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목소리가 된 ‘인스타툰’···데이트폭력 다룬 ‘다 이아리’의 이아리 작가를 만나다

2019.11.05 18:39 입력 2019.11.21 15:25 수정

웹툰의 제목  <다 이아리>는 주인공 ‘이아리’가 겪은 데이트 폭력 피해가 일기장 속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같은 피해를 겪었거나 또 겪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담았다. 시드앤피드 제공

웹툰의 제목 <다 이아리>는 주인공 ‘이아리’가 겪은 데이트 폭력 피해가 일기장 속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같은 피해를 겪었거나 또 겪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담았다. 시드앤피드 제공

웹툰 전성시대다. 내년이면 국내 웹툰시장 규모가 1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뜻밖에 각광받는 웹툰 무대가 있다. 바로 인스타그램이다. 사진·그림 등 이미지 중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유롭게 웹툰을 게시하고 감상하는 문화가 ‘인스타툰’이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복잡한 승인·등록 과정을 거쳐야 하는 포털 등의 플랫폼 대신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손쉽게 웹툰을 올리고 수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는 SNS 특유의 탁월한 접근성이 성장 기반이 됐다. 5일 현재 ‘인스타툰’으로 검색된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23만8000여개에 달한다.

인스타툰은 SNS 특성상 1회당 10컷 이하로 한정돼 있다는 점, 독자들과 일상적으로 소통한다는 점 때문에 유통뿐 아니라 속성 면에서도 기존 웹툰과 결을 달리한다. 그중 돋보이는 특성은 바로 기존 플랫폼이 채 수용하지 못한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가득하다는 점이다. 언론·포털 등 다른 권력을 빌릴 필요가 없는 SNS는 여성 등 약자들이 자유롭게 발화하고 또 공감할 수 있는 창구가 됐다. 기혼 여성이 겪는 암묵적인 성차별을 세밀하게 포착한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초기 인스타툰의 인기를 이끈 기념비적 작품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며느라기>를 보고 인스타툰이라면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익명으로 그리는 웹툰을 통해서라도 내 안에 곪아있던 상처를 털어놓으면 조금이나마 후련해지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죠.”

데이트폭력 피해 경험을 담아 연재한 인스타툰을 엮어 최근 책 <다 이아리>를 출간한 이아리 작가는 ‘자기 치유’의 일환으로 인스타툰에 뛰어들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저를 위해 시작했어요. 주변인들에게도 피해 경험을 얘기할 수 없는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죠. 그런데 웹툰을 연재하게 되면서 저와 같은 경험을, 오히려 더 심한 피해를 겪은 여성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책임감이 생겼죠. 저처럼 혼자 앓고 있을 수많은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에게 ‘혼자가 아니야’라는 위로와 공감이 되고 싶었어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에 대한 공론화를 위해 작품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다 이아리>는 이아리 작가가 겪었던 데이트폭력의 전 과정과 이후 치유를 위한 노력까지 섬세하게 그려냈다. 불행한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인의 복장과 일정을 통제하는 것으로 시작돼 거듭되는 폭언과 폭력, 스토킹으로까지 이어지는 데이트폭력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집약적으로 드러냈다. 그간 기존 플랫폼 웹툰 중에서도 성폭력 등 여성 대상 폭력을 다룬 웹툰들은 있었다. 그러나 데이트폭력을 정면으로 내세운 작품은 없었던 만큼 <다 이아리>는 그 자체로 뜨거운 공론장이 됐다. 연재 계정(@i_iary)의 구독자 수는 5일 현재 10만2000명을 넘어섰다.

“또 다른 ‘이아리’들의 사연을 공모한다는 공지를 올렸더니, 1주일에 70통씩 메일이 쏟아졌어요. 연재 도중 채 답장할 수 없을 만큼 많은 DM(다이렉트 메시지)이 왔고요. 감사하게도 웹툰의 영향을 받아 폭력에서 벗어나 가해자를 고소하고 나선 독자도 나타났죠. 다른 한편으론 데이트폭력으로 실형을 살고 출소한 뒤에도 피해자를 찾아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가해자의 메시지까지 와요. 데이트폭력이 저 혼자 앓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아니라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걸 보여주죠.” 너무나 사적인 문제와 연관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번번이 사회적 공론화 기회를 놓쳐왔던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목소리가 SNS라는 새로운 창구와 웹툰이라는 매력적 형식을 통해 세상을 만난 것이다.

<텨다 마음가는 대로>의 최설아 작가가 인스타그램 계정(@tyeodya) 에 연재 중인 인스타툰의 한 장면. 최설아 작가 제공

<텨다 마음가는 대로>의 최설아 작가가 인스타그램 계정(@tyeodya) 에 연재 중인 인스타툰의 한 장면. 최설아 작가 제공

인스타툰이 ‘약자의 목소리’를 키우는 확성기가 될 수 있음을 처음 보여준 수신지 작가는 낙태죄를 엄벌하는 가상사회를 그린 두 번째 작품 ‘GONE’을 통해 구독자 12만명과 소통하고 있다.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담아내지 않더라도, 여성이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전에 없던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작품들도 있다. 대학에서 취업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사회적 경로를 벗어나 무작정 해외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20대 여성의 일상을 담은 최설아 작가의 <텨댜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암과 투병하게 된 그림책 작가이자 두 돌 아기 엄마의 일상을 그린 윤지회 작가의 <사기병>은 각각 구독자 11만명, 12만명에게 사랑받은 인스타툰을 엮어 만든 책이다. 취직을 하지 않는 ‘니트’ 청년으로서 일상과 문제의식을 다룬 김혜민 작가의 <니트일기> 시리즈 역시 인스타그램에서 3만6000명의 구독자를 모으며 ‘내 이야기’라는 공감 댓글 세례를 받고 있다.

<며느라기>의 수신지 작가가 인스타그램 계정(@noh.family)에 연재 중인 인스타툰 <GONE>의 한 장면. 수신지 작가 제공

<며느라기>의 수신지 작가가 인스타그램 계정(@noh.family)에 연재 중인 인스타툰 <GONE>의 한 장면. 수신지 작가 제공

이아리 작가는 “인스타툰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특히 두드러지는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남몰래 숨겼던 상처나 불편함도 이제는 함께 공유할 만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많은 여성들이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 아닌 또 다른 ‘이아리’들의 사연을 담은 <다 이아리> 시즌2 작업에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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