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문의 유산을 잇는다

2019.11.08 16:44 입력 2019.11.08 20:10 수정
이인규

부모와 살던 집터에 지은 내집 물려받은 삶의 자세 건축에 녹여내다

ⓒ노경

ⓒ노경

매년 찾아오는 중요한 문화 행사로 자리 잡은 ‘오픈하우스 서울’의 웹페이지(www.ohseoul.org)에 올라온 건물 소개 글을 읽다가 눈에 띄는 두 집을 발견하였다. 오픈하우스 서울은 평소 잘 개방하지 않는 장소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사로 도시와 건축을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세입자가 불편한 환경에서 거주하는 것을 건축주가 반대했다는 이야기나, ‘아버님의 젊은 시절에 대한 존경’을 담아 기억의 흔적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거나 상상한 ‘건축주’의 사전에는 없을 것 같은 낯선 단어들이어서 신선했다. 이런 유니콘 같은 건축주가 있다니! 그런 집을 만든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봉천동의 ‘화운원’과 전농동의 ‘유일주택’을 직접 찾았다.

두 집이 지어지게 된 사연은 꽤 많이 닮아 있었다. 부모님이 젊은 날부터 터 잡고 살아온 집이 수십년이 지나 너무 낡아버리자, 그들의 자녀가 수년간 고민 끝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나섰다. 대출을 받아 이사 다니는 게 익숙한 요즘 세상의 시류와는 완전히 다른, 한곳에서 오래 머무는 삶을 사셨던 부모님은 처음엔 걱정스러운 마음에 반발도 하셨다. 자녀들은 가족의 집을 새롭게 짓는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수없이 고민하고 알아본 끝에 뜻이 맞는 건축가를 찾았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궈낸 빛나는 결과물을 이제 막 세상에 선보였다. 비슷한 이야기를 품었지만, 다른 개성을 띠는 두 건물을 소개한다.

[화운원]
건축주: 조현호
건축가: 오승현, 박혜선(건축사사무소 서가)

날이 좋을 때면 언제라도 쉽게
바깥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화운원의 외부 테라스는 도시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공간이다.

ⓒ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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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살고 싶은 좋은 집, 화운원

첫 만남의 어색함을 풀기 위해 준비한 첫 질문은 건물의 이름 화운원(花雲園)에 관한 것이었다. 한자 뜻풀이로 ‘꽃과 구름의 언덕’이라는 가벼운 답변을 예상했는데, 놀랍게도 건축주 조현호씨에게서 ‘어머니의 존함에서 따온 것’이라는 뭉클한 대답이 돌아왔다. “모두에게 헌신적이셨던 어머니는 온 가족을 믿음으로 인도한 ‘복의 근원’이셨기에 이 집을 통해 기념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기에 이 건물 안에 들어오는 사람도 천국의 동산(園)처럼 평안함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담았다고 했다. 건축주는 봉천동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동네에서 자랐고, 화운원이 들어선 자리에 산 지는 40년 가까이 되었다. 부모님과 평생 지낸 터를 새로이 닦고 어머니의 이름을 붙인 건물을 지으려는 이의 마음가짐이 어떠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에게 봉천동은 말 그대로 고향이다. 한때는 낙후된 동네라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울대학교가 가까운 입지에 교통여건도 나아지고 편의시설도 늘어나면서 개발의 움직임이 일어난 지 오래다. 그런 변화가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예전에는 오래 머물며 살면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기 좋은 동네였는데, 지금 새로 들어서는 건물들은 수익성만 좇아 지은 원룸이 대부분이다. 조씨는 본격 건축을 앞두고 이 건물도 특정 평면만 고집한다면 예전처럼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는 동네의 분위기는 점점 더 사라질 것 같다는 우려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룸부터 스리룸까지 다양한 규모의 평면을 섞었다. 입주하는 분들이 집에 만족해 오래 머물게 되길, 그러면서 조금씩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이웃이 되길 바랐다.

‘이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큰 매력은 ‘외부 테라스’에 있다. 건물이 고층화되어 지면에서 점점 멀어지다 보면 사람들이 외기를 접하는 일이 줄어들기 마련. 날이 좋을 때면 언제라도 밖에 나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의 로망이다. ‘살아보면 알게 되는’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은 ‘화장실’이다. 임대를 목적으로 하는 원룸 등 소형 평형에서는 방의 면적을 넓히려 화장실을 최소화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건축가의 생각은 달랐다. 화장실은 사실 우리가 매일, 자주, 오래 이용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심지어 씻기 위해 맨몸으로 들어가니 살이 직접 닿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닌가. 그 덕에 가장 작은 원룸의 화장실조차 옹색하지 않고 번듯하게 만들었다.

ⓒ노경

ⓒ노경

‘오래 살고 싶은 좋은 집’을 만들려는 것은 단지 건축주의 집에 관한 철학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건물은 한번 지어지면 오래간다. 최소 수십년, 길게는 백년을 넘길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까지도 건물이 충분히 가치를 갖고 경쟁 우위에 있으려면, 정말 ‘잘 지어야’ 한다. 싸게 많이 지어 최대한의 수익을 내려는 건물들에 비하면 당장의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서도 계속해서 ‘살아보고 싶은 집’이 되려면 가구수를 지나치게 늘려 거주 환경의 질을 떨어트리면 안된다고 건축주는 생각했다. 즉 ‘많이 버는 것보다 꾸준히 버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물 들어올 때 바짝 노를 저어야 한다’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고지식한 고집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차근차근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느껴졌다. 이렇게 아주 먼 미래를 바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정말로 이곳을 가족이 뿌리내린 터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이곳을 매매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대를 이어서 살아갈 이곳은, 말 그대로 ‘가문의 유산’이었다.

