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거장의 임신중절 고백, 그 강렬한 울림

2019.11.08 20:53 입력 2019.11.08 20:58 수정

사건

아니 에르노 지음·윤석헌 옮김

민음사 | 84쪽 | 1만800원

프랑스 현대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사건>을 통해 35년 전 임신중절 사실을 고백한다. 아니 에르노는 담담하게 감정을 절제한 채 당시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민음사 제공

프랑스 현대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사건>을 통해 35년 전 임신중절 사실을 고백한다. 아니 에르노는 담담하게 감정을 절제한 채 당시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민음사 제공

아니 에르노(79)는 1964년 임신중절을 한다. 대학 시절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그녀가 배가 불러오는 걸 기다리는 것 이외에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그리고 199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경험을 글로 쓰게 된다. 이 강렬한 임신중절에 대한 고백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에 소개된다. 이 사이엔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할까.

아니 에르노가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는 프랑스에서 낙태가 불법이던 시대였다. 1970년대 여성들이 거리에서 벌인 긴 싸움 끝에 1975년 프랑스는 낙태가 합법화된다. 그땐 매년 250명의 여성이 불법 임신중절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올해 4월,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낙태죄를 위헌이라고 결정한다. 만약 이 같은 결정이 없었다면, <사건>은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현대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다. 프롤레타리아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과 거기서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내면을 생생하게 그려낸 <부끄러움>, 1941~2006년 프랑스 사회를 한 여성의 시각으로 기록한 <세월> 등으로 세계적 작가로 자리 잡았다.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프랑스 ‘갈리마르 총서’에 편입됐다.

[책과 삶]거장의 임신중절 고백, 그 강렬한 울림

<사건>은 여성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담은 고전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여성 작가들의 고전을 모은 쏜살문고 ‘여성 문학 컬렉션’의 하나로 출간됐다. ‘무민 시리즈’ 작가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과 <두 손 가벼운 여행>, 박완서의 <이별의 김포공항>, 강경애의 <소금>, 강신재의 <해방촌 가는 길>이 함께 출간됐다.

여전히 범죄시되며 금기시되는 낙태 경험을 개인적·사회적 맥락에서 완벽히 복기해 들려준다는 점에서 <사건>은 컬렉션의 앞에 설 만하다. 자전적 탐구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결합시킨 자전적 글쓰기를 해왔던 아니 에르노였지만, 임신중절을 글로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상적 성병 검진을 위해 산부인과를 들렀다 불현듯 36년 전 경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1963년, 생리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며 수첩에 ‘아무것도 없음’이라 적어갔던 절망적인 시간들로 돌아간 그녀는 임신 진단부터 중절 수술까지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과 감정을 메모와 일기를 찾아보며 글쓰기를 시작한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끝까지 가리라 결심했음을 알고 있다. 스물 세 살, 임신 진단서를 찢어버리며 임신중절을 결정했을 때와 똑같이.”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제 임신중절이 여성의 ‘선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는 “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한다…이 사건을 당시의 실재 속에서 과감하게 맞설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임신중절이 이제는 금지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책과 삶]거장의 임신중절 고백, 그 강렬한 울림

대학생 아니에게 임신은 사회적 신분 추락과 학업 중단을 의미했다. “내 육체가 남자들의 육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녀는 임신을 통해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그녀는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첫 번째 수혜자”였지만 임신은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으로 다가오고, 논문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절망한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남성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털어놓자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고 되레 성추행을 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임신중절에 대한 정보와 도움이었지만 친구와 의사로부터 돌려받은 것은 질책과 외면, 두려움과 같은 반응뿐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그녀가 직면한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유산방지제를 놔주기도 한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아니 에르노는 법 밖에서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뜨개질 바늘을 구해 중절을 시도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임신중절사를 찾아나선다.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며 충격을 준다.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문장들을 직접 겪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글로 써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대학교 기숙사 화장실에서 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잉태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세대를 거듭하며 여성들이 거쳐간 사슬에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임신중절을 한 그녀는 하층 계급으로 추락한다. 중절 후 출혈을 일으키자 의사는 그녀를 빈민들이 가는 공립병원에 데려가며, 수술대에 누운 그녀에게 인턴은 “나는 빌어먹을 배관공이 아니야!”라고 외친다. 아니는 “이 문장은 계속해서 세계와 나의 계급을 나누고, 마치 몽둥이라도 사용하는 듯 의사들을 노동자들과 중절한 여자들에게서 분리시킨다”고 말한다. 임신과 중절이 모두 끝난 이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자신의 원래 지위로 복귀한다.

아니 에르노는 담담하게 감정을 절제한 채 당시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오해와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해낸 이유는 무엇일까.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셈이다.”

“임신중절이 나쁘기 때문에 금지되었는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법에 비추어 판단했고, 법을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소설을 덮고 나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고 유기한 뉴스 속 여고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학생이 어떤 대안도 없이 홀로 보내야 했을 10개월의 시간, 차디찬 화장실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두려움과 고통 속에 홀로 치러야 했던 출산의 시간들은 그 누구도, 어디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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