의 진화와 ‘축적의 길’을 이야기하려면 이제는 엔지니어들이 어떻게 더 숙련할 수 있게 할 것인지, 그들에게 어떠한 위상을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함께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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