[ 유일주택 ]
건축주: 유일규
건축 진행: 유정민
건축가: 최하영(mindmap Architects), 박창현(around architects)

유일주택은 공용공간인 복도를
조경 공간으로 꾸미고 의자와 조명,
콘센트가 있는 ‘모두의 거실’로 조성해
입주자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 ‘유일목욕탕’에서 ‘유일주택’으로

또 다른 가문의 유산이 자리 잡은 곳은 서울시립대학교 근처 전농동의 오래된 골목 안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새 건물이 동네를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건축주의 딸 유정민씨는 부모님이 전농동에 자리 잡은 35년 전부터 온 동네가 다 아는 ‘목욕탕집 딸내미’였다. 그만큼 목욕탕이 온 동네의 사랑방이던 시절이 있었다. 목욕탕 손님이 줄자 2000년대 들어 건물을 작은 원룸 형태로 나누어 세를 놓고 있었다. 벽돌로 된 굴뚝만이 이곳이 목욕탕이었다는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유씨는 건물을 새로 짓더라도 부모님의 젊은 시절이 녹아 있는 목욕탕의 기억은 남겨놓고 싶었다. 그래서 새집도 아버지 성함의 앞 두 글자를 따서 지은 ‘유일목욕탕’을 그대로 이어 ‘유일주택’이라 이름 지었다. 건물 지하에는 예전 목욕탕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잇는 공간을 만들었다. 바로 입주민이 공유할 수 있는 ‘1인 목욕실’을 만들어둔 것. 안에는 유일목욕탕 시절 사용했던 오래된 체중계가 그대로 놓여 있다. 부모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여실히 전해지는 공간이다.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김주영(studio millionroses)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공용공간인 복도를 ‘모두의 작은 거실’로 만든 것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이 자연스레 만나던 예전 목욕탕의 공간 기억과 어딘가 닮아 있다. 시원하게 열린 복도에는 빛과 바람이 든다. 층마다 잘 가꾸어진 조경 공간을 마주 보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있고, 그 옆엔 조명과 콘센트도 마련되어 있어 ‘거실’이라는 말이 손색없다. 공용공간을 줄여서 이를 가구 전용면적에 포함시켰다면 0.5평 정도씩은 더 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축가는 유일주택의 주된 평면인 원룸과 1.5룸처럼 작은 주거 공간일수록 거주자의 삶이 확장될 수 있는 공용공간의 질을 높여 함께 공유하는 것이 전체적인 공간 경험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집을 지을지 고민하면서 유정민씨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똑같은 건 싫다’였다. 사람마다 성격도, 옷 스타일도 모두 다른데, 왜 다들 똑같은 공간에서 사는지 이상했다. 집은 사는 사람을 닮아 개성이 묻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개성 있는 건물을 만들자, “건물을 닮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입주자들이 먼저 ‘공간을 깨끗하게 쓰겠다’고 얘기했다. 엘리베이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늘 걸어 내려간다는 입주자도 있다. 플로리스트인 유씨와 일러스트레이터가 꿈인 한 입주자가 각자 서로의 집 앞에 꽃을 걸고 그림을 그려서 붙여줬다는 이야기는 너무 낭만적이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설계 당시 건축가가 “지금은 없어서 그렇지, 이런 집이 있으면 이 집에 맞는 분들이 올 거예요”라는 예언 같은 말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유씨는 아직도 신기한 듯했다. 유씨는 앞으로도 이 집을 충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라도 이 집에서 지냈던 시절을 소중하게 떠올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한 일일 것이다.

ⓒ홍석경

ⓒ홍석경

■ 좋은 건축주가 좋은 집을 만든다

최근에는 집 관련 콘텐츠가 많아져서 마음만 먹으면 좋은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덕에 좋은 집을 알아보는 눈도 많아졌다. 비용을 더 들여서라도 좋은 건물을 지어 오랫동안 잘 유지하겠다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동안 ‘좋은 전례’를 쌓으려 노력해온 젊은 건축가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열리고 있다. 건축가들의 진취적인 작업은 실제로 시장에서의 호응으로 이어졌고, 이는 건물주가 바라는 경제적 선순환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일반 주거 영역으로 건축가들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은 그 공간에서 세 들어 사는 입주자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다. 고민해볼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언젠가 나와 잘 맞는 집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이 될 수 있다.

주택 시장을 넓게 조망하면 ‘좋은 건축주가 좋은 집을 만든다’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위와 같은 선순환의 시작은 건축주가 어떤 집을 지을 것인지 고민하는 단계에서 이미 좌우된다. 사실 일반인이 건물을 짓는 일은 평생 흔치 않은 경험이다. 당장 받아든 견적서의 금액과 수익률에 몰두한다면 시야는 좁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건물은 길게 봐야 한다. 더욱이 내 가족이 뿌리내리고 살던 터라면 더욱 길게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에서 배운 ‘최대의 수익’ 외에도 우리는 부모님의 삶에서 배워온 소중한 가치들을 기억한다. 종교적 믿음, 타인에 대한 배려, 자연스레 어울려 사는 삶 같은 가치들. 새로 짓는 집을 통해 그런 가치들이 이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문의 유산’이자 ‘가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만나본 두 집의 이야기가 작은 울림이 되길 바란다.

▶필자 이인규

[안녕, 둔촌 프로젝트 이인규가 만난 다른 집](1)가문의 유산을 잇는다


둔촌주공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곳에서의 좋았던 시간과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고,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을 공동기획했다. 그동안의 작업을 통해 집에 대한 고정관념에 ‘작은 균열’을 냈다는 것에 작은 의미를 느끼며, 이제는 비슷하게 ‘작은 균열’을 내는 이들을 찾아가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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