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위는 모두 노동현장, 꼭 산재신청 하세요”

2019.08.18 09:26
이하늬 기자

정소연 변호사, 회사와의 섣부른 합의 주의 당부

정소연 변호사가 8월 13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정소연 변호사가 8월 13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지난해 3월, 한 청년이 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복무를 하는 승선근무예비역 구민회씨(당시 26세)였다. 구씨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상사가 자신을 괴롭힌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그동안 승선근무예비역을 포함한 선원의 사건·사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근무지가 바다 위를 ‘떠다니는’ 선박이기 때문이다.

정소연 변호사(법률사무소 보다)는 구씨 사건을 대리하고 있다. 정 변호사는 선원들이 겪는 괴롭힘, 그리고 산업재해를 두고 ‘배’라는 특수성을 강조했다. 선원들은 자신의 국적, 선사 국적, 선박 국적, 사고가 발생한 영해 등 복잡성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8월 13일 정 변호사를 만났다.

-사망한 승선근무예비역 사건을 맡고 있다. 현재 어떻게 돼가나.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다. 구민회씨 유족은 절대로 사과 없이는 회사에서 주는 보상금은 한푼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민사소송에서 유족이 패소할 수는 없다. 무조건 일부는 승소한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다른 승선근무예비역이나 선원들의 문제가 공론화될 수 있었다.”

-공론화 이후 다른 선원, 승선근무예비역의 제보도 받았나.

“승선근무예비역들의 제보는 많았다. 폭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반 직장에서도 폭언은 발생한다. 그런데 배에서의 폭언은 일반 직장의 그것을 몇 배로 농축한 느낌이다. 배에서의 노동은 교대만 있다. 퇴근이 없는 것이다. 일이 끝나고 방에 들어가도 외부에서 방문을 열 수 있다. 안전상의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괴롭힘이 있을 경우에도 가해자로부터 분리되지 못한다. 선원의 제보는 받지 못했다.”

-선원의 제보는 왜 없었을까. 선원들의 경우 직장 내 괴롭힘이나 산업재해 관련 기사도 찾기 어렵다.

“승선근무예비역은 ‘군인’이라서 통계에 잡히기라도 하지만 선원은 그렇지 않다. 배에서 은폐되는 게 상당히 많을 것 같다. 지켜보는 눈이 적지 않은 건설현장이나 지역 공장에서도 사람 몇 명이 죽지 않으면 산재가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마다 법률구조공단이 있고 지정된 근로감독관이 있어도 포착하기가 어려운데, 배 위는 오죽하겠나. 설령 신고를 하고 싶어도 사고 당시에 한국 근처에 있는 게 아니면 쉽지 않다. 외부에 알릴 시기를 놓치거나 그 시기를 기다리다가 회사와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배에 타고 있는 외국인 선원도 마찬가지다. 사고를 당한 외국인 선원을 아무 곳에나 떨궈놓고 배가 떠나버린 사례도 있다.”

-선원도 산재를 신청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는데 많이 활용하지 않는 것 같다.

“배 위는 모두 노동현장이라 산재로 인정받기 쉽다. 하지만 회사의 논리에 설득당하는 경우가 많다. 일하다가 다친 게 아니라 일 끝나고 방에 들어가다가 미끄러졌는데 왜 산재냐는 거다. (2018년 1월 1일부터 대중교통이나 자가용, 오토바이, 도보 등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으로 출퇴근하다가 다치면 산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저런 논리에 설득될까 싶지만 배가 최초의 직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터넷도 활발하게 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다양하다. 정보를 얻기 쉽다. 배에서는 물어볼 사람은커녕 자유롭게 통화하기도 어렵다.”

-일터가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선원이 체감하는 복잡도는 매우 높을 것이다. 선사 국적, 선박 국적, 사고가 일어난 영해, 심지어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의 국적도 다양하다. 하지만 우선 적용되는 법이 정해져 있다. 그 순서대로 하면 된다. 한국 국적 선원은 무조건 한국 선원법 적용을 받는다. 선사 국적이 어디든 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어야 한다. 선사는 선원법에 정해진 기준에 따라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만약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면 한국 선박회사, 선사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하면 된다.”

-산재를 신청하거나 법으로 다투게 되면 애초 회사가 제시하는 합의금을 받지 못하는 거 아닌가.

“선원은 산재를 신청하고 법으로 다투는 게 훨씬 낫다. 회사가 합의금으로 제시하는 금액이 보통 산재를 신청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금액보다 대체로 낮다. 정말 양심적인 회사여도 선원법에서 정하고 있는 기준에 근접한다. 선원법은 노동법과 달리 직무상 재해, 직무상 사망 시 보상기준이 일수로 딱 박혀 있어서 간단하다. 물론 사건을 공론화하면 회사에서 압박을 하겠지만 민사소송으로 간다고 해도 회사가 전부 이기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지레 겁을 먹고 합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배라는 특성상 현장보존이나 관련자 조사가 어려운 것도 걸림돌이다.

“맞다. 그래서 사고를 당한 당사자 혹은 동료가 당시 현장 사진을 많이 남기는 수밖에 없다. 육지에서 작업중지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배에도 사고가 난 부분에 작업중지 명령을 내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작업을 중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배는 이미 떠났으니까. 관련자 조사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있으면 대면조사를 하지만 배가 떠난 경우에는 전화로 조사를 한다. 구민회씨 사건의 경우 해경이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서면 질문지를 돌렸다. ‘괴롭힘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있었다고 치자. 누가 거기에 괴롭힘을 봤다고 체크하겠나. 피해자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건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산재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에 좀 더 무게를 둬야 한다. 사망한 경우에는 고인이 남긴 자료가 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산재도 막상 조사에 들어가면 동료들이 피해자에게 유리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배는 최악일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그래도 승선근무예비역은 논란이 일자 병무청과 해양수산부에서 고충처리담당관을 만드는 등 대책을 내놨다.

“노력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병무청과 해수부는 승선근무예비역과 선원을 관리·감독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관리·감독 기관을 통해서만 고충신고를 받으면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큰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 해당 기관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되려면 독립심사가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아예 범죄신고처럼 ‘국번없이 ○○○’과 같은 식으로 하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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