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광장’ 집어삼키는 ‘조국 블랙홀’

2019.10.01 22:09 입력 2019.10.01 23:03 수정

주말 서초동 촛불서 사라진 ‘집회 선봉’ 민주노총 깃발

청와대 앞·톨게이트 지붕·철탑 위서 ‘메아리 없는 절규’

비정규직·이주노동자 등 현안…‘소외·위축’ 우려 커져

경북 김천시 한국도로공사 본사에서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본사 점거 농성 중인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 연합뉴스

경북 김천시 한국도로공사 본사에서 직접고용을 촉구하며 본사 점거 농성 중인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렸다. 이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조국 수호’ ‘검찰개혁’ 등 구호를 외쳤다. 대규모 집회마다 선봉장 역할을 하던 민주노총 깃발을 이날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그날 다른 곳에 있었다. “나도 조국이다”라는 구호 이전에 “내가 김용균이다”라고 외쳤던 발전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날 청와대 앞에서 위험의 외주화 중단과 노무비 착복 근절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열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말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는 이례적으로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고 김용균씨가 저를 이 자리에 소환했다고 생각한다. 민정수석의 운영위 불출석이라는 관행보다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의 통과가 중요하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결심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조국 수호’라는 외침이 가득했던 서초동 촛불집회와 달리 이곳 결의대회에는 400명만이 자리했다.

그 시각에도 노동자들은 제집이 아닌 길거리에서 자리를 지켰다. 한국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은 경북 김천 도로공사 본사와 서울톨게이트 캐노피 위에서,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인천 부평공장 앞에서,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삼성해고자 김용희씨는 강남역 사거리 철탑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발전사 비정규직 결의대회에 참석한 한 노동자는 “‘내가 김용균’이라고 외칠 때는 내가 일하는 일터도 힘들고 절박하다는 표현을 김용균 노동자를 통해 드러낸 것”이라며 “돈이 많지도 않고 어떤 특혜를 얻을 수도 없는 내가 조국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이게 나라냐’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모였다고 하는데, 대법원에서 승소했음에도 여전히 길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노동자들에게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로 보일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국 사태’가 용광로처럼 사회적 의제를 집어삼키면서 노동자들이 광장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들이 떠안은 시급한 문제 역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중이다.

더 큰 문제는 조 장관이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해 검찰개혁이 완수된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달 24일 조 장관은 “‘창원 어린이 뺑소니 불법체류 외국인 용의자’와 같이 자진출국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불법체류 외국인 수를 줄일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사회적 문제가 된 범죄자가 미등록 외국인임을 부각한 것이다.

조 장관이 대책 마련을 지시한 당일, 경남 김해에서는 태국에서 온 29세 노동자 품 누 아누삭이 자신이 일하던 공장 인근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날 부산출입국·외국인청은 아누삭이 근무하던 제조업체를 급습해 미등록 이주노동자 8명을 체포했다. 부산청은 아누삭의 죽음이 자신들의 단속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목격자들은 1일 법무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단속반원들이 작업장에 잠입해 이주노동자들을 덮쳐 놀란 노동자들이 도망치다 계곡 아래로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주공동행동은 “(조 장관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단속을 더욱 강화할 것이 우려되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며 “영세사업장의 운영을 위해서라도 이주노동자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주노동자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 근원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날 서울고용노동청 농성에 돌입해 “불법파견 범죄자 정몽구·정의선 부자를 조국처럼 수사하라”고 외쳤다. 전날 고용노동부는 기아차 사내하청노동자 860명에 대한 불법파견 시정지시를 내렸다.

노동부는 지난해 말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단 기준에 따라 하청노동자 1670명이 불법파견됐다고 결론내렸지만, 스스로의 판단을 뒤집고 검찰이 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860명만 직접고용하라고 기아차에 지시했다. 김수억 기아차 비정규직지회장은 “검찰개혁을 지속적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정부가 스스로 대법원 판결 기준을 뒤엎고 검찰 기준에 따라 절반짜리 시정명령을 내리는 상황에서 무슨 검찰개혁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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